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여행자들이 찾는 숨겨진 마을, 친퀘테레

전설이 되어버린 친퀘테레식 동화

Fairy Tales of the Cinque Terre

스위스 간드리아를 빠져나와 국경을 넘었다. 코모 호수를 돌아 이탈리아를 종단하는 풍경의 요약본은 고요하고도 적막한 동화. 리구리아해를 맞이하자 비로소 친퀘테레식 변주가 시작됐다. 모진 밀물과 썰물의 리듬 속 좁고 높고 가파른 절벽 위에 마을이 우뚝 솟아 있다. 한 편의 잊히는 동화라기보단 각인되는 전설처럼.


친퀘테레에서 흔한 아파트 형식 숙소.

한낮 코모 호수의 윤슬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여겨졌다. 깊어진 어둠 속으로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굽이굽이’라기보다는 제대로 뒤틀린 길, 게다가 오르막길이었다. 설마 이런 곳에 호스텔이 있다고? 하늘에 걸린 호스텔인가 봐? 내비게이션은 이곳이 비아사(Biassa)라 했다. 간간이 주택을 지나는 1차선에 가까운 도로를 눈대중으로 올랐다. 한 저택 앞으로 인기척을 느꼈다. 문틈으로 비어져나온 불빛 앞은 와인을 마시며 고성의 웃음이 오가는, 흡사 바에서나 볼 법한 바이브였다. 본능적으로 저기라 여겼고, 예상대로 그곳이었다. “여기가 오스텔로 트라몬티야?” “이 시각에 용케도 잘 찾아왔네.” 스태프가 아닌 여행자의 답이었다. 간판 하나 없이 분위기로 찾은 이곳 여행자 사이에선 자연스러운 유대감이 흘렀다. 굳이 깊은 산속까지 기어들어온 이유가 있었다. 친퀘테레의 출발지이자 휴양지로 각광받는 라스페치아(La Spezia) 시내 대신 좀 더 친퀘테레적인 감성을 미리 예습하되 비싼 숙소 사정과는 타협할 수 없는 현실에 순응해야 했다. 우리의 목표는 친퀘테레, 그 폐부를 뚫고 진득하게 느끼는 일이었다.

동틀 무렵 관광객이 자취를 감춰 고요한 리오마조레.

부츠 모양인 이탈리아 지도의 앞무릎 부위에 해당하는 곳에 손을 대면, 리구리아해가 만져진다. 제노바와 라스페치아 사이에 위치한 다섯 개의 마을이 바로 친퀘테레. 리오마조레(Riomaggiore)와 마나롤라(Manarola), 코르닐리아(Corniglia), 베르나차(Vern azza), 그리고 몬테로소알마레(Monterosso al Mare)다. 정식 명칭으로 하자면 친퀘테레 국립공원(Parco Nazionale delle Cinque Terre)으로, 다섯 마을을 비롯한 해안선과 주변 언덕을 모두 이른다. 지난 1997년 유네스코는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이 지대를 지목했다. 웬만한 이탈리아의 대표 사진이 이곳 풍경을 독차지하는 데 이견이 없다. 현실이 꼭 비현실 같다. 아찔한 절벽 위로 쌓아 올려진 천연색을 뒤집어쓴 마을과 서슬 퍼런 바다의 마리아주는 없던 여행 세포마저 꿈틀거리게 한다. 이미 알고 왔음에도 호스텔에 걸린 여러 장의 2D 사진으로부터 3D 체험을 해야겠다는 다급함이 몰려왔다. 다섯 개의 마을을 석권하는, 일종의 친퀘테레 그랜드슬램에 대한 욕구도 마찬가지였다.

마을 꼭대기에 있는 14세기 산조반니 바티스타 성당.
화려한 컬러의 건물 속 느긋한 주민의 삶도 읽힌다.

우리가 당면한 한 가지 과제가 있다면, 이곳으로 어떻게 가느냐의 문제였다. 친퀘테레로 가는 방법은 세 가지. 하이킹을 제외한다면 여객선과 기차 그리고 차다. 호스텔 내 세부 지도를 넋 놓고 보니, 스태프가 다가와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한다. “우린 차가 있는데 말이야…”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퍼펙트!” 친퀘테레를 차로 접근하는 것은 여러 안내서에서 지양하는 바였다. 그런데 현지인이 그리 말하니, 의심 따윈 집어치웠다. 친퀘테레를 빠져나오면서 얻은 깨달음은 스태프가 뒤에 붙어야 할 중요한 추신, ‘쉽진 않을 거야’를 빼먹었을 거라는 점. 차로 접근한 덕분에 모험은 충분히 즐겼지만 친퀘테레의 트레이드마크인 불편을 뼛속 깊이 학습하게 되었다. 이렇게 모든 조건과 환경에 완벽이란 없음을 또 배우는 걸까.

