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환자의 사진과 영상을 입력하면 자동 진단, 한국 AI 스타트업의 혁신 기술

의료 영상 통합 분석 소프트웨어 개발기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창업에 뛰어들며 한국 경제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슬라이스마인드 최동혁 대표. /더비비드

암처럼 큰 병을 진단받으면 패닉에 빠지기 쉽다. 당장 수술을 해줄 대형병원을 찾는 일이 쉽지 않을 뿐 더러 대기 시간도 길다. 실제로 큰 병이 의심돼 진단을 기다리거나 수술대기 중에 세상을 떠나는 환자가 적지 않다. 병원 문턱도 밟지 못하고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슬라이스마인드(SliceMind)의 최동혁 대표(29)는 그 원인을 진료현장의 병목현상에서 찾았다. 종양 환자 수는 230만명에 달하는데, 치료 계획을 수립하고 진단하는 종양학과와 핵의학과 의사 수는 10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의사들에게 좋은 비서가 돼 줄 인공지능(AI) 기반 의료 영상 분석 및 진단 솔루션 ‘메타퓨전’(Metafusion)을 개발한 계기다. 최 대표를 만나 의료현장에 AI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들었다.

◇할아버지의 대장암을 계기로 눈 뜬 세상

최 대표는 연세대 의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더비비드

최 대표는 연세대 의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세부 전공으로 방사선종양학을 전공 중이다. AI와 헬스케어의 융합 분야에서 여러 경험을 쌓았다. 창업 전에, 의료 AI 분야의 연구 및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해 병원 및 학계와 협력했다. 이 과정에서 의료 전문가의 고충을 깊이 이해하게 됐다. 이화여대 의대에서 ‘의공학개론’ 강의도 하고 있다. AI가 의료 현장에 적용돼야 하는 이유와 방법론을 지도한다.

방사선종양학을 선택한 배경은 운명에 가까웠다. “어릴 적부터 의료 영상에 관심이 많았어요. 누군가 허리 디스크가 터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디스크가 뭐길래 터졌다는 걸까’하고 스스로 확인하는 아이였습니다. CT, PET, MRI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영상을 찾아보곤 했죠. 그러다 고등학생 때 친할아버지가 대장암에 걸렸습니다. 당시 수술 가능한 병원을 찾느라 온 가족이 애먹었어요. 3개월을 찾아 헤맨 끝에 겨우 지방의 병원에서 수술을 했습니다. 가족으로서 마음이 아팠어요. 종양 환자와 가족들이 저처럼 발을 동동 굴리지 않았으면 했어요. 이들을 안심시키고 빠르게 치료해서 생명을 연장하는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기로 했습니다.”

슬라이스마인드 구성원들. /슬라이스마인드

개인적 동기와 산업적인 이유가 맞물려 창업을 결심했다. “할아버지 일을 계기로 의료 진단 업무의 효율을 향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환자 대비 의사 수가 너무 적은 게 화근이었죠. 적은 인원이 의료 영상을 수집하고 분석한 뒤 치료 계획을 세워야 하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방사선 전문의들은 하루에도 수백장의 영상을 해석해야 합니다. 이런 환경이 피로와 오류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고요. 암 같은 질환은 조기 발견과 정확한 진단이 환자의 치료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저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AI에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창업을 결심하고 함께 할 이부터 찾아 나섰다. “각 분야에서 연구 잘하는 사람들은 어떤지 궁금했어요. 유럽과 미국 각지에서 열리는 학회를 찾아다녔죠. 한 번은 미국 학회에서 종양을 분석하는 기술을 보유한 학생의 발표를 접했어요. 듣자마자 함께하자고 제안했죠. 그렇게 한양대 의대, 가톨릭대 의대, 카이스트 출신의 동료를 확보했습니다. 다들 성실하게 연구 실적을 쌓던 학생들이라 처음엔 두려워했어요. 이렇게 창업을 해도 되는 거냐고요. 두려움을 확신으로 만드는 과정을 거친 후 현재는 13명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팀을 꾸리고 치밀하게 시장조사를 했다. “닥치는 대로 의사를 만나러 다녔습니다. 학회나 전시회는 기회가 닿는 대로 참여했습니다. 현장의 수요를 파악하고, 시장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의료 영상을 다루는 모든 기업을 파워포인트 30장~100장 분량으로 정리했어요. 그 기업의 연혁, 핵심 아이템, 매출, 사내 분위기, 발전 계기 등을 촘촘하게 정리했죠.”.

