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무언가 어렵게 느껴진다. 하지만 일상 속으로 스며든 예술은 식구끼리 모여 앉아 밥을 먹듯 자연스러워야 하지 않을까. 아키즈키 레지던시는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며 함께 공유하는 시간’을 통해 우리가 짊어진 삶이라는 무게를 예술로 가볍게 치환하는(혹은 받아들이는) 깨달음을 제시한다.” - 레지던시 인터뷰 중에서
일반적으로 작가 레지던시(Residency)는 정해진 기간에 작업할 공간을 제공하고 결과물인 작업을 전시하고 공유하는데 초점을 둔다. 하지만 아키즈키 레지던시는 ‘체류하며 자유롭게 작업한다’는 의미에서 레지던스(Residence)에 가깝다.
전자가 예술적 결과물에 목적을 둔다면, 후자는 일상을 살아가는 아티스트의 과정적 행위들(끼니챙기기-빨래하기-문단속-장보기 등)에 방점을 찍는다. 작가들은 작업의 텍스트가 아닌 컨텍스트까지 공유함으로써, 관람객들에게 ‘레지던시 생활을 공유’할 것을 제안한다.
여기 독특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있다. 정해진 공간도 규칙도 없다. 이른바 ‘무목적적 레지던시’를 제안한 이는 부산 정현전기물류 오상훈 대표다. “작가들이 편히 쉬고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진짜 예술의 원천이 아닐까 합니다.” 오대표의 신선한 발상은 각기 다른 지역에 사는 부산(선우 20대)-대구(우미란 30대)-서울(만욱 40대)의 작가들로 구성된 팀 아키즈키를 탄생시켰다.
이름도 생소한 일본의 아키즈키라는 시골마을에서 2주간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들은 예술을 위한 특정 방식보다 각자의 삶을 연장한 평범한 교류로부터 자신들을 재발견하기 시작했다.
작가후원을 위한 오 대표의 철학은 ‘살맛나는 세상을 위한 예술나눔’을 골자로 한다. 레지던시 보고전에서 선보일 공동작업 <식탁 위의 시간(Time on the Table)_관객참여 퍼포먼스>(2024)는 3인의 아티스트가 ‘함께 먹는 행위’를 통해 관계를 형성하는 교류의 순간을 탐구하는 관객참여형 프로그램이다.
3인의 작가들은 일본 아키즈키 마을에서의 레지던시 경험을 바탕으로 전시장에서 관객에게 직접 준비한 음식을 나누어주며 관객과 무언의 대화를 시도한다. 음식은 현지에서 쉽게 공수되는 ‘달걀된장국’이다. 음식을 공유한다는 것은 낯선 환경에서 예술을 일상으로 전유시킨 작가들의 공동체적 환경을 함께 공유한다는 것이다.
아키즈키의 축적된 시간과 기억의 흔적을 좇아 관람객들은 20분 동안 흘러나오는 저녁식사 영상 <아키즈키 협업작 II_영상: Residence for Residency>(2024)를 ‘내가 식사하는 순간’과 연결해 이어간다. 작가와 관객이 일체화 되는 퍼포먼스는 어찌 보면 현재진행형인 작가들의 일상과 만나는 것이다.
선우, 발길 닿는 대로
과하지 않은 그 자체로의 머묾, 어찌 보면 선우의 작업은 그 자체가 여행이자 삶의 궤적일지 모르겠다. 그림 속에서 우리는 태양과 파도에 몸을 던져보기도 하고, 파랑새를 쫓아 미지의 어떤 곳으로 떠나보기도 한다. 말 그대로 선우의 그림은 힘을 빼고 봐야 이해되는 진짜 나와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태양은 내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고, 등장인물은 정해진 누군가가 아닌 누구나 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림의 여백이 많은 이유도 누구에게나 여백이 되는 삶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고백을 들어보자.
