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왕 조용필이 '어머니'라 부르며 모셨던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하지만 "아들이 홍상수"

전옥숙이라는 인물을 단순히 ‘홍상수 감독의 어머니’로만 소개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 제작자로 이름을 알렸고, 답십리 촬영소 설립자이자 문화 전반에 깊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1960년 영화 전문지 '주간영화'를 창간하며 영화계에 입문한 그녀는 이후 ‘은세계영화제작소’와 ‘연합영화사’를 설립해 수많은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대표작으로는 ‘부부 전쟁’, ‘그대 옆에 가련다’, 그리고 검열로 개봉이 무산됐던 이만희 감독의 걸작 ‘휴일’이 있다.

심의 통과를 거부해 회사가 당좌거래 정지에 처했을 만큼 예술적 신념에 있어 타협이 없던 제작자였고, 1960~70년대 한국 영화계에서 보기 드문 여성 실무자이자 결정권자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출판·방송 분야까지 영역을 확장했고, 후지TV 한국지사장을 역임했으며, 국내 최초 외주 제작사 '시네텔 서울'을 설립해 MBC ‘베스트셀러극장’ 등 다수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사교계의 여왕벌로 불렸던 전옥숙 여사

전옥숙의 영향력은 단지 영화 제작자에 머물지 않았다.

매년 그녀가 주최한 송년회는 정재계와 문화계를 막론하고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총출동하는 자리였다.

남재희 전 장관, 시인 김지하, 민주화 운동가 장일순,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 최시중 전 방통위원장 등 다양한 인물들이 그녀의 송년회에 참석했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한 술자리에서 전 여사가 “김영삼씨를 부를까?” 하고 전화를 걸자, 실제 김영삼 당시 총재가 술집에 나타난 사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전한다.

그녀는 정파나 이념을 넘어 사람을 품었고, 문화와 정치, 예술과 언론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갔다.

일본 아사히신문, NHK 특파원들이 부임하자마자 인사부터 하러 올 정도로 그녀는 한일 양국 문화계에서 특별한 존재였다.

전옥숙은 가수 조용필과도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의 일본 진출을 도왔고, 앨범 수록곡 ‘생명’과 ‘서울 1987년’을 작사했다.

조용필은 전옥숙을 '어머니'라 부르며 그녀의 차녀 생일에 기타를 들고 찾아와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고 한다.

홍상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그녀의 아들 홍상수 감독은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이름을 알렸고, 이후 ‘생활의 발견’, ‘강원도의 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등 수많은 작품으로 예술영화의 대표 감독으로 자리잡았다.

홍 감독이 데뷔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머니의 오랜 인맥과 문화계 영향력이 한몫했다는 분석도 있다.

전옥숙은 생전 영화, 방송, 출판 등 여러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인물이었고, 그만큼 재산 역시 화제가 됐다.

그녀가 별세한 뒤, 유산 상속 관련 보도가 나오면서 “홍상수 감독이 1200억 원대 재산을 물려받았다”는 소문도 돌았다.

정확한 금액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여러 방송과 언론에선 홍상수가 어머니의 유산 일부를 상속받았다는 점에는 공통적으로 무게를 싣고 있다.

삼남매가 균등 상속했을 경우, 홍 감독이 400억가량을 상속받았다는 추정도 있다.

이에 따라 일각에선 김민희와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도 엇갈린다. 예술적 동반자인가, 재력의 그림자인가.

하지만 이 모든 추측은 어디까지나 '풍문'에 머물러 있으며, 당사자들은 이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2015년, 치매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전옥숙. 그녀의 삶은 단순한 ‘화려함’ 이상의 것이었다.

사회적 통념과 남성 중심 구조를 정면으로 돌파하며 예술적 감각과 정치적 감수성을 함께 지닌 인물.

영화계에서는 제작자로, 문화계에서는 기획자로, 정계 인사들에겐 대담한 화자로 기억되는 이름.

그녀는 단지 어떤 감독의 어머니가 아닌, 한국 현대 문화사의 '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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