ⒸLiliana Marmelo/shutterstock.com

지평선은 부재중, 리오마조레

비아사에서 나와 만난 SP370 국도는 터널을 통과하며 내내 두 가지 풍경을 짊어지고 나간다. 좌청룡은 바다, 우백호는 포도밭이다. 도로 우측으론 산비탈의 계단식 포도밭이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고, 좌측으론 강직한 절벽 사이로 망망대해의 아득함이 전해온다. 내린 창문 사이로 호된 바람을 맞다 보니, 바다에 혀를 뺀 마을 하나가 아른거린다. 리오마조레였다. 바로 지척이건만, 현실은 도무지 닿을 수 없는 꿈 같다. 도로는 좁고 위태롭다. 기분 나쁜 멀미에 익숙할 때쯤 마을의 고지에 겨우 닿았다. 마을은 자연에 포위되고, 그만큼 갇혀 있다. 이같은 자연적 불편은 오히려 친퀘테레 본연의 모습을 오래 유지하는 데 일조했다. 지난 2011년 폭우가 쓸어버린 자연재해 외엔 인간의 무자비한 개발 재앙은 없었다.

마나롤라의 생동감 있는 전경.

리오마조레는 친퀘테레가 지닌 해방 조건을 명징하게 선보였다. 수평에서 해방(10도 이상 발목 꺾고 걷기), 교통지옥에서 해방(도보 외 교통수단 불가), 편의에서도 해방(주차장이 산꼭대기에 위치)이었다. 여행의 시작이 좀 우스꽝스러웠다. 안 쓰던 발과 발목 근육을 쓰며, 하이라이트가 되는 중심부까지 하향 행진을 해야 했다. 마을은 용암처럼 흘러내리는 듯한 착시를 일으켰다. 단, 몸은 쏠리면서 동시에 밀린다. 양옆으로 캔디 컬러의 집이 병풍처럼 이어지면서 마을의 줄기가 되는 콜롬보 거리로 비린내를 머금은 역풍이 몰아치는 연유다. 그 와중에 문틈을 비집고 나온 해산물 튀김 냄새까지 비겁하게 홀리는데, 활기찬 고성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손바닥만 한 광장에서 펼쳐진 동네 축구 시합이다. 여행자들이 밀려들어도 꿋꿋이 주민의 삶이 이어진다는 표식은 3층집에 가지런히 걸린 빨랫감에도 있었다.

친절하게도 여러 푯말을 세워 길을 안내하지만, 모든 가지치기된 길은 단 한 군데로 연결된다. 항구다. 아니 작은 포구다. 1970년대 이래로 얼마나 많은 세계인을 끌어당기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현장이었다. 이곳 마을의 전망은 상식과 정반대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봐야 한다. 잿빛 절벽과는 너무도 대조되는 집의 형형색색은 햇빛과 구름의 흐름에 따라 채도를 달리한다. 타워형 집은 바다로 온통 쏟아져 물들일 것만 같았다. 만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비명은 솟구치고, 가슴이 뛰었다. 옆의 친구는 카메라로는 영 담기지 않는 전경에 온몸을 해파리처럼 움직였다. 우리에겐 여기선 보이지도 않는 고지의 주차장으로 산행할 숙제가 남아 있었다. 차가 원수였다.


또 다른 절벽 위, 공동묘지와 네순 도르마 식당, 그리고 전망대가 한 세트.

포도밭 트레일 따라 룰루, 마나롤라

친퀘테레는 독보적 풍경으로만 명성을 날리는 것은 아니다. 올리브와 함께 와인이 주역이다. 이곳 포도는 해발 800m 남짓한 계단식 언덕에서 거친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다. 아마도 친퀘테레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어촌 마을로 여겨진다는 점일 거다. 친퀘테레는 11세기경 사라센 해적의 공격이 줄어들고, 와인을 바다로 운송하기 위해 절벽에서 해안가로 점차 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조성된 마을 집단이다. 집집마다 대대손손 달콤한 홈메이드 와인을 만들어왔고, 이것이 상업화되어 외지인조차 맛볼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시아케트라(Sciacchetrà) 화이트 와인이다. 시아케트라 와인 공정은 독특하다. 수확해 그늘에서 자연 건조한 포도를 수작업으로 선별해 압착, 과즙을 내는 과정을 거친다. 그해 기후 변화가 생기면 특유의 달콤함을 잃기 쉽고, 생산량은 일반 와인에 비해 30~35%에 불과하다. 보이면 마시는 게 이득이란 이야기다. 이곳 레스토랑마다 선보이는 하우스 와인은 글라스 와인이 아닌 진짜 하우스 와인이 대부분. 가격이 높은 만큼 혀끝을 맴돌며 위로하는 시간 역시 길다. 이 와인은 마나롤라가 원조로 알려져 있다.