“드로잉은 세상에서 뭔가를 발견하려고 하는 나의 시선이자 삶의 기록입니다. 사생을 통해 대상을 그 자체로 바라보며 관성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새로운 부분을 발견하는 것 같아요. 결국 저는 대상을 대상 그 자체보다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서 저만의 시선으로 은유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작가의 그림 안에는 기타를 맨 소년이 등장한다. 바닷가를 걸으며 들리는 파도 소리를 통기타 소리처럼 들었다는 작가는 그때의 감상을 소년 안에 투영한다. 작가에게 그림이 태양이라면, 소년에게 기타는 태양이 되는 것이다. 선우의 그림은 모두에게 태양이고자 한다. 그래서 작가는 어느새 기타를 배워 여행을 떠나고, 계산된 작업이 아닌 직관적 선을 세상과 연결하며 ‘그 자체가 여행이자 삶의 궤적’이라는 철학과 만나게 한다. 선우에게 드로잉은 삶 그 자체이자 기록이다. 가벼운 재미가 곧 예술이 되는 ‘진정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아키즈키
아키즈키
우미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자아와 실존을 나무에 빗대 질문해온 우미란의 작업은 삶에 대한 영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작가는 작업 과정에서 추상 표현주의 기법을 주로 사용해 감각적 경험과 내면적 성찰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대칭관계를 상징으로 삼아 인간의 본질적 진실을 작품에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술에 지나친 기대와 질문을 했을 경우, 본질로부터 멀어지거나 문제 자체에 빠져 예술가로서 큰 기대치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아키즈키 레지던시 이후 작가는 ‘삶의 균형’이 어떤 기대가 아닌 ‘자연스럽게 삶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터득한 듯하다. 지독한 관찰-파고들기의 과정을 통해 ‘生-실존’의 과정을 표현한 작가의 작업은 영상-사진-설치 등 시선을 달리한 다각적 접근법을 통해 오롯이 ‘삶과 예술이 하나의 방식임’을 깨닫게 한다. 작가는 말한다. “작업 방식은 다르지만 살아내는 생존은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다.”고 ‘삶일 뿐일 예술’에 귀 기울여 보라고…
Balance
Balance
만욱, 나라는 틈의 발견
박경화와 만욱 사이, 여기 틈과 구조를 오가며 진정한 자아를 발견한 작품들이 있다. 툭 던져진 선들 사이를 유영하다 보면, 어느새 그림은 삶이 되고 오늘이 된다. 규칙이 범람하는 세계 속에서 만욱의 시선은 최대한 힘을 빼고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발견은 사회가 정해놓은 규칙이나 기대가 아니라, ‘진짜 나 자신 되기’라는 명제와 닿아 있다. 작가의 기존 작업들은 인간구조에서 벗어난 변형된 자연물과 비인간종(種), 혹은 기계와 미디어 등 사물과의 비규정적 구조를 다뤘다. 콧수염이 달린,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 수 없는 탈(脫)젠더형 인간들은 젠더 없는 인간인 ‘걔’로 지칭되며, 인간-동물-식물-기계를 뒤섞은 형태와 함께 존재한다.
자연형인 ‘개’와 사물형인 ‘계’를 ‘걔’라는 모호한 붓질로 통일시킨 시리즈들은 이른바 룰이 없는 ‘No rule’ 속에서 질서와 규칙이 사라진 평평한 세상과 만난다. 하지만 작가는 구조적이면서도 거시적인 내러티브 속에서 ‘참된 나란 누구인가’라는 내면형 이야기와는 조금 멀어지게 됐다고 자문한다. 기록하는 타자에서 그리는 자아로 들어간 이번 레지던시의 경험들은 아키즈키(어린 시절 접한 순수세계)라는 평범한 일상 안에서 ‘학습화된 박경화’가 아닌 본질 안의 나를 자연스럽게 발견시키면서 80년대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작가 만욱’을 환원시킨다. 아키즈키 신문(그들의 일상) 위에 그려낸 작가의 자화상은 언어(기호화된 구조) 이전의 ‘순수 자아’와의 만남을 유도한다.
안녕 이름 없는 너희들
날개 돋힌 기계와 더듬이가 생긴 개
△ 전시타이틀 : 아키즈키, A life-only art
△ 프로그램명 : 아키즈키 레지던시 보고전 / 부산 Space Hi
△ 전시기간 : 3.8-23(오프닝 및 작가와의 대화 3월 8일 토, 오후 4시)
△ 참여작가 : 만욱, 우미란, 선우
△ 레지던시 및 전시 후원 : 정현전기물류(대표 오상훈)
청년타임스 정수연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