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나의 묘비명은?

요즘은 화장 후 수목장과 산파 등으로 묘비를 설치하는 경우가 드물다. 하지만 죽은 사람을 기릴 목적으로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던 시절이 있었다. 특별히 시대를 앞서간 성현들의 묘비에 새겨진 명문(名文)에서 우리는 그들의 삶을 반추하며 지혜와 교훈을 얻게 된다.
인상파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화가 모파상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고 말이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천상병 시인의 묘비에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라고 쓰여있다. 짧지만 강렬한 울림을 주는 ‘귀천’의 일부이기도 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말과 같이 세상에 유익함을 주고 떠난 많은 성현들은 이름뿐 아니라 묘비명을 통해서도 삶의 가르침을 선사하며 생을 마감했다.
물론 운명하기 전, 묘비명을 어떻게 해 달라고 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사후에 그들의 삶을 기억하는 과정에서 살아온 궤적을 대표할 수 있는 훌륭한 글로 포장되었을 수도 있다.
성현들의 묘비명을 떠올릴 때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삶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세상의 부귀와 권력만을 위해 달리는 인생이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지 말고 주어진 삶에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
인간에게 꿈과 희망이 없다면 한낱 동물에 지나지 않겠지만, 지나친 꿈과 야망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그르치는 경우도 종종 목격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죽음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기도 한다. 앞만 보고 달릴 수밖에 없는 각박한 현실 속에서의 삶이지만, 지금 처한 삶에 순응하며 감사할 줄 아는 삶이라면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도 겸허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에는 ‘우물쭈물 살다가 이렇게 끝날 줄 알았지’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좀 더 적극적으로 살지 못한 삶을 후회하는 경우일 것이다. ‘나는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2003년 세상을 떠난 경기도 안성 출신 조병화 시인의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묘비명이다.
네덜란드의 교육가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는 ‘모든 일을 남을 위해 했을 뿐 그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라고 쓰여있다. 지난 시간을 후회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베푼 선행을 자랑스러워하는 경우일 수도 있다.
종교를 갖는 것은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겸손함’을 배우기 위한 과정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한 이유도 세상 사는 동안 ‘겸손’을 통한 자기반성의 삶을 촉구한 것이리라. 맹자가 인간이 지녀야 할 마음가짐으로,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겸양지심(謙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 가운데 ‘겸손’을 우선으로 꼽은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다. ‘할 말은 해야 한다. 말은 씹어야 맛’이라는 말도 한다. 둘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결코 ‘말하지 않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배려하는 마음으로의 ‘침묵’이야말로 촌철살인(寸鐵殺人) 성현들의 묘비명을 통해 얻어지는 참 교훈이다. 결국 성현들의 묘비명은 죽은 이들의 외침이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를 향해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이다.
우리 삶 가운데 피할 수 없는 것 세가지, ‘죽음’과 ‘세금’ 그리고 ‘외로움’이라고 한다. 결코 빗겨나갈 수 없는 죽음이라는 명제 앞에서 ‘나의 묘비명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세상 떠나기 전 나의 묘비명은 과연 뭐라고 써 놓아야 할까? 내가 죽은 후 나의 묘비명을 뭐라고 써 줄까?
/김한섭 광주문화원 부원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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