이변이 없는 한 매해 9월경 포도 수확이 마무리된다.

친퀘테레 중 가장 오래된 14세기 초 마을인 마나롤라는 컬러와 절벽이 충격적 인상을 주는 리오마조레와 달리 포도밭에 살포시 안겨 있는 형색이다. 마을 진입 전 정상에선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집들이 항구로 뻗어나가는 마을 안쪽 방면과 또 다른 포도밭으로 연결되는 트레일이다. 이번엔 트레일을 택했다. 여름엔 따뜻하고 겨울엔 온화하다는 그 유명한 지중해성 기후를 만끽하는 길이다. 포도밭 사이의 전망대로 오르는 돌계단은 낮지만 제멋대로고 발 디딜 폭이 넉넉하지 않았다. 이보단 트레일의 중도가 별안간 전망대 이상의 감격을 안겨준다. 바위로 꼬리를 뺀 포구 위로 안착한 마나롤라의 선물 세트 같은 전경이 눈동자를 달달하게 채웠다. 발아래로 이 전경을 365일 바라볼 절벽 위 레스토랑 네순 도르마(Nessun Dorma)를 두리번거리다 한 가지 생각에 압도되었다. 자기계발서에나 나올 법한 ‘인간 승리’다. 이 와인 테라스가 지어질 당시 지금의 차도는 없었다. 무려 1960년대까지도 자동차 도로가 전무했으니, 이곳 고립의 역사(!)를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마을 사이의 유일한 출입구는 지금 걷고 있는 트레일이었다. 1920년대 조성된 이 연결 고리는 인간의 기적 같은 의지로 깎고 돌무더기를 담으로 쌓아 올린 작품이다. 와인 테라스를 비롯해 친퀘테레에서 보이는 건조식 담을 쌓는 데 쓰인 시간만 해도 약 200년, 만리장성에 맞먹는 돌이 쓰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언덕 위로 회오리치듯 일군 포도밭이 있는 마나롤라.

올해 반가운 소식이 있다면, 리오마조레와 마나롤라를 잇는 일명 ‘사랑의 길(Via Dell’Amore)’이 7월경 다시 열린다는 소식이다. 약 120km에 달하는 전체 트레일 중 1931년부터 가장 손꼽히는 코스였다가 2012년경 산사태로 폐쇄된 후 12년 만의 재개장이다. 그간 쓰레기와 (사랑의 증표로 남긴) 자물쇠의 횡포에 고초를 겪기도 했다. 제발 흔적은 자기 집에나 남기자. 책임감 있는 여행이란 별것이 아니다.

레몬은 17세기부터 현존해온 친퀘테레를 대표하는 작물이다.
친퀘테레에서 가장 지상을 걷는 기분이 드는 코르닐리아 풍경.

하늘 가까이 골목길 미학, 코르닐리아

마나롤라와 더불어 친퀘테레에서 가장 손때가 덜 탄, 관광객 수도 적고 그만큼 친퀘테레 특유의 자산이 보존된 곳은 코르닐리아다. 여객선이 유일하게 닿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 편의에 갈망하는 여행자의 욕구가 충족되는 곳은 몬테로소알마레다. 늘 절벽과의 서바이벌 수영을 감수해야 하는 타 마을과 달리 에메랄드빛 해변 앞 모래사장 위로 줄무늬 파라솔이 즐비하다. 여름철 휴양 목적이 아니라면 친퀘테레 특유의 미감에선 자격 미달로 통한다. 대신 이곳에서 약 2시간에 걸쳐 3.7km에 달하는 트레일을 따라 걸으면 닿는 작은 해변을 지닌 어여쁜 베르나차는 차선책으로 택할 수 있다. 코르닐리아는 베르나차와 더불어 미모 경주대회에서 1, 2위를 다투는 곳으로, 좁은 골목과 광장의 균형감이 돋보인다. 디즈니 영화 <루카>의 배경이 되는 포르토로소는 코르닐리아 서쪽에 있다고 가상한 마을이다. 포스터만 봐도 단번에 친퀘테레를 연상시킨다.

코르닐리아는 고단한 하이커의 쉼터가 되곤 한다.

