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따라 건강식품 1200만원어치 샀는데.." 설명회장에서 본 장부에 결단했다

나이가 들수록 외로움은 생각보다 큰 틈이 됩니다. 누군가 다정하게 손을 잡아 주고 내 이야기를 들어 주면, 그 사람이 권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믿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그 다정함이 처음부터 계산된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 마음은 두 번 무너집니다.

경남 창원에 사는 한순자 씨는 올해 예순넷입니다. 남편과 함께 창원 상남동에서 25년 동안 세탁소를 했습니다. 다림질 연기 속에서 두 딸을 키워 시집보냈고, 3년 전 남편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을 보내고 순자 씨는 세탁소를 정리했습니다. 남편 사망 보험금과 가게 보증금을 합쳐 노후 자금을 마련해 두었지만, 텅 빈 집에서 혼자 지내는 하루는 끝없이 길었습니다. 큰딸은 서울에, 작은딸은 부산에 살아 한 달에 한 번 얼굴 보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지난해 봄, 여고 동창 말자가 오랜만에 연락을 해 왔습니다. "순자야, 요 앞에 건강 강의하는 데가 있는데 같이 가 볼래? 가기만 해도 휴지랑 계란을 준다더라." 오랜만에 듣는 친구 목소리가 반가워 순자 씨는 선뜻 따라나섰습니다.

강의장은 상가 2층의 작은 사무실이었습니다. 젊은 강사가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어르신들의 손을 잡으며 "어머니, 오늘 너무 고우세요" 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순자 씨는 남편이 떠난 뒤 처음으로 크게 웃어 보았습니다.

강의는 매일 아침 열렸습니다. 처음 일주일은 건강 이야기와 노래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둘째 주부터 효소와 홍삼 제품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거 하나면 혈압약도 끊을 수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다 효과 보셨어요." 앞줄에 앉은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말자는 순자 씨 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나도 이거 먹고 무릎이 다 나았다. 회원 가입하면 반값에 살 수 있고, 다른 사람 소개하면 수당도 나와." 순자 씨는 친구 말을 믿고 첫 달에 200만 원어치 제품을 샀습니다.

그 뒤로 강사와 말자는 수시로 순자 씨를 찾아왔습니다. "언니, 이번 달에 조금만 더 채우면 등급이 올라가요. 등급 올라가면 평생 할인이에요." 순자 씨는 카드 할부까지 써 가며 효소, 홍삼, 안마 매트를 하나둘 사들였습니다. 거실 한쪽에는 뜯지도 않은 상자가 쌓여 갔습니다.

8개월 동안 산 제품값은 1,200만 원이 넘었습니다. 작은딸이 집에 왔다가 상자 더미를 보고 놀라 물었습니다. "엄마, 이게 다 뭐예요? 혹시 다단계 아니에요?" 순자 씨는 오히려 딸에게 화를 냈습니다. "네가 몰라서 그래. 말자는 사십 년 친구다."

그 무렵 순자 씨는 먹던 혈압약까지 슬그머니 끊고 효소만 먹었습니다. 아침마다 어지럼증이 와도 강사는 "몸이 좋아지려고 나타나는 반응"이라며 조금만 참으라고 했습니다. 순자 씨는 그 말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올봄, 회사는 창원의 큰 컨벤션홀에서 대규모 설명회를 열었습니다. 순자 씨는 우수 회원으로 뽑혀 맨 앞줄에 앉게 되었습니다. 무대 위에서는 화려한 조명 아래 억대 수당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차례로 나와 박수를 받았습니다.

설명회 중간 쉬는 시간, 순자 씨는 말자를 찾으러 무대 옆 대기실로 갔습니다. 문이 조금 열린 대기실 탁자 위에는 지역 팀장의 태블릿이 켜진 채 놓여 있었습니다. 화면에는 회원 이름과 함께 이번 달 실적이 표로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 표 맨 위에 순자 씨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옆 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남편 사망 보험금 수령, 자녀 원거리 거주, 추가 구매 가능. 담당 김말자.' 그 아래에는 순자 씨가 산 제품마다 말자에게 돌아간 수당이 꼼꼼히 계산되어 있었습니다.

