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의 남자 주인공이 바뀌고 있다…‘내조하는 남성’의 출현

정덕현 문화 평론가 2025. 2. 16.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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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완벽한 비서》 의 유은호, 《옥씨부인전》의 송서인이 담은 시대 변화
최근 드라마 판타지 속 여성들의 ‘자아성취’ 욕구 드러내

(시사저널=정덕현 문화 평론가)

최근 가장 도드라지는 남자배우 중 한 명이 이준혁이다. SBS에서 방영되고 있는 멜로 드라마 《나의 완벽한 비서》 덕분이다. 이 작품에서 이준혁이 연기하는 유은호는 기존 멜로의 주인공들과 사뭇 다르다. 무엇이 다르고, 그 색다른 남성 판타지는 무얼 말해 주는 걸까.

유은호는 '싱글대디'다. 그는 한 대기업 인사팀에서 상사의 신임을 받는 잘나가는 회사원이었지만, 중요한 프로젝트를 앞두고 육아휴직을 내면서 밀려나게 된다. 이후 회사에 복귀했지만 휴직으로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그로 인해 불이익을 받은 상사의 노골적 괴롭힘으로 결국 회사를 그만둔다.

이후 그는 비서를 찾고 있던 '피플즈' 이사의 눈에 든다. 일은 잘하지만 정리정돈은 서툰 데다 취향까지 까다로운 대표 강지윤(한지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는 역할이다. 대표이사와 비서로 만나 그 공적인 관계가 사적인 감정으로 흔들리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 설정이지만, 이 드라마는 그 남녀의 전형적인 역할 구도(남성 사장+여성 비서)를 뒤집어 놨다. 무엇보다 이 남성 판타지에 '돌봄 노동'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집어넣었다. 즉 피플즈의 이사가 유은호를 스카우트하게 된 이유는, 그의 집을 방문했던 이사가 완벽하고 깔끔하게 정리정돈되어 있는 집 안 구석구석과 아이의 일정들을 꼼꼼하게 정리해 놓은 일정표 같은 그의 육아, 가사에 깃든 살림 능력을 확인하면서다. 그리고 그의 살림 능력은 고스란히 회사에서 그 누구도 감당하기 어려웠던 강지윤 대표를 완벽히 케어하는 모습으로 발휘된다.

《나의 완벽한 비서》 포스터 ⓒSBS

돌봄 노동의 가치를 체화한 남자 주인공

드라마 설정은 다분히 로맨틱 코미디 특유의 과장으로 그려졌지만, 여기에는 여성들이 꿈꾸는 '돌봄 노동'의 가치에 대한 판타지가 들어있다. 육아휴직이 여성들에게 경력 단절로 이어지는 건 육아 같은 돌봄 노동이 아무런 경력으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 때문이다. 2019년 방영된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에서 살림하고 육아하느라 경력이 단절된 강단이(이나영)에게 면접관은 이렇게 말한다. "7년 전에 회사 그만둔 뒤론 쭉 노셨네요?" 사실 논 게 아니라 돌봄 노동을 쭉 해온 것이지만 사회가 그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에 경력 단절의 현실이 생긴다는 걸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드라마 속 유은호 역시 전 직장에서 같은 처지에 놓여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하지만 새롭게 가게 된 피플즈에서 그가 했던 돌봄 노동의 시간은 비서 일을 하는 데 중요한 경력으로 인정된다. 그리고 유은호는 회사에서도 대표인 강지윤을 비서로서 완벽하게 '돌봐주는' 인물이다. 때론 슬쩍 선을 넘기도 하지만 말이다. 유은호라는 캐릭터와 그를 연기한 이준혁이 여성들의 새로운 로망으로 떠오른 이유다.

