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가는' 스포츠, 대격변이 찾아온다.
KBO리그는 2024시즌 개막을 앞두고 경기 시간 단축과 경기 재미를 더하기 위해 몇가지 변화를 시도했다.
자동투구판정시스템(ABS)를 도입해 볼판정에 대한 시비를 없애기 위한 노력을 보여줬고 내야 베이스를 38.1cm에서 45.7cm로 늘렸다. 여기에 더해 극단적인 내야 시프트를 폐지시키며 정적인 야구보단 주자가 조금 더 자주 출루하고 자주 뛰며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야구가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지만 10-20대 사이에선 단 20%만 관심을 갖는다는 통계에서 알 수 있듯이 더 재밌는 종목으로 바뀌고 있음을 어필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 최고 인기 스포츠인 KBO리그가 이런 변화를 꾀하는 반면 다른 스포츠들은 현상유지에 급급하거나 무관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업이나 지자체 지원에 의존하는 태생적 이유나 여러가지 이유들이 즐비하게 따라붙겠지만 현재 스포츠는 세계적으로 ‘팬들의 고령화’라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미국과 유럽 등 스포츠 강국들은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변화의 조짐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특히 그동안 금기시 되어왔던 부분들이 하나씩 무너지고 있고, 예전이라면 이단이라 취급받던 혼종들도 스포츠라는 범위에 포함시키려 하고 있다.
현재 불어오고 있는 변화의 바람들을 알아보자.
비스포츠인이 리그 최고의 선수를 만들다.
한국에서도 지난 몇 년간 야구 아카데미가 활성화되며 선수들도 비시즌동안 아카데미에서 훈련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다만 한국에서 야구 아카데미는 선수 출신들이 은퇴 후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고 야구 아카데미가 아니면 선수들이 운동할 수 있는 곳이 한정적이다.
반면 미국이나 일본은 최근 비야구인들이 만드는 야구 아카데미는 물론이고 개인 트레이너로 붙어 선수를 지도하는 모습이 많아지고 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NPB 퍼시픽리그에서 사와무라상 3회, MVP 3회를 받고 LA다저스로 이적한 야마모토 요시노부다.
지금은 NPB 최고의 투수이자 LA다저스 부동의 3선발로 각광받는 선수지만,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프로에 지명될때까지만 해도 고시엔은 가보지도 못한 그저그런 투수였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야다 오사무라는 비야구인 접골원 원장에게 트레이닝 전반을 맡긴 이후 전혀 다른 투수가 됐다. 구속이 150km 후반까지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고질적인 팔꿈치 부상도 사라졌다.
아마 ‘접골원 원장'이란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은 의아함을 느낄 것이다.
야다는 평범한 접골원 원장이 아니다. ‘키네틱 포럼' 이라는 생체역학적인 운동법을 연구하고 전파시키는 수상한 단체의 수장이다. 개개인의 신체 조건에 따라 알맞은 운동법을 가르치고 코어 근육을 강화시켜 자신의 몸을 더 잘쓰게 해주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 이 단체의 목표다. 처음엔 사이비 취급도 받았지만 점점 입소문을 타더니 프로 스포츠 선수들도 가르치기 시작했고 야마모토 요시노부라는 거물을 탄생시킨 것이다. 덕분에 야다는 이번 겨울 LA 다저스 캠프에 초청받아 MLB MVP출신 무키 베츠도 그의 운동법을 배우기도 했다.
물론 베츠도 야마모토처럼 창을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몰랐던 운동법의 효과를 증명받았다 정도로 받아드리면 적당하다. 야다 오사무는 매우 특이한 사례지만, 이런 특이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드라이브라인(Driveline)이나 텍사스 베이스볼 아카데미(Texas Baseball Academy)와 같이 야구 선수들에게 각광받는 연구소와 아카데미들이 의미있는 발전을 이어가고 있다. 마치 스페이스X라는 민간기업이 우주 개발의 기술적 발전을 이끄는 것처럼 구단이나 야구인 출신들이 만들어내지 못한 접근들로 야구의 발전을 선도적으로 이끄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남녀평등? 시장의 요구!’ 여성에게 문호를 열다
그동안 여성들이 남성 스포츠의 벽을 깨기 위한 노력은 꾸준히 존재했다. 하지만 아니카 소랜스캄과 미셀 위, 브라타니 린스컴 같은 여자 선수들이 PGA대회에 출전하거나 소프트볼의 전설 제니 핀치가 알버트 푸홀스, 배리 본즈와 1대1 대결을 펼치는 등 이벤트 성격이 짙거나 남성과들과 분리된 그들만의 리그를 운영하는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최근엔 진지하면서도 구조적으로 남성들만의 리그에 여성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려는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MLB에서 일어났다. 1990년 MLB 보스턴 레드삭스 부단장으로 임명된 일레인 웨딩턴 스튜어드를 필두로 2001년엔 양키스가 진 애프터맨을 부단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2020년 아시아계 미국인 김응이 마이애미 말린스의 단장으로 취임하며 최초의 MLB 여자 수장이 탄생했다.
