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株 시총 607조 원 증발, 美 실리콘밸리은행 초고속 파산 여진
SVB 파산 여파는 잦아들지 않고 있다. 3월 12일 또 다른 미국 상업은행인 시그니처은행도 파산한 게 그 시그널이다. 뉴욕에 본사를 둔 시그니처은행은 총자산 1104억 달러(약 144조 원), 총예금액 886억 달러(약 116조 원)인 암호화폐 전문은행이다.
주가 61.8% 급락 '퍼스트리퍼블릭'도 파산 위기설
SVB 파산 여파가 미국 금융계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지속되는 상황이다. 미국 '블룸버그' 등 외신에 따르면 3월 13~14일 이틀 동안 글로벌 금융주 시가총액 중 4650억 달러(약 607조 원)가 증발했다. SVB처럼 스타트업 대출을 주력으로 하는 퍼스트리퍼블릭은행(총자산 기준 미국 은행업계 14위)의 경우 3월 13일 주가가 61.8% 급락하면서 '파산 위기설'이 흘러나왔다. 같은 날 미국 은행주 12개 종목의 거래가 일시 중단됐다. 코스피, 코스닥 지수는 3월 14일 전날 대비 각각 2.56%, 3.91% 하락하는 등 국내 주식시장도 유탄을 맞았다.SVB 파산에 따른 은행권 위기가 유럽까지 확대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스위스에서 두 번째로 큰 은행인 '크레디트스위스' 주가는 최대주주 사우디아라비아 국립은행의 금융 지원 중단 소식에 3월 15일 장중 한때 30% 급락했다. 지난해 투자 실패로 큰 손실을 입은 크레디트스위스가 시장 변동성 확대의 직격탄을 맞고 휘청거리는 모습이다.
SVB 파산의 주된 원인은 연준의 고강도 긴축과 테크업계의 자금난이다. 1983년 설립된 SVB는 실리콘밸리를 비롯한 미 서부 밴처캐피털(VC)과 스타트업의 핵심 자금줄이었다. 지난해 말 기준 총자산 및 총예금액은 각각 2090억 달러(약 272조8000억 원), 1754억 달러(약 229조 원)로 미국 은행업계 16위 규모다. SVB의 대표 금융상품은 스타트업에 특화된 '벤처 대출'이었다. 일반 은행의 대출 기준을 충족하기 어려운 신생 벤처에 투자금 유치 규모에 따라 대출을 해주는 방식으로 고객을 끌어모았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과 VC의 절반 이상이 SVB 고객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연준의 금리인상이 본격화되자 코로나19 팬데믹 국면에서 몸집을 불린 테크기업들의 돈줄이 마르기 시작했다. SVB는 저금리 기조와 IT업계 호황 속에서 확보한 예금을 미 국채에 대규모로 투자한 터였다. 급격한 금리인상으로 채권 가격이 하락한 상태였는데, 당장 자금 융통을 위해 테크업계가 예금 인출 요구를 이어가자 SVB는 손실을 감수하고 국채 자산을 팔 수 밖에 없었다. SVB는 3월 8일 장기 채권 210억 달러(약 27조4000억 원)어치를 매각해 18억 달러(약 2조3400억 원) 손실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SVB가 대규모 손실을 봤다는 소식에 주가는 60% 이상 폭락했고, 뱅크런 사태가 이어졌다.
"온라인 공간 소문만으로 은행 파산할 수도"
SVB 파산 원인에 대해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자산 및 부채 운용 전반에서 금리와 유동성 리스크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 파산의 주요 원인으로 보인다"면서 "SVB는 테크, 벤처기업의 예금이 주를 이뤘는데, 이들 기업 특성상 쉽게 돈을 이동시키다 보니 유동성 위기 관리 측면에서 취약성이 드러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 국채는 파산 위험성이 사실상 없다는 점에서 안전자산이지만 그 또한 일종의 채권이기에 금리 리스크는 상존한다는 점을 SVB 측이 간과했다"는 것이다.이번 SVB 파산에서 눈에 띄는 점은 디지털 기술 발달이 대형 은행의 초고속 파산에 가속도를 붙였다는 것이다. 2008년 글로벌 위기만큼 금융 리스크가 크지 않았음에도 스마트폰으로 빠른 예금 인출이 가능해져 '패닉'이 순식간에 확산된 셈이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스마트폰 뱅크런으로 비운 맞은 SVB' 제하 기사에서 △IT업계에서 많이 쓰는 소셜미디어 '슬랙'으로 각 스타트업 경영자가 SVB 리스크를 빠르게 공유해 '과민 반응'한 것 △스마트폰 버튼만 몇 번 누르면 예금을 즉시 인출할 수 있는 IT 금융 환경을 이번 파산의 한 배경으로 짚었다. 이에 대해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SVB의 손실 규모가 컸다지만, 그 정도 규모의 은행이 이틀도 안 돼 도산하고 금융당국이 손도 못 쓴 것은 전례 없는 일"이라면서 "이번 사태로 상당한 규모의 은행이 온라인 공간의 소문만으로도 파산할 수 있다는 게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석 교수는 이어 "한국은 미국보다 디지털 접근성이 더 좋은 사회라고 볼 수 있는데, 이로 인해 국내 금융권에서도 향후 디지털 뱅크런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현재 국내에서 전자금융감독규정에 따른 개인 고객의 인터넷·모바일 뱅킹 1회 이체 한도는 최대 1억 원, 하루 이체 한도는 최대 5억 원이다.
