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 지키는 병사들 군장점검… 트집 잡아 돈 빼앗는 ‘사냥’ 변질[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중앙군 총괄 역할… 요즘의 합참
비변사 설치 뒤 유명무실 전락
군인들 준비물 점검… 벌금 부과
많게는 300냥… 백성들이 갹출
제대로 월급 주어지지 않은 탓
지방관리까지 금전갈취 일상화
# 군졸들의 호랑이로 군림한 도총부 관원들
조선시대 오위(五衛)를 총괄한 최고 군령기관으로 요즘의 합동참모본부에 해당한다. 고려시대에는 삼군총제부로 불리다가 조선 초에는 의흥삼군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의흥삼군부는 태종 1년(1401년)에 승추부로 다시 개칭되었는데, 그로부터 2년 뒤인 1403년에 삼군에 각각 도총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1405년에 승추부가 병조에 통합됨에 따라 삼군도총부는 병조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병조가 너무 비대해졌는데, 병조의 군사 업무를 다시 분산시키기 위해 삼군진무소가 설치되었다. 그러다 세조 3년(1457년)에 중앙군 조직이 오위로 개편되면서 삼군진무소는 오위진무소가 되었고, 1466년에 관제개혁이 이뤄지면서 오위도총부로 개칭되었다.
오위도총부는 중앙군을 총괄하는 역할을 했는데, 중종 때 비변사가 설치되면서 군국기무만 전담하는 기구로 전락했다. 이 때문에 기능이 점차 약화되어 법제상으론 유명무실한 관부로 남아 있다가 1882년에 군제개혁이 이뤄지면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오위도총부가 총괄한 오위는 의흥위, 용양위, 호분위, 충좌위, 충무위 등으로 구성된 전국 군대 전체를 일컫는다. 하지만 오위도총부는 비변사가 설치된 이후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관원이 많지는 않았다. 관원으로는 도총관(정2품)과 부총관(종2품)이 10인 있었는데, 대부분 다른 기관의 관료가 겸임하였다. 그래서 대개 종친이나 부마, 정승 등 고위 관리가 임명되었다. 따라서 오위도총부의 실질적인 운영은 종4품의 경력과 종5품의 도사 4인이 맡고 있었다. 나머지 관원으로는 서리 13인, 사령 20인이 전부였다. 하지만 어쨌든 궁궐 안에 있는 기관이었기에 이들 관원은 매일 궁궐로 출퇴근하였다.
오위도총부는 흔히 도총부로 불렸는데, 주된 임무는 성문을 지키는 위졸(衛卒)들을 점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무는 단순한 편이었는데, 이 사무는 대체로 경력이 총괄하였다. 그럼에도 총관과 부총관이 10인이나 배치되었고, 그 아래 경력이나 도사도 10인 이상 될 때도 많았다. 이 때문에 관제 개편이 있을 때마다 도총부의 고위직과 경력이나 도사 같은 낭청의 수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도총부의 주요 임무가 입직하는 위졸들을 점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군졸들에 대한 도총부 관원들의 불법적인 착취가 심했다. 도총부 관원들은 점검을 핑계로 자주 군졸들을 괴롭히며 재물을 뜯어내곤 했는데, 이런 행위를 두고 당시 군인들은 ‘도총부의 사냥’이라고 불렀다. 도총부 관원들은 마치 사냥하듯이 군졸들의 주머니를 털곤 했던 것이다. 그렇듯 도총부 관원들은 일반 군졸들에겐 호랑이 같은 존재였다.
# 돈을 갈취하던 악습, 악습을 당연시한 조선 사회
광해군일기 4년(1612년) 5월 27일에 병조에서 이런 보고를 하였다.
