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6위가 결승행? 태국 ‘핑크 공주’가 안세영 다음 챔피언 꿈꾸는 이유

‘랭킹 36위’라는 숫자만 놓고 보면 이번 인도네시아 마스터스 결승 진출은 분명 이변처럼 보인다. 하지만 피차몬 오파니푸스의 행보를 차분히 되짚어보면, 이 결과는 우연이나 반짝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더 인상적인 건, 결승에 오른 직후 그가 꺼낸 한마디였다. “롤모델은 안세영.” 이 짧은 문장은 지금의 피차몬이 어디에 서 있고,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아주 또렷하게 보여준다.

피차몬 오파니푸스는 2007년생이다. 아직 10대 후반에 불과하지만, 배드민턴 인생은 결코 짧지 않다. 어린 시절부터 라켓을 잡았고, 주니어 무대에서는 이미 정상까지 올라본 경험이 있다. 2023년 세계주니어선수권 여자 단식 우승은 그의 이름을 국제 무대에 확실히 각인시킨 계기였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주니어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은 축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한다. ‘다음엔 언제 우승하느냐’, ‘성인 무대에서도 통하느냐’라는 시선이 한꺼번에 쏟아지기 때문이다.

피차몬은 그 부담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인터뷰에서 지난 2년간 경기 중 손이 떨릴 정도로 압박을 느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기대와 시선, 스스로 세운 목표가 한꺼번에 몰려오며 마음이 흔들렸다는 고백이다. 많은 유망주들이 이 지점에서 무너진다. 실력은 충분하지만, 마음이 버티지 못해 제 속도를 잃는다. 피차몬이 이번 대회에서 특별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 흔들림을 인정한 뒤 다시 코트 위에서 답을 찾았다는 점이다.

이번 인도네시아 마스터스에서 그의 경기력은 단순히 ‘젊고 패기 있다’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8강에서 세계 9위 미야자키 도모카를 스트레이트로 꺾은 경기는 상징적이었다. 상대는 이미 성인 무대에서 검증된 선수였고, 랭킹과 경험 모두 피차몬보다 앞서 있었다. 하지만 피차몬은 속도와 체력, 그리고 과감한 공격 선택으로 흐름을 가져왔다. 이어진 경기에서도 그는 랠리가 길어질수록 더 단단해졌고, 스스로 무너지는 장면을 거의 보여주지 않았다. 랭킹 36위라는 숫자가 오히려 어색해 보일 정도였다.

결승 진출이 확정된 뒤 나온 그의 발언은 그래서 더 의미가 깊다. 피차몬은 롤모델로 타이쯔잉과 함께 안세영을 꼽았다. 이미 은퇴한 전설과 현재 세계 랭킹 1위 선수를 동시에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목표선은 분명하다. 특히 안세영이라는 이름을 꺼낸 건 상징적이다. 안세영은 단순히 많이 이기는 선수가 아니라, 매 경기 같은 집중력과 태도로 상대를 압박하는 선수다. 체력, 수비, 전술 이해도,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의 냉정함까지 모두 갖춘 선수다. 피차몬이 그를 롤모델로 삼았다는 건, 화려한 승리보다 ‘완성형 선수’가 되고 싶다는 뜻에 가깝다.

결승 상대는 중국의 천위페이다. 경험과 안정감에서는 현시점에서 피차몬보다 한 수 위인 선수다. 피차몬 스스로도 이를 알고 있다. 그는 결승전을 ‘이기기 위한 경기’이자 ‘배우기 위한 경기’라고 표현했다. 이 태도 역시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성숙하다. 아직 커리어 초반에 있는 선수가 세계 정상급 선수와의 맞대결을 성장의 재료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매우 긍정적인 신호다.

이번 대회에서 안세영은 출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결승의 의미가 줄어드는 건 아니다. 오히려 안세영이 기준점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피차몬의 도전은 더 또렷해진다. ‘안세영이 없는 틈을 탔다’는 표현보다는, ‘안세영이라는 기준을 향해 누가 먼저 올라오느냐’를 가늠하는 무대에 가깝다. 피차몬은 그 질문에 가장 먼저 손을 든 선수다.

태국 배드민턴은 과거에도 뛰어난 여자 단식 선수를 배출해 왔지만, 최근 몇 년간은 세대교체의 필요성이 꾸준히 언급돼 왔다. 피차몬의 등장은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신호탄처럼 보인다. 아직은 랭킹도, 커리어도 더 쌓아야 한다. 하지만 이미 세계 상위권 선수들과 정면으로 부딪혀도 물러서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성장 곡선은 상당히 가파르다.

피차몬 오파니푸스의 인도네시아 마스터스 결승 진출은 그래서 한 대회의 성적 이상이다. 흔들림을 겪었던 10대 선수가, 스스로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기준의 이름이 안세영이라는 점은, 앞으로의 배드민턴 판도를 상상하게 만든다. 아직은 ‘다음’을 이야기하기 이르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태국의 ‘공주’는 단순한 신예가 아니라, 세계 무대를 진지하게 넘보고 있는 도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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