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표적 박살낼 ‘독수리’, 스텔스기만큼 주목받는다 [박수찬의 軍]
1990년대 제1차 걸프전 이래로 세계 각국 공군에서 가장 주목한 개념은 스텔스였다. 레이더에 포착될 확률을 대폭 낮춰 조종사와 기체의 안전을 보장하는 스텔스 기술은 미래 제공권 장악을 위한 핵심 요소로 받아들여졌다.
미국과 유럽, 중국, 일본 등이 F-35보다 우수한 6세대 스텔스기를 개발하는 것은 이같은 신념이 더욱 굳어지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한편에선 다른 추세도 보인다. 수십년 전에 개발된 재래식 전투기들이 여전히 일선을 누비고 있고, 판매도 순조롭다. 미국 F-15와 프랑스 라팔이 대표적이다.
전투기 판매를 둘러싼 정치적 변수와 군사적 효용성이 맞물리면서 재래식 전투기 수요가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는 평가다.
◆여전히 주목받는 F-15·라팔
세계 각국에서 개발한 재래식 전투기 가운데 무기 시장에서 수주 실적을 꾸준히 올리는 기종은 미국 보잉 F-15와 프랑스 닷소 라팔이다.
1976년에 전력화된 F-15 이글 전투기는 지금까지 약 50년간 운용된 기종이다. 미 공군이 도입한 전투기 중에서 최장 기간 쓰이는 기종이다.
처음 등장했을 때는 옛소련의 MIG-25 전투기에 맞서기 위한 제공전투기로 쓰였지만, F-15E 스트라이크 이글이 실전배치되면서부터는 지상 폭격 임무가 강조됐다.
이를 통해 최대 13t의 무장을 탑재할 수 있으며, 합동정밀직격탄(JDAM)과 레이저 유도폭탄 등 다수의 공대지 무장을 장착한다. 제공전투기가 전폭기로 변신할 수 있을 정도로 기체의 확장성이 뛰어났던 셈이다.
성능이 우수한 F-15는 미국 외에도 일본, 한국, 이스라엘, 사우디아라이비아 등에서 운용중이다. 이스라엘은 1980년대 시리아 공군과의 교전에서 56대를 격추했고, 사우디도 공중전에서 성공적인 운용 기록을 갖고 있다.
미 공군은 1차 걸프전 당시 사막의 폭풍작전에서 이라크 전투기 37대를 격추했다. F-15E는 코소보 전쟁과 이라크 전쟁, 아프간 전쟁에서 핵심 인물 은신처와 미사일 기지 등 주요 지상표적에 대한 공습에 투입됐다. 공중에서의 위협은 크지 않았던 반면 지상에 있던 표적이 많았던 전쟁의 특성상 F-15E가 활약할 공간은 많았다는 평가다.
현재 미 공군은 최신형 F-15EX를 도입하고 있다. 이글Ⅱ로도 불리는 F-15EX는 미국이 2010년대에 사우디와 카타르에 판매했던 F-15SA, F-15QA에 적용된 기술이 대거 반영된 기종이다.
지형추적레이더를 통해 매우 낮은 고도에서도 비행이 가능하도록 했다. 정밀 공격을 위해 소구경 폭탄(SDB) 16개를 탑재할 수 있다. AIM-120과 AIM-9X 공대공미사일을 다수 장착, 공중전 능력도 충실하게 갖췄다.
F-15EX는 이보다 더 발전된 전자전장비(EPAWSS)와 디지털 비행통제 시스템을 갖췄다. 무장탑재력도 강화되어 지상공격력이 증대됐다.
미 공군 외에도 이스라엘이 기존에 쓰던 F-15E에 자국산 장비를 탑재한 F-15I와 더불어 F-15EX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도 도입 의사를 밝혔다. 한국·일본은 F-15EX와 유사한 방식으로 기존 F-15의 성능개량을 추진 중이다.
프랑스어로 ‘돌풍’이란 뜻을 지닌 라팔 전투기는 프랑스 항공우주기술의 집약체로 불리는 첨단 기종이다.
라팔의 개발과정은 험난했다. 1986년에 첫 시험비행을 했지만 실전배치는 2006년에야 이뤄졌다. 냉전 종식으로 인한 군비 축소와 개발비 삭감으로 개발 기간이 늘어난 탓이었다.
처음엔 수출이 잘 이뤄지지 않았으나, 2012년 인도를 시작으로 이집트, 카타르, 크로아티아, 그리스, 인도네시아, 아랍에미리트(UAE) 등에 판매됐다.