이렇듯 여성들의 새로운 로망은 멜로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을 바꾸고 있다. 부유한 재벌 2세나 어떤 영역에서 전문적 능력을 가진 팀장님이 남자 주인공의 단골 배역이던 시절은 지났다. 여성들은 남성이 가진 돈과 권력에 편승하는 '신데렐라식' 신분 상승보다는 자신들이 일과 사랑에서 하고픈 것들을 지지하고 위로하며 함께 성장해 가는 남자 주인공을 로망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신데렐라 구도의 멜로 드라마도 적지 않지만, 남자 주인공들은 여성을 앞에서 이끌어주기보다는 뒤편으로 물러나 지지해 주는 위치로 옮겨갔다. 이른바 '내조하는 남성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완벽한 비서》 스틸컷 ⓒSBS

내조를 택하는 남성…자아성취가 더 중요한 여성

사극 《옥씨부인전》에는 노비였다가 가짜 양반 신분을 얻어 민초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외지부(현 변호사)로 활약하는 구덕이(임지연)를 뒤에서 지지하는 송서인(추영우)이라는 남자 주인공도 등장한다. 이 인물은 자신이 꿈꾸던 전기수로서의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구덕이를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는 남성이다. 지금으로 치면 바깥일을 하는 여성을 위해 집안 살림을 챙기는 일도 도맡는다. 사극의 외피를 입었지만 《나의 완벽한 비서》의 유은호와 비슷한 위치에 서 있는 남자 주인공이다.

또 최근 종영한 《나미브》에서도 아이돌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강수현(고현정)을 내조하는 남편 심준석(윤상현)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사회생활에 정신이 없어 가사나 육아에 서툰 강수현과 달리 자신이 하던 음악 작곡과 프로듀싱을 잠시 접어두고 집안일을 해왔던 남편이다. 그는 처음에는 그저 '주부9단' 캐릭터로 그려지는 듯싶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강수현이 아이돌 육성을 그저 비즈니스로 바라보던 그 관점을 아이를 키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관점으로 되돌리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강수현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게 내조하는 남성인 것이다.

남자 주인공들의 이러한 변화는 여자 주인공들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여자 주인공들은 이제 주도적으로 사건을 이끌어가지 않으면 더 이상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단계에 들어섰다. 이것은 다분히 보수적일 수 있는 역사적 인물을 다루는 사극에서마저도 나타나는 경향이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사극 《원경》이 대표적이다. 세종의 어머니인 원경왕후의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지금껏 조선 창건을 다룬 무수한 사극 속에서 주로 남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던 그 흐름에서 벗어나 원경이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세웠다. 왕자의 난까지 일으키며 왕좌를 차지하고 세종으로 이어지는 태평성대의 발판을 마련한 당대의 역사에서 태종만큼 중대한 역할을 원경왕후가 했다는 걸 보여주는 사극이다.

작년 신드롬을 일으켰던 《선재 업고 튀어》 같은 멜로 드라마에서도 극을 이끄는 주도적인 인물은 바로 임솔(김혜윤)이라는 여성이다. 자신의 '최애'인 류선재(변우석)를 구하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 여성은 이른바 '덕질'하는 팬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그런데 현재의 팬심은 스타를 추종하던 과거와는 달라졌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동반 성장해 가는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는 팬심이다. 멜로 드라마로 해석되었지만 《선재 업고 튀어》에서도 임솔의 류선재에 대한 열렬한 애정은 그저 추종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능동적인 면을 담고 있다.

지금의 여성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성공이나 행복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한 자아성취다. 현실적으로 일의 영역에서 자아성취에 가장 큰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이 육아나 가사 같은 가정의 영역을 돌보는 일이다. 사회가 부담해야 할 것을 가족의 희생이 감당하고 있는 돌봄 노동이 최근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지난해 방영된 《굿파트너》 같은 작품을 보면 잘나가는 이혼 전문변호사 차은경(장나라)의 가장 아픈 구석이자 자책하는 지점은 바로 딸 김재희(유나)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변호사가 등장하는 법정 드라마에서조차 육아 같은 돌봄 노동의 문제가 중요한 서사로 등장한다는 건, 이것이 얼마나 현실적인 무게감을 갖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나의 완벽한 비서》가 익숙한 오피스 로맨틱 코미디의 서사를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신드롬에 가까운 시청자의 반응이 쏟아지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여성들은 일에 있어서의 자아성취를 마음껏 추구할 수 있게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남성들을 로망으로 그리고 있다. 내조하고 돌보는 남성, 유은호라는 남자 주인공에게 순식간에 여성들이 마음을 빼앗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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