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사진을 보자. 미국이나 유럽을 여행하다가 중국 음식점에서, 혹은 미드나 헐리우드 영화 속 주인공들이 중국 음식을 먹을 때 종종 보게 되는 테이크아웃 박스다. 그런데 이런 데서만 보게 되는 특이한 폰트가 있다.

여기에 사용된 폰트는 미국에서 흔히 "완톤(Wonton) 폰트," "찹 수이(Chop Suey) 폰트"라고 불리는 다양한 폰트들 중 하나에 속한다. 완톤(馄饨, 훈툰)과 찹 수이(雜碎)는 중국 음식, 특히 미국에서 인기 있는 중국 음식 메뉴. 이런 폰트 군에 중국 음식의 이름이 붙은 이유는 미국 내 중국 음식점에서 이 폰트를 자주 볼 수 있었기 때문이지, 공식적인 폰트 명은 아니다.
오랜 문화적 습관 때문에 미국인들은 이런 폰트를 보면 아시아인, 아시아 문화를 떠올린다. 그럼 이 폰트는 누가 처음 만들었고, 왜 중국 음식점에서 많이 사용했으며, 중국계가 자발적으로 사용했다면 그런 폰트를 인종주의적인 폰트라고 부를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다. 하나씩 알아보자.

완톤 폰트의 기원
이 폰트의 역사를 연구한 디자인 역사학자에 따르면 1883년, 클리블랜드 타이프 파운드리(Cleveland Type Foundry)의 헨리 소프(Henry H. Thorpe)라는 디자이너가 처음 만들어 냈다. 당시 클리블랜드 타이프 파운드리에서 제작한 폰트들을 보면 알겠지만, 상당히 장식적인 성격이 강한 폰트들인데, 특정 문화를 드러내려는 의도가 보인다. 그중에서 '만다린(Mandarin)'이라는 폰트가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완톤 폰트'의 시초다.

그렇다면 완톤 폰트는 어떻게 만들어졌길래 중국 문화를 표시하는 것으로 여겨질까? 금방 눈치채겠지만, 바로 붓글씨체를 흉내 낸 것이다. 그런데 붓글씨로 로마자를 표기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로마자 알파벳에는 원이 많이 들어가 있다. G, O, Q 같은 글자에는 원이 들어가 있고, B, D처럼 반원이 들어간 글자들도 많다. 하지만 한글과 달리 한자에는 원이 없다. 따라서 원이나 반원을 표기하기 위해 아래 그림 1에 나온 것처럼 약간 휘어있는 모양의 획을 여러 개 이어 붙인 것이다.

그리고 다른 직선은 아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영자팔법(永字八法)으로 익숙한 한자의 여덟 획 중에서 치켜올림(1)과 파임(2)만을 가져다가 조립해서 만들었다.

그 결과물이 아래에서 보는 것과 같은 "중국식 알파벳"이다.

그런데 왜 하나같이 음식점 간판일까? 그 이유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중국계 미국인의 이민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영상에서 자세히 설명하지만, 중국인들이 미국에 처음 도착한 것은 1800년대 중반이다. 남북전쟁이 시작되기 조금 전에 도착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잘 알려진 대로 미국의 대륙 횡단 철도는 이때 건너온 중국인들의 노동력이 없었으면 만들어지기 힘들었을 만큼 값싼 중국 노동력은 미국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철도가 완성된 후에는 백인들의 생각이 달라진다. 경제가 안 좋아지고 일자리가 귀해지면서 백인보다 낮은 임금을 받으면서 일하는 중국인들이 위협적인 존재로 느껴진 것이다. 그 결과 만들어진 법이 1882년의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이었다. 간단하게 말해 중국인 노동자들이 더 이상 건너오는 것을 막고, 미국에 온 중국인들이 미국의 시민이 되는 것을 금지하는 법으로, 지금도 미국에서 제정된 가장 인종주의적인 법으로 여겨진다. 이 법이 폐지되는 것은 60년이 지난 후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된 미국이 중국의 도움이 필요했을 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인 배척법에 구멍(loophole)이 생겼다. 1915년에 일부 업종에 한해서는 중국에서 인력을 데려올 수 있게 법이 개정되었는데, 여기에 요식업, 즉 식당이 포함된 것이다. 그러자 미국으로 이민 오고 싶었던 중국인들에게 기회가 열렸고, 그들이 미국에 오기 가장 쉬운 방법이 식당 종업원이 되는 것이었다. 미국 전역에 중국 음식점이 확산된 중요한 계기다. 그렇게 늘어난 중국 식당들과 함께 완톤 폰트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여전히 궁금증은 남는다.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중국 식당에서 그 폰트를 자발적으로 사용했다면 그걸 인종주의적인 폰트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거다.
미국, 혹은 서구에서 사용되는 로마자 알파벳 폰트 중에 역사적으로 특정 문화나 국가, 인종 집단을 대표하게 된 건 완톤 폰트만이 아니다. 아주 다양한 폰트들이 이들 집단을 연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유튜브에서 디자인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라이너스 보먼(Linus Boman)은 이렇게 민족, 혹은 문화를 표시하는 에스닉 폰트(ethnic font)에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설명한다.
첫째, 문화적으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지만, 복잡한 문화적 요인들로 인해, 혹은 자주 사용했다는 이유로 특정 그룹을 표시하게 된 폰트들이다. “아프리카 폰트”라 불리게 된 노일랜드 인라인(Neuland Inline)이나 리토스(Lithos)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예로, 이 그룹의 폰트에는 멕시코를 표시하게 된 것도, 아메리카 원주민을 표시하게 된 것도 있다.

