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의 노래가 품은 역사]
윤심덕과 김우진의 정사스토리
'신여성'에 갖은 비하와 비난
진정한 사랑에 대한 질시까지
허무주의·퇴폐적 시대 분위기 반영
1926년 8월 4일 새벽 4시.
일본 시모노세키 발 부산행 관부(關釜)연락선 ‘도쿠주마루’가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대마도를 지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순찰 승무원이 선장실로 헐레벌떡 뛰어들었다. “선장님, 일등 객실에 탔던 남녀 손님 2명이 없어졌습니다.” 배에는 비상이 걸렸다. 배는 항로를 거슬러 오르며 수색을 거듭했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실종자가 남긴 것은 ‘미안하지만 짐을 집으로 보내 주시오’라고 쓰인 객실의 메모 한 장뿐이었다. 항해 중인 여객선에서 사라진 두 사람이 갈 곳은 바다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른바 ‘현해탄’이라 불리는 대한해협의 어두운 심해로 뛰어든 것이었다.
실종된 남녀는 극작가 김우진과 배우 출신의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이었다. 이들은 서른 살의 동갑내기였다. 김우진은 이미 결혼을 했고 윤심덕은 미혼이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하여 정사(情死,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여 함께 자살하는 일)를 선택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절망한 연인, 현해탄에 몸을 던지다
이튿날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등 국내신문은 물론 일본 신문들까지 이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다음은 동아일보가 ‘현해탄 격랑 중에 청춘남녀의 정사’ 제목으로 보도한 내용이다.
“지난 3일 밤 11시에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항해하던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가 4일 오전 4시경 쓰시마섬 옆을 지날 즈음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했으나 종적을 찾지 못했다. 승객명부에 남자는 전남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30세), 여자는 경성부 서대문정 2정목 273번지 윤수선(30세)이라고 씌어 있지만 본명이 아니고, 남자는 김우진 여자는 윤심덕으로 밝혀졌다. 관부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윤심덕이 실종된 직후 그녀가 오사카에 있는 닛토레코드에서 취입한 마지막 노래 ‘사의 찬미’가 유성기에 실려 곳곳에 퍼지기 시작했다. 헝가리의 작곡가 오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에 그녀가 가사를 붙인 이 노래는 두 사람의 죽음과 이어지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무엇보다 이 노래는 사회적 유명 인사였던 두 사람의 스캔들과 결합하면서 이들의 미래를 예언한 듯한 염세 비관적 가사로 대중을 흡인하였다. 이 음반이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1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릴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신여성’ 윤심덕, 비루한 현실에 울다
윤심덕은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도쿄음악학교에서 공부한 최초의 조선인 유학생이었다. 1921년 윤심덕은 순례극단 동우회에 들어가 당시 와세다대 영문과를 다니고 있던 목포 최고 갑부의 아들 김우진을 만났고, 조선에서 두 달여 순회공연을 하면서 가까워졌다.
도쿄 유학 시절 그녀는 한국 유학생 남자들과 어울리며 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홍난파, 채동선 등이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으며 박정식이란 유학생은 윤심덕에게 구애했다가 거절당하고 상사병에 걸려 정신분열증에까지 이르렀다. 영화 ‘윤심덕’에서 이순재가 맡은 역할이 이 박정식이다.
1923년 귀국한 윤심덕은 일약 스타가 되었다. 귀국 후 소프라노 가수로 처음 오른 무대부터 대중들의 주목을 받은 윤심덕의 공연은 매번 큰 이슈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녀를 향해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정통음악만 해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강사생활과 함께 상대적으로 대중성이 있는 세미클래식으로 방향을 선회하기도 했다. 한때 극단 토월회의 주역배우로 무대에 서기도 했으나 연기력 부족으로 실패하였다. 성악 발성을 기본으로 한 목소리 때문에 대사 전달력이 떨어진 탓이다.
이 현실과의 타협 이후, 윤심덕은 각종 스캔들에 시달려야 했다. “윤심덕이 남동생 유학 자금 마련을 위해서 당시 경성의 한량 이용문에게 600원을 뜯어내었다. 이 때문에 윤심덕이 이용문의 첩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온 나라에 파다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그녀는 1924년 하얼빈으로 가서 1년 정도 지내다가 소문이 잠잠해지자 다시 경성으로 왔다.