순자 씨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습니다. 다정하게 손을 잡아 주던 강사도, 사십 년 친구 말자도 처음부터 순자 씨의 통장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기실 밖에서는 "어머니들, 다시 자리에 앉아 주세요"라는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순자 씨는 휴대전화를 꺼내 태블릿 화면을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그리고 맨 앞줄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설명회장을 걸어 나왔습니다. 뒤에서 말자가 "순자야, 어디 가!" 하고 불렀지만 순자 씨는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순자 씨는 작은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네 말이 맞았다. 엄마가 바보였다." 다음 날 아침 작은딸이 부산에서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두 사람은 거실에 쌓인 상자를 하나하나 세며 영수증과 카드 내역을 정리했습니다.

작은딸과 함께 소비자 상담 센터에 전화를 건 순자 씨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뜯지 않은 제품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반품과 환불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순자 씨는 상담원의 안내대로 회사에 반품 요청서를 보내고, 거절하면 신고하겠다고 분명히 적었습니다.

회사는 처음에는 "이미 기간이 지났다"며 버텼습니다. 그러나 순자 씨가 찍어 둔 태블릿 사진과 그동안의 구매 내역을 들고 다시 연락하자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한 달 뒤, 뜯지 않은 제품값 900만 원이 순자 씨 통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순자 씨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강의장에 함께 다니던 동네 어르신들을 한 분 한 분 찾아가 태블릿 사진을 보여 주었습니다. "형님, 우리가 다 장부에 적혀 있습니다. 더는 사지 마이소." 몇 주 뒤, 매일 아침 북적이던 상가 2층 강의장은 문을 닫았습니다.

몇 달 뒤 말자가 순자 씨 집 앞에 찾아왔습니다. 말자는 자기도 처음엔 피해자였고, 빚을 갚으려고 친구들을 데려갔다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순자 씨는 한참을 말없이 서 있다가 말했습니다. "너도 얼른 빠져나와라. 그게 나한테 사과하는 길이다." 말자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 일이 있은 뒤 순자 씨는 동네 복지관에서 열리는 노인 소비자 교육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교육이 끝나면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며 "공짜 휴지 받으러 가는 순간부터 장부에 이름이 올라간다"고 말했습니다. 어르신들은 그 말을 수첩에 받아 적었습니다.

환불받은 돈은 다시 노후 자금 통장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중 일부를 떼어 두 딸과 함께 남해로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남편이 떠난 뒤 세 모녀가 함께 떠난 첫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날 저녁, 작은딸이 순자 씨 집에서 시래깃국을 끓였습니다. 시래깃국 한 그릇에 멸치볶음과 김치가 전부인 소박한 밥상이었습니다. 작은딸이 말했습니다. "엄마, 외로우면 나한테 전화해. 강의장 말고." 순자 씨는 웃으며 딸의 그릇에 밥을 한 숟가락 더 덜어 주었습니다.

안데르센의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어른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옷이 보이는 척 박수를 칩니다. 그때 한 아이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외치자 모두가 비로소 진실을 봅니다. 모두가 박수를 칠 때 멈춰 서서 바로 보는 용기가 나를 지켜 줍니다.

나이가 들면 다정한 말 한마디에 마음이 쉽게 열립니다. 그러나 공짜 선물과 지나친 칭찬 뒤에 큰돈을 쓰라는 말이 따라온다면, 그 자리에서 결정하지 말고 가족에게 먼저 물어보세요. 하루만 미뤄도 지킬 수 있는 노후가 있습니다.

올가을 순자 씨는 작은딸과 함께 주남저수지 둑길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저수지를 따라 은빛 갈대가 바람에 출렁였고, 물 위로 먼 길을 날아온 철새들이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해가 질 때까지 둑길에 서서 저수지를 바라보았습니다.

출처 : '벌거벗은 임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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