둘째, 특정 문화나 국가를 떠올리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만든 폰트들
도 있다. 현재 사용하는 알파벳과 이들 문화의 문자가 얼마나 비슷한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그리스 문자, 키릴 문자를 흉내 낸 폰트들이 대표적인 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문 폰트들은 실제 그 나라에서 사용되는 문자의 독특한 형태를 모방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이들 문자는 현대 로마자 알파벳과 말하자면 사촌 관계에 있기 때문에 아무런 근거 없이 만들어냈다고 하기는 힘들다.

마지막으로 로마자 알파벳과는 지리적으로, 그리고 타이포그래피의 측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언어들이 있다. 한국, 중국, 일본에서 사용하는 글자 체계(이 세 나라 언어를 흔히 "CJK"라 부른다)는 영어권이 사용하는 26개의 알파벳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런 이유로 이들의 문자를 흉내 낸 폰트들은 이들이 흉내 내려는 글자 체계와 가장 거리가 멀다. 따라서 3국의 언어는 모두 시각적으로 흉내내고 했지만, 그중에서도 완톤(찹 수이) 폰트는 유난히 일찍부터 널리 사용되어 클리셰(cliché)가 되었다.

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완톤 폰트, 찹 수이 폰트는 ‘만다린 폰트’라는 이름으로 1883년 클리블랜드 타이프 파운드리에서 처음 만들어 냈고, 이후에 나온 많은 “중국식” 폰트들이 이 만다린 폰트가 사용한 공식의 변형들이다. 만다린 폰트가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세기 유명한 포스터 디자이너 회사인 베가스태프(Beggarstaffs)가 제작한 ‘A Trip to Chinatown’이라는 포스터. 이 포스터는 벨 에포크 시절의 다양한 포스터들과 함께 ‘The Masters of the Poster’라는 화보집으로 출간되면서 만다린 폰트를 본격적으로 소개한다.하지만 이 폰트의 대중화를 이끌어 낸 건 중국 음식점의 확산이다.

그런데 20세기 초 미국에서 중국 음식점이 확산하는 방식은 꽤 흥미롭다. 당시 미국에 건너온 중국 이민자들은 전통적인 인맥과 지역 공동체를 기반으로 새로운 이민자들이 자기 음식점을 세우도록 도와주곤 했는데, 이 과정은 요즘 대형 음식점 프랜차이즈가 하는 것과 흡사했다. 새로 도착한 사람에게 미국에서 인기 있는 음식을 어떻게 만드는지 가르쳐 주고, 이들이 기존 중국 음식점들의 상권을 침해하지 않고 식당을 열 수 있는 곳을 찾아주는 식이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미국 어느 지역의 테이크아웃 중국 음식점에 가도 볼 수 있는 표준 중국 음식 메뉴다. 이 중에는 찹 수이, 완톤 수프, 제너럴 조 치킨 등이 있다. 미국 전역에 중국 음식점이 퍼질 때 이 표준 메뉴가 따라갔고, 그와 함께 폰트도 확산된 것이다.반복, 효과, 효율성
2018년의 한 디자인 연구에서는 미국 내 이집트식, 중국식, 독일식 음식점에서 파는 음식과 음식점의 이름을 각 문화를 표시하는 데 사용되어 온 에스닉 폰트로 적은 카드를 피험자에게 주고 국가별로 분류하라고 하고 걸리는 시간을 측정했다. 그랬더니 (문화 중립적인) 헬베티카 폰트로 적은 카드를 분류하는 데 걸린 시간과 비슷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흔한 이집트 식당 이름에 완톤 폰트를 사용하고, 흔한 중국 음식점 이름에 "독일 폰트"인 프락투어를 사용하는 식으로 섞었더니 반응 시간이 30% 더 걸렸다.
완톤 폰트 같은 진부한 폰트가 계속 사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중은 자주 사용되는 클리셰를 빠르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식당이 특정 문화의 음식을 판다면 이보다 더 효과적으로 주목을 끌어내는 방법도 없다.