아마도 코르닐리아의 감흥이 전적으로 다른 이유는 마나롤라를 들른 이후였기 때문일 터다. 마나롤라가 포도밭 품에 안겨 있다면, 코르닐리아는 포도밭 위에서 성처럼 군림했다. 친퀘테레 중 가장 면적이 작으면서 해발 100m 위에 있어 바다와의 접점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바다에 붙은 기차역에서 마성의 382개 계단을 밟고 올라야 닿을 수 있기에, 친퀘테레 내에서 유일하게 셔틀버스가 다녔다. 차로 이동해 얻은 얄팍한 특권이 여기 있었다.

마을 내부는 유기적인 수로와 같았다. 좁은 길을 미로처럼 빠져나가면 사람을 모이게 하는 광장이 나오기를 반복하고, 육지를 밟고 있다는 현실감이 느껴졌다. 늘 외부에 동떨어져 있던 중세 교회도 안동네에 섞여 있다. 좁디좁은 골목에서 서로 무릎을 부딪치며 끼니를 즐기고, 음식을 먹으려고 든 팔이 낯선 보행자의 팔과 닿는 일은 흔했다. 현지 꿀로 만든 젤라토가 티셔츠에 묻는 것 따위는 예사다. 한 레스토랑을 택해 착석하면, 함께 연회를 열어 만찬을 즐기는 기분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길 끝에 가든 어김없이 만져지지 않는 바다의 기별이 있었다.

간판이 서로 부딪힐 만큼 골목에 빼곡히 들어선 상점.

이미 먹구름의 조짐을 보이던 하늘이 베르나차에 다가설수록 장대비를 몰고 왔다. 오늘 만 보 걷기는 넘긴 지 오래였고, 빗속에 시야가 가려 깜깜이 상태가 되었다. 베르나차에 이어 몬테로소의 위치를 그저 짐작만 한 채 찍듯이 돌았다. 친퀘테레 그랜드슬램을 온전히 달성하지 못했다는 찝찝함은 없었다. 상황은 완벽하지 않아도 마음은 퍼펙트했으니까.


TRAVEL GUIDE

이용 방법

열차가 가장 경제적이고 편리한 이동 수단이다. 보통 피렌체 여행 후 라스페치아로, 혹은 제노바에서 레반토(Levanto)로 이동해 지역 열차(친퀘테레 익스프레스)를 이용할 수 있다. 원하는 마을을 골라 싱글권을 끊거나 하이킹과 열차 자유 이용권이 결합된 친퀘테레 카드를 구입하면 된다. 시간과 경제적 여건이 된다면 여객선 옵션도 있다. 자동차로 접근하려면 급커브에 익숙한 주행 실력, 주차장에서부터 마을에 닿는 체력(가장 긴 곳은 베르나차로, 약 1km 도보)이 필요하다.

머물 곳

친퀘테레 내라면 대부분 가정집 형태의 숙소다. 5개 마을 중에선 몬테로소가 리조트형 호텔을 비롯한 숙소 옵션이 가장 다양하다. 바다에 가깝고 마을 중심부에 있는 숙소라면 비성수기라도 20만~30만원대가 최소 요금. 열차로 이동하기 좋고 숙박비도 준수한 라스페치아를 베이스캠프로 삼아도 좋다.

먹을 곳

올리브로 이름 날리는 지역인 만큼 피자의 조상인 포카치아는 맛봐야 한다. 병아리콩 가루로 만든 바삭한 팬케이크인 파리나타(Farinata)도 흔하다. 대부분 레스토랑에서 안초비를 비롯한 해산물을 주로 다루지만, 통통하게 살이 오른 오징어나 새우 등의 해산물 튀김을 테이크아웃해 허기를 채우기도 쉽다.

액티비티

친퀘테레는 대개 포토제닉한 동네로만 여겨진다. 프라이빗 보트 투어도 가능하지만, 그보다 이곳의 역사를 배우고 현지인과 교감할 만한 음식 문화 체험을 권한다. 집안 대대로 전수한 홈메이드 페스토 클래스가 인기를 끌고 있고, 이 지방 출신의 소믈리에가 들려주는 스토리가 있는 와인 테이스팅 프로그램도 있다.

축제

매년 5월 셋째 주 토요일에 레몬 축제가 몬테로소에서 열린다. 레몬에 절인 안초비나 레몬잼, 레몬 아이스크림 등 지역 특산물을 구시가지 가판대에서 쉽게 즐길 수 있다.

WRITTEN BY KANG MISEUNGPHOTOGRAPHY BY GAILLARD HER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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