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호서지방 또 호남지방

호남(湖南)이란 명칭은 1447년 세종29년 세종실록에 처음 등장한다. 이에 비해 호서(湖西)란 명칭은 그 보다 70여년 후인 1520년 중종실록에 '호서지방에 가뭄이 심하다'는 보고의 내용으로 처음 나타난다.
새재와 죽령 기준의 영남, 또 철령 기준의 관북, 관동과 관서라는 명칭이 고려시대부터 쓰였던 것에 비해 호남, 호서지방의 쓰임은 그 보다 한참 후의 일이다.
보통 호서는 금강의 옛 이름인 호강 또는 제천 의림지의 서쪽을 뜻하고, 호남은 호강 또는 김제 벽골제의 남쪽을 지칭한다.
사실 호남, 호서의 명칭에서 호(湖)의 원류는 양쯔강(장강)변의 동정호에서 찾는다. 동정호가 장강과 만나는 지점에서 그 유명한 삼국지의 적벽대전이 발발했고, 이 동정호를 기준으로 호북과 호남이 나뉜다.
학창 시절 배웠던 두보(712-770)의 「등악양루(登岳陽樓)」(768)에 등장하는 누각이 바로 후난성(湖南省) 웨양시(岳陽市) 동정호의 동북쪽 기슭에 장강과 동정호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중국의 3대 명루 중 하나인 악양루이다.
본래 중국에서 '강(江)'은 양자강을, '하(河)'는 황하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였다. 오늘날 우리가 모든 물줄기를 '강'이나 '하천'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고유명사들이 일반명사화된 결과이다.
전북 장수읍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은 397.8km, 꼭 천리를 달려 서해에 닿는다. 이러한 연유로 사람들은 금강을 '천리강'이라고도 부른다.
천리강은 지나는 구간별로 다른 명칭이 붙는다. 발원지 부근 상류인 무주 근방에서는 적천과 설천 그리고 금산에 와서는 천내강으로 불린다. 중류인 충북 영동과 옥천 일대를 지날 때는 호강, 다시 충남으로 접어드는 회덕 일대 중류에 와서는 적등강이 된다.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을 감싸고 흐르는 웅진강을 거쳐 부여지역을 흐르는 약 16km의 하류 구간은 특별히 낙화암, 고란사로 유명한 백마강이 된다.
사실 고려시대 이 지역은 나라의 중심부에 위치한 양광도로 묶여 있었다.
양광도는 현재의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를 합친 거대 광역 단위로 수도인 개경과 맞닿아 있어 정치, 경제,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다.
양광도는 조선초 태종이 8도체제를 확립하면서 북쪽지역은 경기도로 남쪽 지역은 충청도로 재편된다.
이후 조선시대는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사대부들이 천하를 주도하는 사회였다.
이들은 중국의 고전 지리를 우리 땅에 투영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행정 명칭과는 별개로 호남, 호서, 영남 등 지형적 특징을 담은 별칭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사용했다.
특히 조선 중기이후 기호학파, 영남학파처럼 학문적 계파가 나뉘면서 지역 명칭이 정치·사회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굳어진 것 또한 사대부가 즐겨하던 운치있는 별칭 문화의 확산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학문적, 정치적 맥락에서 영남학파와 비견되는 기호학파는 경기의 '기(畿)'와 호서의 '호(湖)'가 합쳐진 명칭이다.
요약하면, 삼국·고려시대는 국가 중심의 행정 구역명이 중요했지만, 조선 시대에 와서는 사대부 중심의 인문 지리적 인식이 확산되면서 점차 자연지형을 기준으로 한 '호남', '호서'라는 별칭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호서, 호남의 명칭이 호강에서 유래했건 아니면 의림지, 벽골제에서 유래했건 간에 분명한 것은, "지역의 정체성을 문학적·지리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조선 선비들의 언어 습관"이 <실록>과 <지리지>와 같은 방대한 사료에 수없이 투영된 결과라는 사실은 분명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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