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해야 했죠"…'한국식 진' 개척한 조동일 부자진 대표 [人더스트리]
열세살에 유학길에 올라 영국과 싱가포르에서 글로벌 투자 회사에 다닌 금융맨이 경기도 양평으로 돌아와 지난 2019년 인생 2막을 열었다. 전에 없던 한국식 수제 진(jin)을 만들겠다고 다짐, 그곳에서 30년간 토종 허브를 재배하고 있던 아버지와의 사업적 동침을 시작한다. 이름하여 부자진.
용기와 실력 없이 실행에 옮기기도 쉽지 않은 전직과 개척, 두 가지 일을 묵묵히 해낸 조동일(43) 부자진 대표는 ”어느 누군가는 해야 했다“며 한국의 향을 입힌 진을 힘닿는 데까지 선보일 거라 말한다. 제철의 국산 생화와 생과일, 생초만 재료로 고집하는 것도 이 일환이며, 이는 한국의 봄·여름·가을·겨울을 그의 술에서 느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크레딧스위스와 골드만삭스에 몸담았던 이력이 무색하게 그는 대출과 투자는 사업에 일절 개입시키지 않는다. 리스크 최소화를 제1원칙으로 삼던 습관이 남아있어서다. 예상하기 어려운 그의 면모는 뜻밖의 맛이 단계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부자진 원액과 닮은 구석이다.
지난달 27~28일 양일간 서울 용산구 서울드래곤시티호텔에서 개최된 <블로터> 하이볼 페스티벌에서 만난 조 대표를 2주가 흐른 10일, 통화로 한 번 더 마주했다. 수화기 너머 전해지는 그의 목소리에선 전에 봤던 눈빛에서처럼 강단과 열정이 묻어났다.
- 부자진.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어떤 곳인가.
△ ‘부자’는 아버지와 아들을 의미한다. 2019년도에 설립해 5년째 진을 생산하고 있다. 신념이 있다면 우리 전통주 시장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 지역 특산주로서 로컬 농산물을 활용하면 대부분 소주, 막걸리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고정관념을 깨고 싶다.
한국의 토종 허브들 이를테면 오미자나 둥굴레, 솔잎 등을 부재료로 사용해 특유의 향을 입힌 술을 만들고 싶었다. 이 모든 게 맞닿아 있는 게 바로 ‘진’이다. 이를 통해 우리도 지역 농산물을 활용해 매력적인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는 걸 입증하려 한다. 부자진은 한국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성장하고 있다.
- 금융맨’ 타이틀을 내려놓고 아버지와의 ‘동거’는 과감한 도전이었을 텐데, 동업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다면.
△ 철저한 분업과 존경이다. 아버지는 경기도 양평에서 30년간 허브 농장을 운영하신 허브 전문가다. 등록된 유기농 허브만 65가지 이상이다. 아버지는 농장에 집중하고, 나는 제조장과 판매, 영업, 홍보를 담당하고 있다. 새로운 진을 출시하기 전 우선 아버지께 어떤 맛을 표현할 건지 조언을 구하면, 아버지가 허브를 추천해 주신다. 그렇게 여러 번의 증류와 테스트를 거쳐 생산에 들어간다.
- 부자진이 만드는 진은 어떤 술인가.
△ 진의 종류는 크게 런던드라이 진, 슬로 진, 올드 톰 진, 네이비 스트렝스 진, 마지막 컨템포러리 진이 있다. 우리의 진은 컨템포러리다. 한국 최초의 진을 만들며 이미 너무 많은 런던드라이 진을 만들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들과 차별화된 진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진을 처음 만들 때, 트렌드를 미리 계산한다. 향후 어떤 시장이 커질 것 같다고 예측하고 그 시장을 겨냥한 제품을 만들고 있다. 우리의 돌파구는 맛과 향으로만 승부를 보는 것이다. 한국의 토종 허브, 100% 국산 원료를 사용하는 이유도 그런 맛과 향에 집중해서 한국의 맛과 향을 알리는 데 있다.
- 부자진에 들어가는 허브의 종류를 소개해달라.
△ 허브에는 클래식 허브와 토종 허브가 있다. 외국의 라벤더, 로즈베리, 캐모마일 등이 클래식 허브다. 토종 허브로는 배초향, 차즈기, 헛개, 야관문 등이 있다. 부자진의 수출 경쟁력은 이 토종 허브와 클래식 허브 간 밸런스를 갖췄다는 점이다. 외국 소비자에게 익숙하면서도 새롭다는, 한국적인 옷을 입혔다는 인식을 주는 게 포인트다.
- 진을 만들기까지 영감은 어디서 얻나. 또 이를 즐길 방법을 알려준다면.
△ 각각의 진마다 만들게 된 스토리가 있다. 한국에서 생활하며 느낀 점 등이 베이스다. 진으로 표현하면 재밌을 것 같은 요소들을 토대로 레시피를 만든다.
가장 맛있게 즐기는 방법은 원액을 마시는 것. 큰 와인잔에 큰 얼음을 넣고 소주잔으로 반 잔만 넣는다. 천천히 에어링하면서 양평의 다양한 허브와 자연을 즐기면서 드시라고 추천한다. 처음엔 달달하면서 꽃 같은 맛과 향이 나다가 중간엔 복합적인 허브향이 올라온다. 끝엔 캐모마일과 시트러스 등의 단맛이 느껴진다. 다단계로 올라오는 게 부자진의 특징이다.
- 국내외 소비자들의 반응은.
△ 국내시장은 아직 규모가 작다. 진이 이제 알려지는 추세고, 위스키보다 한 발짝 느리다. 해외에선 반응이 좋다. 애당초 부자진은 타깃 시장이 뚜렷했고 해외 소비자들이 마셔보지 못했던 진이기 때문이다. 3년 전부터 수출을 시작해 매해 국가를 늘리고 있다.
- 내년에 출시될 신제품에 대해 소개해달라.
△ 흑미를 원료로 사용했다. 흑미의 발효가 굉장히 어렵다. 이를 연구해 증류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했다. 이름은 ‘흑미진진’이다. ‘떼부자’도 나온다. ‘떼’라는 단어가 프랑스어로 ‘차(Tea)’다. 부자진이 클래식, 보타니컬한 토종 허브를 사용하다 보니 동양과 서양의 차 문화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면 좋겠다고 봤다.
- 부자진의 대표이자 인간 조동일로서 갖고 있는 비전이 궁금하다.
△ 한국을 대표하는 진으로써 다양한 재료와 증류법으로 고객에게 다가가고, 그들이 원하는 진을 찾아가는 여정을 함께 하고 싶다. 여러 라인업을 만들어 다양한 맛을 소비자가 경험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지역특산주의 한계가 과연 무엇일까, 얼마나 발전할 수 있으며 어떤 길을 걸어야 하나, 어떻게 유지를 하고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를 고민할 것이다.
이 사업의 끝은 100%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다. 경기도 양평의 로컬 브랜드로 시작한 지 5년이 됐는데, 20년 후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그때는 부자진이 운영하는 재단이 있지 않을까 싶다.
박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