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삼이는 슬퍼서 노을빵을 먹었다 [밥 먹다가 울컥]

세상에 대책 없는 게 여섯 살과 중2라고 했던가. 여섯 살 때 내 사진이 몇 장 있다. 모자를 삐뚜름하게 쓰고 세발자전거에 올라앉아 배를 한껏 내밀고 떼를 쓰고 있는 장면이다. 왕년에 사진 촬영이란 건 큰 이벤트였고 그래서 ‘NG’를 내면 안 되었다. 비싼 필름을 소모하게 되니까. 그래서 어떻게든 포즈를 잡게 마련이었다.
어른들은 45° 각도로 서서 허리에 손을 얹은 후 멀리 하늘을 보는 폼이 유행이었다. 옆에 ‘友情(우정)’ 같은 한자를 쓰고 ‘단기 4200년 0월0일’ 같은 기록을 써넣는 것도 인기였다. 그렇지만 아이들이란 어른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법이라 원하지 않는 사진도 남게 마련이고, 오히려 순간의 포착으로 더 인상적인 사진이 나오기도 했다. 내가 의도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때가 여섯 살이었을 거다.
그리고 중2로 훌쩍 넘어간다. 좁은 교실에 70여 명이 버글거리고 있으니 안 그래도 해석 불가능한 존재인 중2들이 얼마나 대책이 없었겠는가. 쉬는 시간마다 도시락을 까먹고 힘을 내어(?) 서열 정리용 주먹다짐이 벌어지곤 했다.
당시 학교 앞에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지어놓은 거대한 화단이 있었다. 길이가 무려 30~40m는 너끈히 되는 멋진 화단이었다. 어느 쉬는 시간, 그 화단 앞에 몇몇이 모였다. 운이 나쁘게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한 녀석이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화단을 살살 밀어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게 무슨 덕유산 흔들다리처럼 앞뒤로 천천히 움직이는 게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다른 아이들 몇몇이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중2는 근육을 쓰는 나이다. 문제는, 머리를 안 쓴다는 점이다. 녀석들이 힘을 모아 영차, 화단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고기나 햄 같은 건 비싸서 못 먹는 시대의 아이들이었는데도 통일벼, 보리밥, 삼양라면의 힘으로 아침마다 교장선생님이 각별하게 관심을 가지고 물을 잘 주도록 ‘소사 선생님’에게 지시도 했던 화단을 밀어댔고, 그 화단은 지진이라도 만난 것처럼 풀썩 허물어지고 말았다. 위에 얹어놓은 방초들도 흙더미와 함께 허무하게 쓰러졌다.
이 광경을 우연히 창밖으로 본 같은 재단의 고등학교 선배들이 놀라서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던가. 그 화단이 무너질 때 나는 친구들의 표정을 보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득의와 이내 순간적으로 얼굴에 스쳐가던 현실적 불안이 교차하던. 그러고는 쏜살같이 흩어져 각자 교실로 숨어들었다. 화장실 음화의 화풍과 필적만으로도 전교생 2500명 중에서 범인을 색출해내던 학생주임 선생님도 이상하게 화단 붕괴 사건의 범인은 잡아내지 못했다. 어쨌든 그 사건은 그렇게 묻혔다.
그 범인 중 한 명이 춘삼이었다. 아니, 그 시절은 이미 동혁이나 민규라는 이름이 나오던 때인데 어쩌자고 그의 부모님은 춘삼이라고 지었을까. 알고 보니, 작명은 할아버지의 작품이었다. 봄 춘(春) 자는 동양에서 가장 고귀한 글자 중의 하나다. 중국집도 1호는 공화춘이고, 서울시장도 구자춘이었다. 그렇지만 춘삼이는 문제가 있었다. ‘거지 왕 김춘삼’이 당시 이미 유명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춘삼이는 거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춘삼이는 고아였다. 할아버지가 계신데 노동력이 없어서 학비도 혼자 벌어서 다닌다고 했다. ‘코끼리표 조지루시’ 3단 흑색 도시락을 메고 다니는 아이들이 많던 부자 학교였는데 녀석은 늘 도시락을 안 싸왔다. 매점에 가서 50원짜리 우동이나 라면을 먹었다. 화단 사건 이후로 나는 녀석과 친해졌다. 우리는 공범이었으니까.