그렇게 효과가 있으니 더 많이 사용하게 되고, 더 많이 사용되니 클리셰는 더욱 강화된다. 그 결과, 서구의 중국 음식점부터 중국 요리를 설명하는 책, 그리고 식료품점의 중국 제품까지 이 폰트를 사용해서 고객의 눈길을 빠르게 사로잡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완톤 폰트=중국계 혹은 아시아계’라는 등식이 만들어지자, 이들을 조롱하고, 공격하고, 타자화하는 데도 이 폰트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2017년 뉴저지주에서 연방 하원 의원에 출마한 한국계 앤디 김을 공격한 상대 백인 후보의 선거 홍보물(아래 사진)이 그런 예다. 프락투어라는 폰트는 독일에서 온, 독일인이 만든 폰트이지만, 완톤 폰트는 다르다. 중국인이 아니라, 중국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들어서 중국 이민자들에게 붙여준 것이다. 다만, 그 덕분에 중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비즈니스를 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아시아계 이민자들에 대한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시절을 버텨낼 수 있게 해줬다.인종주의일까?

그런 이유로 보먼은 백인이 만들어 내고 중국 이민자들이 생존을 위해 사용해 온 폰트를 인종주의적인 폰트라고 낙인찍는데 조심스럽다. "타이포그래피를 통한 조롱은 중국인들이 받았던 많은 조롱 중 하나에 불과하다. 기본적인 인권을 얻기 위해 싸우는 상황에서 자국 문화의 진정한 표현 같은 건 사치였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과연 인종주의적인 요소가 들어있느냐를 판단하고 싶다면 아주 좋은 비유를 제시한다. 그는 "타이포그래피란 귀로 들을 수 있는 목소리에 해당하는 시각적 표현"이라면서, 액션 무비 예고편에 들어가는 목소리를 어린애들이 보는 만화에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책의 표지에 사용되는 폰트도 그 책의 성격에 따라 분명하게 다르게 선택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타이포그래피는 목소리다. 그런데 외국인이 특정 문화, 인종의 말을 흉내낸 가짜 목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인종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아래 영상을 보자. 오드리 헵번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나오는 일본인이다. 이 일본인은 백인 배우가 연기했고, 당시 일본인을 상대로 한 인종주의적 조롱이 가득 담겨 있다.
뉴욕주 오번시에는 한국 전쟁 기념비가 있다. 여기에 새겨진 영문("KOREAN WAR")은 완톤 폰트다. 이런 기념비의 존재는 완톤 폰트가 단순히 중국계에 대한 한 조롱이라고 말하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걸 세운 사람들은 희생을 기념하고 싶었던 것이지 자기 마을 사람들이 지키려고 싸우다 목숨을 잃은 나라의 문화를 조롱하고 싶었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기념비를 디자인한 사람, 승인한 사람, 이를 매일 보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모두 이를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은, 중국 음식점에서 본 글씨가 아시아 문화를 대표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다. 따라서 이 경우는 인종주의적 조롱보다는 무지의 영역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차별이 무지에서 비롯되는가? 이런 역사를 꾸준히 발굴하고 대중에게 알려야 하는 이유다.
이번주 기사는 여기까지 입니다. 일주일에 3, 4편의 글이 발행되는 오터레터에 오시면 카카오 레터를 통해 접하시는 문화에 관한 글 외에도 테크와 국제 정치 분야에서도 재미있는 글을 많이 읽으실 수 있어요. 오늘 글이 재미있으셨다면 낯선 모습의 킹 목사도 재미있게 읽으실 거예요. 중국에서 한자를 키보드로 입력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하는 자동 완성도 추천 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