프론트가 야구장 현장에서 한발 물러선 자리라고 본다면 감독과 코치 심지어 선수로 뛸 수 있는 그라운드 안에서도 벽을 깨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레이첼 발코벡은 2022년 양키스 마이너리그팀 감독으로 임명되며 최초의 여자 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소프트볼 선수 출신인데다가 여성이란 점 때문에 많은 무시를 당했지만, 피지컬 트레이너부터 시작해 순수하게 실력으로 감독 자리까지 오르는 뚝심을 보여줬다.
발코벡이 피지컬 트레이너로 활동한것 처럼 여성 코치는 이미 여러 팀에서 활동하고 있다. 앨리사 내킨은 샌프란시스코 외야 및 주루 코치로 활약하고 있고 사라 에드워즈는 필라델피아 싱글A팀 타격 코치로 뛰고 있다.
선수로써 도전도 의미있게 이어지고 있다. 2022년 켈리 위트모어는 스테이튼 아일랜드 페리 호크스란 독립리그 팀과 계약해 데뷔전을 가졌다. 미국은 아니지만 호주리그에선 제네비브 비컴이 공식 계약을 맺고 경기에 출전했다.
물론 여성 선수들이 남성 선수들과 피지컬에서 동등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그럼에도 별도 여성 리그가 아닌 남성들과 함께 뛰는, 무모해보이는 도전을 이어가고 리그에서는 이를 받아드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순수한 스포츠 정신으로 볼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스포츠 시장 개척의 전초전으로 보는 분석도 많다.
마치 MLB가 히데오 노모와 박찬호를 기점으로 아시아에 문호를 개방하고, NBA가 야오밍과 노비츠키 같은 스타 선수들을 배출하며 아시아-유럽 시장을 확대시키고 성장시킨 것처럼 여성들을 상대로한 새로운 시장 개척과 사회적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할 수 있는 준비를 가져가고 있는 것.
여성들이 더이상 자신들의 성장과 성공에 대한 욕망을 숨기지 않는 시대가 되면서 스포츠에서도 이들의 참여를 하나의 기회이자 위기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끔찍한 혼종이?’ vs ‘Z세대의 스포츠!’
바르셀로나의 레전드인 제라드 피케는 2023년 트위치 스트리머들과 함께 ‘킹스 리그'라는 새로운 축구 리그를 창설했다. 피케는 “축구는 틱톡, 트위터와 경쟁해야 하는데, 지금 축구는 지루하다.”라며 클래식 스포츠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렇다면 킹스 리그는 어떤 형태의 축구를 하는 것일까?
-필드 중앙에서 승부차기
- 옐로카드는 2분 퇴장, 레드카드는 퇴장
- 무제한 교체
- 오프사이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까지만 해도 파격적인데, 가장 참신하면서 기존 축구팬들이 들으면 까무칠만한 규정은 라운드마다 팬 투표를 거쳐 새로운 규칙을 추가하거나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페널티킥을 골키퍼가 차게하거나 경기 전 던진 주사위 합만큼 선수를 교체할 수 있게 하게하는 규칙이 팬 투표로 추가되기도 했다.
이런 신종 스포츠는 깜짝 인기를 끌다 사라질 것 같지만, 의외로 높은 인기를 구가하며 스페인 내에서 입지를 다지고 있다. 실제 축구 선수들도 관심을 가지며 킹스 리그 참여를 문의할 정도. 은퇴 선수 중 호나우지뉴가 킹스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다.
2016년 대학독립리그에서 시작된 ‘바나나볼'도 매 경기 매진을 이어가며 인기를 키워가고 있다. 이닝제가 아닌 2시간이 되면 끝나는 경기로 파울볼을 관중이 노바운드로 잡으면 아웃되고 번트를 대는 타자는 퇴장 당하는 등 관중이 즐거워할만한 규칙들로 새로운 야구를 탄생시켰다.
누군가는 클래식 스포츠의 가치를 퇴색시키는 끔찍한 혼종이라 질색하겠지만, 재미를 추가하는 Z세대들에게 이런 새로운 스포츠들은 클래식 스포츠를 능가하는 인기를 얻어가고 있다. 지금같은 추세라면 오히려 이런 뉴스포츠가 대세가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스포츠 본질은 무엇일까?
10~20년 뒤에 야구와 축구는 우리가 아닌 그 모습이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변한 야구와 축구는 본질도 사라진 것일까?
2020년 코로나가 한창일때 미국 ESPN은 KBO리그 중계를 제공한 적이 있다. 이때 미국팬들은 한국 야구선수들의 배트플립(빠던)에 문화 충격을 받았다. 상대를 존중해야 하는 이들의 야구 문화에 투수를 무시하는 느낌을 주는 배트플립은 야구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행동이었던 것.
하지만 결국 MLB도 배트플립을 용인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물론 그와중에 투수들에게 빈볼을 맞는 희생자들도 나왔다.) 팬들이 원하고 재미를 느끼는 요소였기에 그것이 야구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선수 출신들로 이루어진, 권위주의적인, 변하지 않고 고루한 스포츠는 팬들에게 버림받을 수 있다. 10~20대는 게임과 유튜브, 틱톡 등 여가시간을 즐길 수 있는 수많은 대체제를 갖고 있는 반면 국내 프로스포츠는 대기업 위주에 선수 출신들이 이끄는 매우 보수적인 면모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빠르게 바뀌는 시대에 영원할 것 같았던 스포츠도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야구나 축구도 노인들만 즐기는 ‘그들만의 리그'로 올드팬들은 의미없는 추억만 곱씹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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