2011년 리비아 공습과 이슬람국가(IS) 공격 과정에서 지상공격 능력 등을 검증받은 것이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라팔의 수출이 리비아를 공습했던 작전 이후부터 본격화된 것도 이같은 기류와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다.
수출이 부진했던 시기에도 닷소와 프랑스 정부가 꾸준히 투자를 진행, 성능개량을 거듭한 것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현재 최신 개량형인 라팔 F4는 네트워크 능력과 레이더 탐지 회피능력을 높였다.
최근에는 사우디와도 협상이 진행중이다. 미국과 영국산 전투기를 사용해온 사우디에 라팔이 수출된다면, 중동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이 한층 확대될 전망이다.
◆틈새시장서 영향력 넓히나
F-15와 라팔이 각광받는 것은 정치·군사적 측면에서 재래식 전투기가 활동할 ‘빈틈’이 있기 때문이다.
재정적 여력을 갖춘 국가는 스텔스기를 운용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아무리 예산이 풍족해도 중동처럼 정치적 요인으로 인해 도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서방에서 스텔스기를 대량생산하는 유일한 국가인 미국이 F-35 공급을 거부하면, 스텔스기 확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남은 방법은 기존 재래식 전투기의 성능을 최대한 높인 기종을 확보하는 것이다. 사우디, 카타르가 최신 기술이 반영된 F-15를 도입하고, UAE가 라팔을 대량 도입하기로 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F-35는 강력한 스텔스 성능을 통해 적 영공에 은밀하게 침투, 종심타격이 가능한 기종이다. 반면 스텔스 성능 유지를 위해 내부무장창에만 무장을 탑재해야 한다. 다수의 표적을 제거하는 작전에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반면 F-15와 라팔은 적 레이더에 포착될 위험을 최대한 낮추면서 침투하는 스텔스 비행은 어렵다. 대신 다수의 지상표적을 공습할 수 있는 강력한 무장탑재량을 갖추고 있다.
오랜 시간 비행하면서 폭격을 할 수 있도록 전투행동반경도 1800~1900㎞에 달한다.
현재 F-35가 필요한 항공작전은 이란, 중국, 북한 등 핵무기를 보유하거나 개발을 진행하는 국가 또는 방공망이 강력한 나라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정치·군사적 영향은 크지만 항공작전 측면에서 그 비중은 높지 않다.
반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처럼 전선과 그 후방 지역에 있는 다수의 표적을 공중 공격으로 파괴해야 하는 작전은 수요가 많다.
아프간·이라크 전쟁 당시부터 공군 작전에서 다수의 지상표적을 타격하는 임무의 비중이 증가하는 조짐을 보였는데,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같은 추세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공군이 공중전을 벌이는 것보다는 전선과 인접한 적 지상 표적을 공격하는 것이 더 눈에 띄는 상황이다.
이를 위해선 다수의 정밀유도폭탄과 미사일 등을 장착하는 능력과 오랜 시간 비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재래식 전투기가 필요하다.
라팔의 경우에는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적의 전략 표적을 타격하는 능력도 갖췄다. 바로 스칼프 장거리 공대지미사일이다.
스칼프 미사일은 최대 사거리가 550㎞가 넘는다. 다만 수출형은 250㎞로 제한되어 있다. 오차가 1m 미만일 정도로 정확도가 높다.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가 여러 차례 실전에 활용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선 우크라이나 공군 SU-24 전폭기에 탑재되어 크름반도의 러시아군 주요 시설과 함정을 잇따라 타격했다.
이는 스텔스기의 핵심 능력 중 하나인 적 내륙 지역에 대한 종심타격 능력을 재래식 전투기도 일정 부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준다.
에어버스가 제작하는 타이푼 전투기를 운용하는 사우디가 스칼프 미사일을 200발 이상 도입한 것도 종심타격력을 확보하려는 의도라는 해석이다.
재래식 전투기가 F-35나 6세대 스텔스기를 대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강력한 무장탑재량과 종심타격력, 검증된 기술적 성능을 갖춘다면 스텔스기를 확보할 수 없는 국가에는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다.
한국도 KF-21 전투기의 첫 양산이 눈앞에 다가온 상태다. F-35가 세계 전투기 시장에서 비중을 확대하고 있지만, 무장탑재량과 종류를 늘리고 공격 범위를 확대한 뒤 기술적 검증을 잘 통과한다면 ‘틈새시장’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전투기 시장을 세세히 분석하는 등의 전략 수립이 필요한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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