1925년 잡지 ‘신여성’ 3월호에 그녀의 행실을 강하게 비난하는 글이 실린다.
“윤 씨의 이번 행동은 타락한 행동이다. 예술가면 예술가, 사업가면 사업가, 가정부인이면 가정부인, 교육가면 교육가, 직업 부인이면 직업 부인으로 똑똑히 사람이 좀 되어 갑시다. 윤 씨야! 기왕 국외로 갔다는 소문이 있으니 거기서 태평연월이나 노래하면서 건강히 일생을 지내라. 누구나 그대 보기를 원치 않을테니…”
윤심덕이 직접 부른 '사의 찬미'
윤심덕-김우진이 죽음을 가장했다?
1926년 윤심덕은 닛토레코드의 음반 취입 의뢰를 받아 일본으로 갔다.
음반 취입을 마친 윤심덕은 사장에게 특별히 한 곡을 더 녹음하고 싶다고 했다. 그 노래가 바로 ‘사의 찬미’였다. 윤심덕은 김우진에게 오사카로 오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내용의 전보를 쳤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8월 3일 관부연락선에 함께 올랐다. 그리고 그것이 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끝이었다.
두 사람의 정사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당시 분명한 사실은 다음의 세 가지 뿐이었다.
① 8월 3일 윤심덕과 김우진이 일본에서 같은 배를 탔다는 것.
② 8월 4일 새벽 대마도를 지날 무렵, 선실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고 사람은 없고 가방만 있었다는 것.
③ 이후 승객명부를 대조해서 확인해보니 윤심덕과 김우진이 없어졌다는 것.
유서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두 사람이 바다에 투신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도 없었다. 당연히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다.
‘사의 찬미의 음반 판매를 위해 레코드사와 짜고 죽음을 가장했다’라는 이야기가 인구에 회자됐다. 또 안 죽고 유럽으로 도피했다는 소문도 신빙성 있게 돌았다. 구체적으로는 ‘당시 배에 탔던 선원을 매수해서 자살했다고 꾸민 것이며,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인으로 위장하고 유럽에 갔다’는 것이다. ‘사의 찬미’ 음반이 꾸준히 팔리는 것만큼 소문도 꾸준히 늘어만 갔다.
1931년, ‘이탈리아에서 잡화점을 하는 동양인 부부가 있는데, 이들이 김우진과 윤심덕이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간판 이름부터 구체적인 지명 등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이에 김우진의 동생은 당시 총독부를 통하여 주이탈리아 일본대사관에 확인을 요청했다. 결과는 '로마에는 그러한 사람이 없으며, 앞으로도 계속 찾아보겠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1934년에는 자칭 김옥균의 손자라는 이가 나타나서, 자신이 이탈리아에서 머물 때 로마에서 악기상을 하는 김우진과 윤심덕 부부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에 김우진의 동생은 다시 총독부에 확인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이 김옥균 손자를 자칭하는 이가 거짓말을 했음이 밝혀졌다.
윤심덕… 나혜석… ‘신여성’의 등장
1920년대는 비관과 퇴폐적 정서가 지배적인 시대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의 실패가 지식인과 문인들을 좌절케 했고, 그들은 낭만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져들었다. 일본 경제도 1차대전 전후 공황에 빠져 있었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지식인들도 ‘고등룸펜’으로 살아가야 했던 암울한 시절이었다.
식민지라는 고통스러운 경험 외에도 '세계'라는 무대에 완전히 노출된 것이 우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때까지 '닫힌 세계'에서 살아왔던 이 땅의 사람들에게 '열린 세계'는 혼란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속에서 여성들도 일대 가치관의 변화를 겪게 된다. 우리가 20세기 초반 신식교육을 받은 여성들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말, ‘신여성’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192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신여성은 서양화가 나혜석을 필두로 하여 승려시인 김일엽, 최초의 여성 소설가 김명순 등의 여성 작가군과 음악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낸 윤심덕이 대표적 인물이다.
