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메이저리그 야수가 한 경기에서 안타 5개를 뽑아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이정후(28)가 1일(한국시간) 콜로라도 로키스 원정에서 6타수 5안타 2타점 1득점으로 폭발하며 2002년 최희섭이 빅리그 무대를 밟은 이래 24년간 비어 있던 기록의 빈칸을 채웠다. 추신수, 강정호, 이대호 같은 이름들이 그 사이를 거쳐 갔지만 누구도 닿지 못했던 지점이다. 더 눈길을 끄는 건 이 경기가 부상자 명단에서 돌아온 지 사흘 만에 나왔다는 사실이다.

이정후의 방망이가 식었던 건 불과 얼마 전이다. 4월 중순까지 타격감을 끌어올리던 그는 5월 들어 타구의 질이 떨어지며 부진의 늪에 빠졌다. 지난해부터 지적받아 온 약점이 다시 도졌다는 평가가 나왔고, 타율은 3할 아래로 내려앉았다. 4월 29일 필라델피아전 이후 한 달 넘게 3할 복귀의 문턱을 넘지 못한 상태였다. 흐름을 바꾼 변수는 뜻밖에도 부상이었다.
허리 근육통으로 10일짜리 부상자 명단(IL)에 올랐던 이정후는 지난달 30일 콜로라도전에서 복귀전을 치렀고, 그 첫 경기부터 5타수 4안타를 몰아쳤다. 이튿날에도 3루타를 포함한 멀티히트를 보탰다. 강제로 주어진 휴식이 몸 상태를 정비할 시간이 됐다는 해석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콜로라도와의 3연전은 그렇게 반등의 무대가 됐다.

사흘간 기록한 성적은 15타수 11안타, 타율로 환산하면 0.733에 이른다. 복귀 후 3경기 연속 멀티히트이자 시즌 19번째 멀티히트 경기였다. 시즌 타율도 0.304(194타수 59안타)까지 올라 내셔널리그 타격 순위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한 경기의 폭발이 아니라 사흘에 걸쳐 쌓인 흐름이 만들어 낸 숫자라는 점이 핵심이다. '바람의 손자'라는 별명처럼 아버지 이종범의 그림자를 안고 빅리그에 건너온 그에게, 이 사흘은 정체성을 다시 증명한 시간이기도 했다. 한 경기 5안타는 KBO 시절을 통틀어도 데뷔 2년 차였던 2018년 8월 11일 LG전 이후 두 번째다. 공교롭게도 그날 역시 6타석에 들어서 단타 4개와 2루타 하나를 묶었으니, 8년의 간격을 두고 비슷한 장면이 재현된 셈이다.

이날 이정후는 첫 타석부터 방망이에 불을 붙였다. 1회 초 2사 1, 3루에서 콜로라도 우완 선발 태너 고든의 몸쪽 낮은 직구를 받아쳐 중전 적시타를 만들었고, 3루 주자 라파엘 데버스를 불러들이며 팀에 선취점을 안겼다. 3회 좌익수 뜬공으로 한 차례 물러난 것을 빼면 이후 모든 타석이 안타로 채워졌다. 백미는 5회였다. 선두 타자로 나선 이정후는 우완 잭 애그노스의 빠른 공을 통타해 중견수 키를 넘기는 2루타를 터뜨렸다. 타구 속도 102.5마일, 비거리 429피트. 스탯캐스트 추정으로 빅리그 30개 구장 가운데 28곳에서 홈런이 됐을 타구였고, 담장이 멀고 높은 쿠어스필드와 애리조나 체이스필드에서만 펜스에 맞고 떨어졌다.
이정후는 맷 채프먼의 2루타 때 홈을 밟으며 득점까지 챙겼다. 5회 빅이닝이 길어지며 같은 이닝 두 번째 타석에 들어선 그는 중전 안타를 추가해 한 이닝 멀티 출루를 만들었다. 7회 1사 2루에서는 다시 중전 적시타로 루이스 아라에스를 불러들여 두 번째 타점을 올렸다. 그리고 8회, 큰 점수 차로 벌어진 경기에서 마운드에 오른 콜로라도 포수 브렛 설리번의 80km대 느린 공을 받아쳐 다섯 번째 안타를 완성했다. 직후 대주자와 교체돼 일찍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팀 전체 화력도 함께 터졌다.

샌프란시스코는 5회에만 7점을 몰아쳤는데, 2사 2, 3루에서 콜로라도가 아라에스를 고의 볼넷으로 거르자 윌리 아다메스가 만루 홈런으로 응징했다. 6회부터 9회까지 매 이닝 득점을 보태 최종 19득점, 장단 25안타를 기록했다. 선발 전원 안타와 전원 타점이 나왔고 데버스와 브라이스 엘드리지가 4안타씩 보탰다. 참고로 샌프란시스코 선수가 한 경기 5안타를 친 건 2020년 9월 알렉스 디커슨 이후 처음인데, 디커슨은 이종범이 뛰었던 일본 주니치에서 선수 생활을 한 인연이 있어 묘한 접점을 남겼다. 최종 스코어는 19-6, 샌프란시스코는 5연패의 사슬을 끊고 시즌 23승 36패가 됐다.
24년 동안 추신수도, 강정호도, 이대호도 넘지 못한 한 경기 5안타를 이정후가 채웠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상징적이다. 다만 숫자 너머를 보면 더 의미 있는 대목은 이 폭발이 부진의 한가운데서 나왔다는 점이다. 5월 내내 타구 질 문제로 흔들리던 선수가, 가장 약점으로 지목되던 부분을 부상 복귀와 맞물려 끌어올린 흐름이기 때문이다. 현지에서도 시즌 초 본인이 공언했던 '한국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경계할 지점도 분명하다. 사흘간의 무대는 모두 타자 친화 구장인 쿠어스필드였고, 고지대 특유의 환경이 타격 지표를 부풀렸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긴 어렵다.

상대 투수진의 무게감 역시 최정상급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 기록이 '반등의 증거'인지 '구장 효과'인지를 가를 진짜 시험대는 지금부터다. 샌프란시스코는 곧장 밀워키 브루어스와 시카고 컵스로 이어지는 원정 7연전에 돌입한다. 평지 구장에서, 더 까다로운 투수들을 상대로도 같은 타격이 재현된다면 이번 5안타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시즌 후반을 바꿀 변곡점으로 남을 수 있다. 팬들이 환호하면서도 다음 경기를 더 주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부진을 끊어낸 한 경기였는지, 시즌의 방향을 되돌린 사흘이었는지는 곧 드러난다. 타자 친화 구장을 벗어난 원정 7연전에서 이정후의 방망이는 이 흐름을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을까. 당신은 이번 5안타를 반등의 신호로 읽는가, 아니면 쿠어스필드가 만든 착시로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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