“무릇 군사가 상번(上番)하여 군장(軍裝)을 점고(點考)받을 때 본조와 도총부의 하인들이 행하(行下)를 빙자하여 사사로이 서로 속전(贖錢)을 징수하는데, 이는 대대로 내려온 고질적인 폐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작년 본조의 계목(啓目) 안에 ‘군장을 점고한 뒤에 시사(試射)하여 불합격한 자는 논죄하거나 혹은 속전을 거둔다’는 일을 아뢰어 윤허받았으니, 이같이 하면 군장은 자연히 정밀하고 좋아질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점고하는 때에 낭청의 하인들이 제멋대로 침학하는 것이 전날과 같았다고 합니다. 말 뒤의 배리(陪吏)가 비록 보호받는 자라 하더라도 대궐 아래의 위졸에게 어찌 징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일의 체모로 헤아려 보건대 매우 온당치 않으니, 도총부의 점고한 낭청을 우선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병조의 이 보고서는 병조와 도총부 관원들의 불법적인 금전 탈취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군인들이 군역을 지고 서울로 올라오면 그들의 군장을 점검하는 일을 병조와 도총부의 하인들이 맡았는데, 이 과정에서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아 군인에게 벌금을 징수해 돈을 갈취했다.
이런 행동은 고려 때부터 고질적으로 내려오던 악습이었다. 도총부나 병조의 관원들이 하인들을 시켜 군인들의 돈을 갈취하는 행위는 행하(行下)를 빙자한 것인데, 행하라는 것은 원래 군인들의 준비물을 점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점검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준비물을 갖추지 못하면 속전, 즉 벌금을 부과함으로써 준비물을 제대로 갖추게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악습으로 변해 군인들의 돈을 갈취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특히 도총부 관원들은 성문을 지키는 위졸(문졸)로 온 자들을 상대로 돈을 갈취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조선 왕조는 개국 초부터 이러한 악습을 근절시키기 위해 무단히 애를 썼지만 조선 말기까지도 이 악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궐내행하(闕內行下)’라는 이름으로 지방관으로 파견되는 관리들로부터 돈을 뜯어내는 것도 하나의 관습으로 굳어져 있었다. 이때 지방관으로 파견되는 관리는 반드시 임금을 만난 뒤 임명장을 받고 임지로 떠나야 했는데, 도총부 관원들이나 각 문의 별감들이 문을 막고 일종의 통과세를 받곤 했는데, 이를 궐내행하라고 했던 것이다.
궐내행하로 인해 관리들이 내야 하는 금액은 많게는 300냥이 넘었다고 하는데, 이를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약 1500만 원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돈이 관리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임할 곳의 백성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 새로운 지방관이 부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부임지의 이방이 고을의 백성들에게 갹출하여 궐내행하에 쓰이는 돈은 물론이고 신임 관리의 이사 비용과 부임 과정에서 쓰이는 모든 비용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도총부의 관원과 하인, 또는 문지기들이 행하를 빙자하여 돈을 뜯은 것은 그들에게 제대로 월급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성문이나 궐문을 지키는 문졸과 별감들은 월급이 없었기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뜯어냈다. 이는 궐문의 문졸뿐 아니라 각 성문의 문졸이나 각 지방 관아의 문졸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는 이렇듯 궁궐에서부터 지방 관아에 이르기까지 관리와 군졸, 그리고 백성들을 대상으로 불법적으로 돈을 갈취하는 것이 악습으로 굳어져 있는 사회였다. 말하자면 궁궐의 도총부 관원과 그 수하의 사령 및 하인들이 문졸들을 상대로 돈을 갈취하면, 그들 문졸은 또 궁문을 드나들어야만 하는 지방관을 상대로 돈을 갈취하고, 지방관은 또 백성들의 돈을 갈취하여 그 돈을 충당하는 식이었다. 또한 지방의 관아를 지키는 문졸들도 같은 수법으로 백성들을 상대로 통과세를 거뒀으며, 관아의 옥졸도 또한 죄수와 그 가족들로부터 돈을 갈취했다.
이러한 금전 갈취 행위는 지방 아전들에게도 일상화되어 있었다. 아전들 역시 월급이 없었기에 백성들에게 각종 세금을 거둬들이는 방법으로 돈을 갈취했다. 그렇듯 조선 사회는 금전 갈취에 대해 매우 무감각한 사회였다.
작가
■ 용어설명 - 비변사(備邊司)
외적 침입에 대한 대책 마련을 위한 임시 관서로 조선 중기 설치됐다. 임진왜란 이후 비변사 역할의 확대에 따라 상설 기관이 됐다. 군사와 외교 업무 외 재정·인사·의례 등 각종 정책의 입안과 집행을 주도했다. 특히 세도정치 시기는 특정 가문의 권력 유지를 위한 기관으로 전락했다.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의 왕권 강화 기조로 혁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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