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옮겨 적으며 곱씹는 맛…‘필사’에 빠진 가을
온종일 스마트폰을 끼고 사는 디지털 시대, 역설적으로 종이에 글귀를 베껴 쓰는 ‘필사’가 유행하고 있다. 필사 방법을 담은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필사 인증 게시물이 눈에 띈다. 나이 든 어르신은 물론, 젊은층도 필사에 흠뻑 빠져 있다. 특히 필사는 한글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에 안성맞춤이다. 9월말 서울 마포구에서 한 동호회의 모임을 통해 필사의 다양한 매력을 알아봤다.
서울 마포구에 있는 작은 방 안에 청년 6명이 모였다. 따듯한 조명 아래에서 이들은 각자 필사 노트를 꺼낸다. 노트 안엔 지난 한달 동안 필사한 글귀가 빼곡하다. 한사람씩 읽은 책과 필사한 문구를 소개하고, 본인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이야기한다. 이곳은 온·오프라인 필사 모임 플랫폼인 ‘인팩트’의 월간 교류 모임 현장이다. 인팩트는 4월 시작됐으며, 필사를 통한 정신적 성장을 목표로 한다. 매월 새로운 기수를 모집하고 각자 원하는 책을 정해 필사한다. 온라인 모임은 각자 필사한 노트를 찍어 공유하고 화상 회의로 진행된다. 지금까지 온라인 9기, 오프라인 6기가 모집됐으며 중복을 제외하면 38명이 참여했다.
신은미씨(31·경기 고양)가 필사 노트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요즘 정여울 작가의 ‘감수성 수업’을 필사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나는 넷플릭스나 유튜브 추천 콘텐츠를 일부러 피하는데 내 취향이 거대 기업에 분석당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영혼이 도둑맞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라는 문구를 나누고 싶어요. 이 문장을 읽고 알고리즘의 홍수 속에서 어떻게 나를 지킬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됐거든요.”
참가 이유도 다양하다. 이들은 더 깊은 독서를 하고 싶거나, 다른 사람을 보면서 삶의 원동력을 얻고 싶어 모임에 들어왔다. 혹은 정갈한 글씨로 필사하며 한글의 아름다움을 즐기기도 한다. 구성원을 보면 수도권은 물론 광역시와 지방, 싱가포르·일본 등 해외에서 참여하는 사람도 있다. 평소 온라인으로 필사 모임에 참여해왔다는 이하나씨(30·광주광역시)는 월간 교류 모임을 위해 서울을 방문했다.
“책을 그냥 읽기보단 적어가면서 의미를 되새기고 싶다는 생각에 필사 모임에 들어왔어요. 지금은 마리 루티가 쓴 ‘가치 있는 삶’이라는 책을 필사하고 있습니다. 책을 옮겨 적다보면 내가 왜 살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더라고요.”
필사 열풍이 뜨겁다. 9월 기준 인스타그램에서 ‘필사’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은 65만건이다. ‘필사노트’ ‘필사스타그램’ ‘필사챌린지’ 등 관련 태그를 달고 필사한 문구를 사진으로 찍어 인증하는 게시물이 확산되고 있다. 3월 출판된 필사 도서 ‘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 노트’는 교보문고 베스트셀러에 6개월 연속 선정됐으며, 예능 프로그램에선 가수 설현이 필사를 취미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미현 인팩트 대표는 짧고 자극적인 영상이나 글이 인기를 끌자 피로감을 느낀 청년들이 반대로 깊은 생각과 깨달음을 주는 취미를 찾아 나섰다고 분석한다. 그 또한 과거 세계여행 중 필사의 매력에 눈을 떴단다. 이 대표는 “2022년 3월부터 9개월 동안 튀르키예부터 유럽을 거쳐 남미를 쭉 돌면서 필사가 여행 동반자처럼 느껴졌다”며 “좋은 문장을 노트에 쌓아가는 경험이 뜻깊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자 필사 모임 플랫폼을 창업했다”고 말했다.
필사는 장점이 많은 취미다.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지 않으며, 음악을 듣거나 음식을 먹으면서도 할 수 있다. 종이와 필기구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어 진입장벽도 낮다. 최근엔 필사하기 좋은 문구 모음집이나 하루 1장씩 사용하는 필사 노트도 출시되고 있다. 필사하기 좋은 고전이나 인문학 문구가 왼편에, 빈 노트가 오른편에 있어 누구나 쉽게 필사할 수 있다. 이 대표는 필사를 통해 삶을 돌아볼 수 있다며 이같이 추천했다.
“많은 분이 예쁘게 글씨를 써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필사를 어려워하곤 합니다. 하지만 필사의 본질은 예쁜 글씨가 아니라 문장을 옮기며 의미를 깊이 새기는 데 있습니다. 완벽한 글씨로 필사하기 위해 신경 쓰기보다는, 자신에게 울림을 주는 문장을 찾고 적는 여정에 좀더 초점을 맞추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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