윤심덕과 김우진이 선택한 죽음은 바로 그러한 시대적 절망과 비관의 정서와 이어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당대의 윤리와 도덕을 뛰어넘지 못한 식민지 치하의 지식인들이 자신들이 한 사랑에 대한 진정성을 확인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동반자살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윤심덕 사건 3년 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기생 강명화와 경북 칠곡의 대부호 장길상(해방 후 수도경찰청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의 형)의 아들 장병천의 정사가 이들의 선택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명월관 권번 기생 강명화와 결혼하려 했던 장병천은 집안의 반대로 좌절했다. 1923년 6월 온양온천에서 강명화가 먼저 음독자살하자, 장병천은 한 차례 음독에 실패한 뒤 10월에 강명화가 선택했던 방법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문희-장미희-윤석화가 연기한 ‘윤심덕’
‘윤심덕 사건’은 영화로, 연극으로, 뮤지컬로 많이 만들어졌다. 문희, 장미희, 윤석화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그녀를 연기했다.
최초의 영화화는 1969년 안현철 감독의 ‘윤심덕’이다. 문희-신성일이 주연으로 각각 윤심덕과 김우진 역을 맡았으며 이순재, 백영민, 주증녀, 한은진 등이 조연으로 출연했다. 영화는 김우진과 윤심덕 두 사람의 만남에서부터 현해탄에서 뛰어내리는 장면까지를 담고 있다.

이후 1991년에는 김호선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장미희-임성민이 주연을 맡은 ‘사의 찬미’가 만들어졌다. 윤심덕 역을 맡은 장미희는 이 작품으로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김우진 역을 맡은 임성민은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연기파 배우 이경영이 홍난파 역을 소화했고, 2018년 3월 ‘미투’ 여파로 목숨을 끊은 조민기가 김우진의 친구인 홍해성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조민기의 데뷔작이다.
연극 및 뮤지컬화는 1988년 윤대성에 의해서 ‘사의 찬미’로 희곡화 되어 극단 실험극장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1990년에 뮤지컬로 재공연 되었으며, 2005년 공연에는 가수 바다가 윤심덕 역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2년에는 윤석화 주연의 ‘글루미데이’라는 뮤지컬에서 윤심덕과 김우진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팩션을 담아내기도 하였다. 이 뮤지컬은 2015년 '사의 찬미'로 이름을 바꾸어 재연되었다.
노래 역시 후배들에 의해 계속 불려졌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들인 이미자, 문주란, 정종숙, 한영애, 김정호, , 김상희, 주현미, 나윤선 등이 ‘사의 찬미’를 자신들만의 감정과 느낌으로 재해석해 불렀다.
유튜브를 통해 모든 노래를 들어 본 결과, 필자 개인적으로는 재즈가수 나윤선의 ‘사의 찬미’가 윤심덕의 원곡 분위기와 감성을 가장 잘 살렸다는 생각이다. KBS ‘불후의 명곡’에서 뮤지컬 배우 민우혁이 부른 ‘사의 찬미’도 절창이라 할 만하다.
나윤선이 부르는 '사의 찬미'
현실이 된 “넥타이, 죽어도 사와요?”
윤심덕과 절친한 사이였던 극작가 이서구가 일본으로 음반을 취입하러 가는 그녀를 경성역으로 마중을 나갔었는데 이 때 나누었던 대화가 참 의미심장하다.
윤심덕 “선물로 뭘 사다드릴까요?”
이서구 “넥타이나 하나 사다줘요”
윤심덕 “죽어도 사와요?”
이서구 “그래, 죽으려거든 넥타이나 사서 부치고 죽어요”
물론 이서구가 윤심덕에게 한 말은 당연히 농담으로 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서구가 사달라고 했던 넥타이는 윤심덕이 죽었다는 비보가 들려온 지 3일 후에 도착했다. 이서구는 이 파란 넥타이를 차마 목에 맬 수 없어 죽을 때까지 고이 간직했다고 한다.
이영훈 가요연구가는 국제신문, 동아일보 등에서 신문기자로 20여 년간 근무하다 방송으로 옮겨 10년째 기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채널A 보도본부에 근무하면서 메인뉴스 편집데스크와 디지털뉴스부장을 지냈고 쾌도난마, 뉴스톱텐 등 여러 시사 프로그램의 제작데스크로 일해 왔다. 보도본부 선임기자를 거쳐 현재는 심의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한국정치, 바람만이 아는 대답>, <유행가는 역사다>, <그 노래는 왜 금지곡이 되었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