미국 은행권의 파산 사태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같은 파국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없을까. 현재 상황에선 그럴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 시장과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석 교수는 "대다수 SVB 고객 기업의 예금 액수가 기존 예금자보험으론 커버할 수 없는 규모지만, 미 당국이 이를 전액 돌려주겠다고 선언해 줄도산 가능성을 차단했다"고 말했다. 하준경 교수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파생상품을 통해 전 세계 금융이 연계돼 일어난 사태였던 반면, 최근 미국 은행 도산은 본질적으로 개별 은행의 유동성 위기에 가깝다"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SVB 파산은 국채를 만기까지 보유하기 어려워 발생한 유동성 위기다. 따라서 지난 글로벌 금융위기 때처럼 각종 파생상품의 가치가 끝없이 하락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미 국채를 보유한 은행이 여러 곳 있어도 리스크 관리를 잘하면 대부분 파산 위험성은 그리 크지 않다. 다만 금융위기에는 시장의 불안이 심리적으로 전염되는 것도 한몫한다. 금리인상이 계속되면서 미처 예상치 못한 리스크가 새로이 드러나기도 한다. 일단 시장 상황을 예의주시할 필요는 있다."
美 연준 '빅스텝' 나설까
글로벌 금융시장의 이목은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의 입을 향하고 있다. 파월 의장은 3월 7일 미 상원 은행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최근 경제지표가 예상보다 강세를 보여 최종 금리 수준이 이전 전망보다 높을 가능성이 크다"며 빅스텝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다. 일각에선 시중은행 도산 사태로 연준이 금리를 0.25%p 올리는 데 그칠 거라는 예상도 나온다.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연준이 3월 기준금리를 동결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3월 21~22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의 기준금리 인상 결정에 어느 때보다 관심이 쏠리고 있다.관건은 미국 물가상승률 추이다. 3월 15일 미 노동부에 따르면 2월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지난해 같은 달 대비 6.0%, 전월 대비 0.4% 상승했다. 당초 시장 전망처럼 물가상승세가 둔화된 것이다. 다만 미래 물가 추이를 예상하는 잣대인 근원 서비스 물가상승률은 전월 대비 0.5%로 시장 예상치(0.4%)보다 높았다. 추가적인 물가상승 가능성이 상존하는 셈이다. 은행 파산 사태와 별개로, 연준이 빅스텝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석병훈 교수는 "연준이 최근 은행 파산을 의식해 최우선 목표인 물가 안정을 포기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면서 "고금리 기조에 따라 스타트업의 자금 조달이 어려워진 것은 연준이 이미 예상했던 일로, 기업 투자를 줄여 소비지출을 억제하고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는 계획에 부합한다"고 분석했다.
미국 은행의 파산 사태는 국내 금융시장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어 금융당국은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3월 13일 '금융상황 점검회의'에서 "미국 정부 및 감독당국이 SVB의 모든 예금자를 보호하기로 조치하면서 시스템 리스크로 확대될 가능성은 제한적일 것으로 판단된다"면서도 "유사한 영업구조를 가진 미국 내 금융회사가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만큼 당분간 국내외 금융시장 동향을 경계심을 갖고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관계 당국은 예금 전액 보증 등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뱅크런에 대비해 안전망도 점검하고 있다. 금융위원회와 예금보험공사는 급작스러운 뱅크런으로 은행이 지급 불능 상태에 빠질 경우 정부가 예금 전액을 보증하는 방안 및 법적 근거 등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장 SVB처럼 국내 은행이 파산할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선제적 안전 조치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국내에선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예금 전액 보호 조치가 단행된 바 있다.
김우정 기자 friend@donga.com
Copyright © 주간동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