◇빠르고 정확한 진단을 돕는 의료 영상 통합 소프트웨어 개발

(왼쪽부터) 연구 중인 최 대표, 메타퓨전 개발 화면. /슬라이스마인드

2023년 초부터 ‘메타퓨전’ 개발에 착수했다. CT, CBCT, SPECT, MRI, X선 등 다양한 의료 영상을 하나의 소프트웨어로 통합해서 실시간으로 분석할 수 있는 솔루션이다. 메타퓨전을 활용하면 암, 심혈관 질환, 신경 질환과 같은 질병의 초기 징후를 감지할 수 있다. 의료진은 AI 분석으로 확보한 병변 검출, 크기, 3D 재구성 등의 결과물로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치료 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

솔루션의 가닥이 어느 정도 잡힌 7월, 슬라이스마인드 법인을 설립했다. 모든 의료 영상은 한 장, 한 장의 촬영본을 합쳐서 3D화 한 것이다. 슬라이스마인드는 그중 어느 한 장도 놓치지 않고 분석하겠다는 마음을 담은 명칭이다. 지금까지 최소기능모델(MVP) 개발을 완료했고,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의료기기 품질관리 기준 적합 인정(GMP 인증)을 받고 있는 단계다. 몇 곳의 병원으로부터 구매의향서를 이미 확보했다.

메타퓨전 활용 예시. /슬라이스마인드

의료영상 하나로 종양환자에 대한 모든 정보를 얻기 어렵다는 점에 착안해 통합 소프트웨어를 구상했다. “영상의 종류에 따라 판독하고자 하는 내용이 다릅니다. CT는 혈관 분석, MRI는 작은 연부 조직, PET는 장기나 종양의 대사를 평가하기 위해 촬영하죠. 하지만 종양 환자는 웬만하면 모든 종류의 촬영을 해야 합니다. 종양의 크기와 전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죠. 영상을 모은 다음에는 정상 장기와 병든 장기를 분화해야 하는 작업을 하는데, 이 작업에만 몇 시간이 걸립니다. 그렇게 모은 결과를 모아서 총체적으로 판독해야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관건은 AI 모델 학습을 위한 고품질 의료 데이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의료 데이터는 민감하고 규제가 엄격하기 때문에 개인 정보 보호 표준을 준수하면서 대규모 데이터 세트에 접근하는 건 어렵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병원과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엄격한 데이터 익명화 및 보안 프로토콜을 채택했습니다. 각 기관의 윤리심사위원회 절차를 통과한 환자의 데이터만 활용했죠. 해외 환자의 경우 오픈데이터를 사용했습니다. 워싱턴대 종양학과 교수와의 공동 연구를 통해 해외 추가 데이터를 수집할 계획입니다.”

메타퓨전을 설명 중인 최 대표. /슬라이스마인드

메타퓨전을 사용하면 AI가 장기 분화는 물론, 영상을 통합해서 분석해 준다. 핵의학 분야에서는 AI가판독서도 대신 써준다. “기존의 방식은 인간의 전문 지식에 의존하므로 경험과 작업량에 따라 정확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수많은 SCI 논문도 지적한 문제입니다. 메타퓨전을 쓰면 수동 해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일관된 결과를 보장하죠. 또한 빠르게 대량의 영상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어 긴급 상황이나 압박이 심한 상황에서 유용합니다. 병원 시스템에 통합하면 영상 촬영에서 진단까지 소요되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합니다. 노동집약적인 절차를 대신하니 의사들의 근로여건을 개선하면서 진단의 정확도와 신속도는 높아집니다.”

