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군의 진군, 한계는 없다 [여군 병과 전면 개방 10년 ‘여풍당당’]
SPECIAL REPORT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의 목소리엔 힘이 넘쳤다. 지난달 26일 전쟁기념관을 찾은 제281시험비행대대 소속 정다정(38) 소령은 KT-1 기본훈련기가 눈에 띄자 “초임 장교 시절 비행 훈련하러 종종 탔다”며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2009년 임관 후 15년이 지난 지금 정 소령은 한국형 초음속 전투기인 KF-21 개발시험비행조종사에 여군 최초로 선발돼 활약 중이다. 2026년 실전 배치를 앞두고 시제기의 각종 테스트를 책임지는 개발시험비행조종사는 현재 정 소령 등 공군 최정예 조종사 8명이 맡고 있다. 그는 “여군이 아닌 대한민국 공군이란 자부심이 있을 뿐”이라며 “하늘에 경계가 없듯 국방에도 한계는 없다”고 각오를 다졌다.
대한민국 군대에서도 여풍이 거세다. 현재 장교와 부사관 등 여군 간부는 1만9200명에 달한다. 전군 간부 중 여군 비율도 10.8%로 창군 이래 처음 10%를 넘어섰다. 줄곧 1500명 수준을 유지하던 여군은 1997~99년 육·해·공군사관학교가 여생도를 받아들이면서 급속히 늘기 시작했다. 2017년 육사 73기 졸업식 때는 육사 최초로 1~3등을 여생도가 휩쓸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여기에 2014년 육·해·공군이 모든 병과를 여군에 전면 개방한 게 또 다른 계기가 됐다. 이후 10년간 여군은 전방의 야전 포대장과 GOP(일반전초) 대대장을 비롯해 해군 함장과 전투비행대대장까지 ‘금녀의 영역’으로만 여겨졌던 병과에 잇따라 도전장을 내밀며 ‘여군 최초’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실제로 전방과 오지 등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여군도 2018년 603명에서 올해 1871명으로 6년 사이 세 배로 늘었다.
국군 내 여풍은 앞으로 더욱 확산될 전망이다. 국방부도 2027년엔 여군 비율이 15.3%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고 군 어린이집 확대 등 일·가정 양립을 위한 여군 근무 환경 개선에 힘을 쏟을 계획이다. “국토방위라는 대의 앞에 성별 구분은 없다”는 정 소령의 다짐처럼 오늘도 여군은 전투기를 타고, 탱크를 몰고, 고속함정을 진두지휘하며 전장의 최일선에서 대한민국 수호에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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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장·GOP대대장 맹활약…올해 첫 여군 잠수함 승조원도
1960년대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국군 내에서는 ‘여군 무용론’이 대세였다. ‘여군의 신체 특성상 전투 임무가 제한돼 활용도가 떨어지고 유지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에서다. 1970년대엔 여군을 별도 조직인 여군단으로 관리해 주요 보직 진출에 한계를 두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89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국방 분야 여성 인력 확대 방안’ 연구를 지시하면서 여군에 대한 시각이 단순 보조 역할에서 핵심 병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박 대령은 “전투기 조종사의 비상대기 출격을 위한 이륙 요구 시간이 8분 이내여서 1년 365일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보직”이라면서도 “20년 넘게 조종사로 활동하며 여성이라 장벽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생도 시절엔 오히려 남자 생도가 역차별을 느낄 정도로 많은 배려를 받았다. 훈련도 딸을 둔 교관이 특별히 배치돼 오히려 부담스러울 정도였다”며 “돌이켜 보면 그런 관심이 더 열심히 노력하는 좋은 기제로 작용한 것 같다”고 전했다. 공사 동기생과 결혼한 박 대령은 최초의 전투기 조종사 부부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는 그러면서 “여군이 전투병과에 근무하는 데 대해 우려의 시선을 느낄 때도 있었다”고 토로했다. “전투병과, 특히 포병 장교라고 하면 ‘포탄을 들 힘이나 있느냐’는 비난 섞인 말도 듣곤 했는데, 포병이 단순히 포탄을 들고 사격하는 임무만 수행하는 건 아니다. 사실화력을 이용한 작전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 어느 병과보다 치밀하고 꼼꼼한 대비 태세가 요구되는 게 포병이다. 그런 점에서 남자 군인에 비해 물리적 힘은 부족하더라도 여군 특유의 섬세함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엔 전쟁 양상이 기술전으로 변화하고 무기도 현대화되면서 더 이상 신체 조건이 절대적 변수가 아닌 점도 한몫하고 있다.
황 소령은 현재 임신 5개월째인 ‘예비 엄마’다. 임신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는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섰단다. 그는 “포탄 사격도 나가야 하고 전방 점검도 해야 하는데 임신한 몸으로 버틸 수 있을지 우려가 됐지만 기우에 불과했다”며 “먼저 출산과 육아를 경험한 아빠 선배들 도움도 많이 받았고, 여군이 늘면서 임신한 여군을 위한 각종 제도가 잘 갖춰지고 있는 것도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이현지 한국국방연구원 인력정책연구실장은 “청년 인구 절벽에 따른 병역 자원의 급격한 감소와 여성의 사회 진출 확대 등 최근의 사회 흐름을 감안할 때 여군은 앞으로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대대적인 시설 개선은 물론 남녀 군인이 서로를 인정하며 함께 공존할 수 있도록 인사 제도와 군 내부 문화 등을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허정연 기자 jypow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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