중학생인 우리가 매점에서 빵을 사먹고 있을 때, 고등학생 두어 명이 빵과 콜라를 매점 아래 숲으로 던지는 걸 보게 됐다. 사람의 출입이 없는 그곳에 다람쥐 같은 게 돌아다니니까 소년들이 그걸 맞히겠다고 지대가 높은 매점 자리에서 아래로 병을 던지곤 했다. 춘삼이와 고등학생이 시비가 붙었다. 왜 콜라병을 던지느냐, 중학생이 형에게 덤비네, 이러다가 싸움이 붙었다. 1대 2였다. 딱 두 방이었다. 춘삼이의 스트레이트와 훅이 한 방씩 그 형들의 턱에 꽂혔다. 그걸로 끝이었다. 춘삼이는 당시 라이트급 최고의 주먹 김현치인가 유제두인가가 대표 격이던 권투도장의 관원이었다. 나는 춘삼이가 좋아졌다.
빵에도 계급이 있었다
그는 신문 보급소에서 먹고 잤다. 새벽에는 〈한국일보〉를 돌리고, 대충 오후 수업을 마치고는 다른 보급소로 가서 석간을 배달했다. 보급소에는 총무라고 부르는 관리직급의 배달원이 있는데, 그들이 보통 200부, 300부를 돌렸다. 아파트가 거의 없던 1970년대였으니 신문 200부는 엄청나게 많은 양이다. 소년들은 보통 100부 정도를 책임졌다. 하지만 녀석은 총무급의 일꾼이었다. 보급소에 놀러가면 2층 다다미방에서 석유곤로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러고는 같이 신문을 돌렸다. 잉크 냄새 나는 신문을 세 번 접는다. 그러면 대충 정사각형의 큰 딱지 모양이 된다. 그 상태로 바람의 저항을 받지 않도록 최대한 빠르게 철문 위로 던져넣는 게 그의 기술이었다.
그때 보급소에는 클레임이 잦았다. 던져넣은 신문이 물기 있는 마당 구석에 떨어져서 젖었다. 아니면 개가 물어뜯기도 했고, 문틈에 끼워넣어둔 걸 경쟁사 총무가 슬쩍 꺼내가기도 했다. 자전거도, 상품권도 안 주고 신문을 확장하던 순수한 시대였다.
녀석이 신문 돌릴 때 가장 좋아하는 동네는 익선동과 와룡동이었다. 그 동네에는 이른바 요정이 많았다. 그 유명한 요릿집 ‘오진암’도 거기 있었다. 유흥 전선에서 일하며 동생들 학비를 대던, 그런 곡절 많은 서사가 존재하던 시대였다. 그러니 그곳에서 일하던 누나들이 우리에게 감정이입했을 것 같다. 툇마루에 앉아 누나들이 쥐여주던, 아마도 어느 요정 방에서 물려나왔을 약과와 산자에 생율을 먹던 기억. 오도독한 생율의 식감까지 오감의 기억에 남아 있다. 나중에 약과와 산자는 사라졌지만, 생밤이라 해도 될 걸 굳이 ‘생율’이라 부르던 그 음식은 시대가 바뀌면서 요정을 밀어낸 룸살롱의 안주로 지금도 살아남았다고 한다.
각자 다른 학교로 진학하면서 우리들은 헤어지고 연락이 끊겼다. 이메일도 휴대전화도 없는 때였으니까. 그가 신문 배달을 때려치우고 중앙시장에서 석유 배달 하는 걸 다른 친구가 한번 우연히 만났다고 한다. 녀석이 내 얘기를 했다던가.
요즘도 종로3가에서 파고다극장 터를 지나 걷다가 와룡동, 익선동까지 가면 늘 녀석이 생각난다.권투로 성공해서 챔피언을 먹으면 헤어진 부모님이 자신을 알아보고 감격의 상봉을 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춘삼이. ‘노을’이라는 이름의 커다란 빵을 제일 좋아하던 춘삼이. 노을은 아주 커다란 빵이었다. 부피 대비 절반 정도 가격이어서 노동자들과 배고픈 학생들이 많이 먹었다. 땅콩크림 샌드위치나 파운드케이크 같은 빵을 사먹기엔 주머니가 버거운 이들의 몫이었다. 가겟방에서 파는 빵에도 계급이 있었다. 왜 크기만 하고 맛없는 빵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슬퍼서”라고 했던 춘삼이. 나는 그의 슬픔을 다 듣지 못했다. 노을빵은 이제 없으니 대신 소주를 한잔 사고 싶으니 살아 있으면 연락 좀 해다오 춘삼아.
박찬일 (셰프)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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