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라는 선발투수가 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우투수인 그는 직구(포심), 투심, 커터, 슬라이더, 체인지업, 커브를 던질 줄 압니다.
A는 지난 등판에서 우타자가 많은 ‘右’라는 팀을 상대했습니다.
100개의 공을 던지면서 직구 25개, 투심 20개, 슬라이더 34개, 체인지업 15개, 커브 6개를 던졌습니다. 결과는 6이닝 4실점을 기록했습니다.
5일 동안의 휴식이 있었고 다음 만나는 팀은 좌타자가 라인업에 7명을 차지하고 있는 ‘左’였습니다. 그는 짝을 이루는 주전포수 B와 함께 ‘左’팀의 공략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전력분석을 하면서 A가 먼저 B에게 제안했습니다.
“좌타자 상대로는 커터를 몸쪽으로 주로 구사를 할게요. 그리고 아무래도 슬라이더보다는 체인지업의 비중을 늘려야할 것 같아요.”
고개를 끄덕인 B도 한가지를 말했습니다.
“지난 경기에서는 커브의 비중이 너무 적었어. 3회부터 하위 타순을 상대로는 2스트라이크 이전에 커브 구사 비율을 좀 늘려도 되지 않을까?”
A는 B의 이야기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겠다고 생각을 했고 이어지는 ‘左’팀과의 경기 선발등판에서 이를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그는 100개의 공을 던졌는데 빠른 공 계열로는 직구 20개, 커터 25개, 투심 5개를 던졌고, 슬라이더 10개, 커브 15개에 체인지업 25개를 구사하면서 6이닝을 1실점으로 버텼습니다.

이 경기를 중계했던 C 해설위원은 그의 좋은 투구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지난 등판의 ‘피칭 디자인’에 변화를 주고 나왔습니다. 오늘 새로 들고 나온 ‘피칭 디자인’으로 ‘左’팀을 상대하면서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캐스터 D도 거들었습니다.
“역시 투수의 ‘피칭 디자인’의 변화는 매우 중요하네요.”
여기서 중계진이 사용한 ‘피칭 디자인’이라는 말은 과연 맞는 말일까요?
답은 맞으면서도 틀립니다.
‘피칭 디자인’은 그냥 단순하게 ‘구종의 구사 비율’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저는 시청자 여러분을 가르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습니다.
그래도 제가 하는 중계방송이라는 일에 있어서 용어만큼은 제대로 전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분명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피칭 디자인'을 정의하면 이렇습니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구종을 개발하는 것을 넘어, 기존 구종의 질을 높이고 타자가 구종을 쉽게 파악하지 못하도록 전략적 투구를 하는 것을 의미함.
즉, ‘피칭 디자인’은 반드시 ‘측정’을 포함해야 합니다. 여기서 최근 야구를 포함한 모든 스포츠 분야에서 중요하게 등장하고 있는 ‘바이오 메카닉’의 개념이 나옵니다.
'피칭 디자인'의 과정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 PTS, 트랙맨, 호크아이, 랩소도 등. 각종 측정 기기를 통해 투수가 던진 공의 구속, 움직임, 회전수, 회전축 등을 파악합니다.
- 초고속 카메라를 포함한 다양한 영상 기기를 사용해서 투구 동작을 촬영한 후 동작을 분석합니다. (이 영상 기기 중 가장 널리 알려지고 국내에도 2020년대 초반 많은 구단에 도입된 상표가 ‘저스틴 벌랜더를 살린 초고속 카메라’라는 별명이 붙은 에저트로닉(Edgertronic)입니다.)
- 초고속 카메라를 통해 투구의 느린 동작을 분석한 후 타자에게 더 위력적인 공을 던지기 위한 동작의 변화, 위력을 더하기 위한 구종의 조합 등을 제안합니다.
- 투수는 그에 따른 변화 이후 다시 투구를 하고 또 측정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고 반복하면서 한 투수가 최적의 투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모든 과정을 ‘피칭 디자인’ 혹은 ‘피치 디자인’이라고 합니다.
‘피칭 디자인’은 매우 광범위한 개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투수의 모든 훈련과 변화의 과정이 피칭 디자인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일기 쓰기’도 아주 중요한 피칭 디자인입니다.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구MBC에서 라디오 해설을 하는 송민구 해설위원은
“피칭 디자인의 가장 기본은 투구 일지를 작성하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

첨단 기기의 도움을 받아 코칭 그룹과 의사소통을 거쳐 훈련을 하고, 변화를 주고, 그런 훈련의 과정을 기록하는 것 등. 투수가 투구를 준비하는 모든 과정이 피칭 디자인입니다.
볼 배합에 변화를 주는 것도 넓은 의미로 봤을 때는 피칭 디자인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겠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측정’과 ‘관찰’이 통째로 생략된 이야기로 '피칭 디자인'이 아닙니다.
위에 예를 든 캐스터D와 해설 위원 C는 '피칭 디자인'이 풍기는 단어의 뉘앙스가 '구종의 구사 비율'일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었던 겁니다.
‘볼 배합’이나 ‘구종 구사 비율’ 보다 ‘피칭 디자인’이 듣는 사람들에게 뭔가 더 전문가처럼 보이고 그럴 듯 하거든요. 그래서 엉뚱한 데에 저 단어를 쓰고 있는 겁니다.
그럼 한 투수의 '구종 구사 비율'로 뭐를 쓰나요? 무기 혹은 무기고를 뜻하는 ‘아스널(arsenal)’을 씁니다.
북 런던의 축구팀, 손흥민 선수가 소속된 토트넘의 북 런던 더비 라이벌 팀인 '아스널'과 같은 철자 'arsenal'맞습니다.

한 투수가 가진 구종과 구사 비율, 각 구종의 속도를 모두 포함해서 ‘피치 아스널’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피치 아스널이라는 용어가 맞는 말이라고 해서
“A투수는 오늘 지난 경기와는 다른 피치 아스널을 들고 나왔네요.”
이건 자막이 받쳐주지 않는 한 우리 중계 언어로 안 어울릴 것 같습니다. 물론 계속 들으면 익숙해져서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요.
"체인지업 비중을 늘렸네요. 투포수가 지난 경기와는 다른 볼 배합을 하고 있어요."
"커브를 많이 쓰네요. A투수가 지난 등판과 비교해서 구종의 구사 비율을 바꿨군요."
하던 대로 그냥 이러면 간단합니다.
<SBS스포츠 정우영 캐스터>
'피칭 디자인'을 정의하는데 있어서 아래 기사를 참고 했습니다.
각각 2021년과 2019년의 기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