[구국의 보고(寶庫) 대구] 광복회 최초 결성지 '달성공원'…독립운동 정신 깃든 '서문시

1960년대 초 대구신사 건물 철거 전 달성공원 모습(신현국 촬영). 2023년 대구근대역사관 특별기획전 '대구에서 만나자' 일부 발췌. 대구문화예술진흥원·대구근대역사관 제공

"대구는 우리가 위기에 처해졌을 때 의식주 이상의 것을 지켜준 도시이자, 아무리 어려운 시기라도 그 가치를 지켜준 도시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故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

정부가 구국(救國)정신이 살아 숨 쉬는 대구에 독립·호국·민주의 역사가 담긴 '국립구국운동기념관' 건립을 추진한다. 대구는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출발지로 꼽힌다. 대구 달성공원은 대표적인 항일결사 단체인 '광복회'가 최초로 결성된 곳이며, 서문시장은 3·8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항일·구국운동의 중심지라는 역사적 상징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대구 만세운동의 시작과 구국의 현장에는 계성학교가 있었다. 또한 대구는 국내 유일 독립유공자 전용 묘지인 '국립신암선열공원'이 조성돼 있으며, 7대 특·광역시 중 서울 다음으로 많은 서훈 독립운동가를 보유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3월 "'애국도시 대구'를 상징할 국립구국운동기념관을 짓겠다"며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을 비롯해 국가 위기 때마다 앞장서 일어났던 대구의 정신을 널리 알리고 계승하는 공간으로 만들 것"이라며 국립구국운동기념관 건립을 약속했다.

구국운동사의 구심점 역할을 할 대표기관이 대구에 건립되면 구국정신 보존과 계승은 물론 인근 역사문화자원을 연계해 새로운 미래 가치를 재창출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국립구국운동기념관 대구 건립을 앞두고 대구의 구국역사 현장과 항일독립의 흔적들을 살펴본다.

◆달성공원에서 광복 꿈꾼 청년들

지난달 25일 '달구벌 역사문화 알기 행사'에 참여한 대구 시민 수강생들이 달성공원에 모였다. 1915년 8월 25일 비밀결사조직 '광복회'가 달성공원에서 결성된 날을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서다.

1915년 8월 25일, 전국에서 모인 청년들은 국권회복과 독립을 꿈꾸며 대구 달성공원에서 '광복회'를 결성했다. 광복회는 1910년대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광복회는 1910년대 독립운동 단체로는 유일하게 전국 조직망을 갖추고 의협투쟁을 전개해 의열투쟁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광복회는 국권회복과 독립에 대한 열망을 하나로 모았고 3.1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청년들은 왜 대구에서 모였을까? 당시 대구는 사람과 물산이 드나드는 '열린 도시'로 고을의 위상이 높았다. 지형·사회적 이점으로 조선 후기에는 경상도 71개 고을을 통괄하던 경상감영이 위치했으며, 전국 장시인 서문시장과 약령시가 번성했다. 이에 일본인들도 일찍부터 대구에 정착하면서 식민통치 기구도 늘어났으며, 대구에선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비롯해 달성친목회,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 등 항일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특히 달성공원 일원은 고대 토성이 축조된 시기부터 조선 후기 경상감영이 설치되기까지 줄곧 대구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1910년대 달성공원은 행락 장소이자 휴식처였으나 요배전과 대구신사가 설치돼 대구에 들어온 일본인들에게는 숭배의 장소였다. 일제 감시를 피할 수 있는 장소로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찾는 달성공원을 결성지로 선택해 광복회 결성이 이뤄진 것이다.

일제강점기 달성공원의 모습. 달성공원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휴식처이자 대구신사가 있어 일본인들에게는 숭배의 장소였다. 2023년 대구근대역사관 특별기획전 '대구에서 만나자' 일부 발췌. 대구문화예술진흥원·대구근대역사관 제공

◆3.8독립만세운동의 시작, 서문시장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독립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조선이 독립할 수 있도록 힘차게 만세를 부릅시다"

서문시장은 3.8독립만세운동 정신이 깃든 구국 역사의 현장이다. 서문밖시장은 흔히 '큰장'이라 불렸는데, 1919년 3월 8일 큰장 장날에 이만집 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 목사 등 기독교 지도자들과 계성학교를 중심으로 신명학교, 대구고보 학생들, 장꾼과 농민 등 1천여명이 서문시장에 운집해 3.8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계성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물론 신명학교에서도 교사와 학생 50명이 참여했고 대구고보 학생 200여명도 만세운동에 동참했다. 동산성경학당(현 영남 신학대) 강습생 20명도 참여했다.

이들은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1km가 넘는 만세운동행렬은 서문시장을 출발해 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 종로를 거쳐 약전골목, 중앙치안센터, 대구백화점 쪽으로 향했다. 일제는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일대) 앞에서 무자비하게 진압했지만 만세운동은 10일에도 계속됐다. 기독교인과 계성학교 교사와 학생, 대구고보 학생과 시민 등 200여명이 2차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1919년 3월 8일 대구 만세운동의 중심에는 계성학교가 있었다. 독립선언문을 등사했던 계성학교 아담스관 지하의 모습. 대구시 제공

◆대구 만세운동 요람, 계성학교

일제강점기 1919년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대구의 3.8만세운동은 계성에서 시작됐다. 계성학교(현 계성중고등학교)는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설립된 중등학교로, 1906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아담스(안의와) 목사가 설립했다.

1919년 3월 8일 대구 만세운동의 중심에는 계성학교가 있었다. 계성학교 교사들이 주축이 돼 만세운동의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특히 독립선언문을 등사했던 장소가 계성학교 아담스관 지하였다.

계성은 건학이념인 기독교 정신에 바탕해 자유·자주정신으로 대구 3.1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고, 이를 기념하고자 매년 3월 8일 대구만세운동 재연행사와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이 정신은 사랑과 봉사, 개척과 도전정신과 함께 개교 이후 오늘까지 이어져 온 계성의 정신이다.

계성중학교는 최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희생한 선배들의 업적을 기리고자 계성학교 출신 독립유공자 79명의 이름과 얼굴을 새긴 '3.8만세운동 기념공원'도 학교 교정에 조성했다. 아울러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김재범 씨의 후손들은 계성중학교에 3.1장학금을 기탁해 매년 재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권혁재 계명대 사무국장은 "개성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대구 만세운동의 주축이 돼왔으며 계성의 자유·개척·봉사 정신은 대구의 구국 정신, 구국 역사와 함께 중심이 되어 이어져왔다"며 "무엇보다 독립선언문을 등사했던 아담스관은 역사적으로 상당히 의미가 크고 상징성이 있는 공간"이라고 강조했다.

강은경 기자 ekka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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