의사를 비롯한 의료 시장의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메타퓨전의 이점을 누릴 수 있다. “병원은 방사선 전문의의 진단 작업량을 줄여 더 빠르고 정확한 진단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보험사는 불필요한 검사나 진단 지연이 줄어들어 비용 절감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의료 분야 전문 연구자들은 AI의 통찰력을 활용해 연구의 지평을 넓힐 수 있어요. 가장 큰 이점을 누리는 집단은 환자와 환자의 가족들입니다. 환자는 시의적절하고 정확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데요. 환자의 가족까지 안심시켜주기 위해 의료 영상을 대중의 눈높이로 쉽게 풀어주는 소프트웨어도 개발 중입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시행착오도 많았다.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두 분야를 접목하는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혁신에 필요한 요소와 규제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AI에 대한 방사선 전문의들의 인식과 맞서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AI가 인간의 지식을 대체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죠. 저희 역시 AI가 의사를 대체하는 것을 바란 게 아닙니다. AI와 인간 전문가의 협업을 도모하는 데 방점을 뒀죠. 저희의 지향점은 의사들이 AI란 도구를 통해 의료 사고나 실수를 줄여서, 의료 산업 전반의 발전을 도모하는 겁니다.”

◇의료진과 환자 모두가 행복한 의료환경을 만들고 싶습니다

정주영창업경진대회 도전트랙 부문에서 장려상을 거머쥐었다. /슬라이스마인드

2024년은 그야말로 슬라이스마인드의 해였다. 신청서를 작성한 모든 정부과제를 수주했고, 도전장을 내밀었던 모든 창업경진대회에서 수상했다. 원자력혁신창업경진대회 과학기술부 장관상, DMC 혁신캠프 창업경진대회 우수상, 신격호 창업경진대회 최우수상 등 수상이력을 손꼽을 수 없을 정도다. 지난 11월엔 우리나라 최고의 스타트업 창업경진대회 중 하나로 꼽히는 정주영창업경진대회 도전트랙 부문에서 장려상을 거머쥐었다.

슬라이스마인드의 시계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암의 조기 진단과 재발 예측까지 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완성해 건강검진에 메타퓨전을 도입하는 게 당장의 목표다. “지금은 종양에 집중하고 있지만 추후 알츠하이머, 파킨슨병 조기진단 영역으로 확장할 구상입니다. 치의학과용 소프트웨어도 개발 중이죠. 저희의 비전은 의료 전문가가 비교할 수 없는 속도와 정확성으로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는 미래를 만드는 것입니다. 집에 아픈 사람이 생기는 건 당사자나 가족 모두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입니다. 암환자들이 조금이라도 웃을 수 있는 세상이 되려면 의료진의 부담부터 줄여줘야 합니다. 사람과 기술, 의료 영상을 AI로 연결해 모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겠습니다.”

최 대표는 흑역사가 맷집을 키웠다고 강조했다. /더비비드

2024년의 눈부신 성취 이면에는 흑역사가 있었다. 최 대표는 흑역사가 맷집을 키워줬다고 강조했다. “창업에 무지할 때는 정부과제든 창업경진대회든 지원하는 족족 떨어졌습니다. ‘똑똑한 애들이 한 데 모였으니 예선은 붙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이 와장창 무너졌죠. 그때부터 다 같이 죽어라 공부했어요. 사소한 용어부터 타 기업의 전략까지 낱낱이 분석했죠. 시간을 쪼개서 창업 교육을 다니고, 도움이 될만한 사람에게는 작은 선물을 쥐여주며 조언을 구했고요.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나니 불합격보다 합격이 익숙해지는 순간이 왔어요. 실패에 기죽지 마세요. 실패가 시작일 수도 있습니다.”

/진은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