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우리가 등대…" 장학재단 세운 '누명 쓴 피해자들'
'재심 전문' 박준영 변호사와 '등대장학회' 설립
교육비·생활비·주거비 등 지원
"밤바다 비추는 등처럼, 아이들 희망 되길"
가난한 어머니와 아이들은 지난 두 달간 모텔에 몸을 맡겼다. 이혼한 아버지는 양육비를 보내지 않았고, 어머니는 건강 악화로 일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생활비가 끊겼다.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맏이가 하루하루 숙박비를 내며 버텼다.
딱한 사정을 알게 된 담임교사가 지난 12일 새벽 재단법인 '등대장학회'에 메일을 보내왔다. 주택 보증금 70만원과 밀린 가스요금 62만원, 여기에 가재도구와 생필품을 지원해 이 가족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등대장학회는 '낙동강변 살인사건' 등 억울한 옥살이를 한 피해자들과 이들을 도왔던 박준영 변호사가 함께 설립한 공익재단이다.
그날 아침 곧장 박 변호사가 장학회 단체 대화방에 이들의 사정을 소개했다. 그러자 "우리 등대장학회가 이 가정에 불빛을 비춰줬으면 합니다" "한참 예민할 나이의 학생들이 주변 시선에 신경쓰면서 모텔을 드나들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요"라는 의견이 뒤따랐다.
안건을 제안한 지 2시간 만에 등대장학회는 지원을 결정했다. 박 변호사는 "아이들의 담임교사가 적극 나서서 필요성을 강조한데다, 하루라도 빨리 아이들을 모텔에서 나오게 하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급하게 주거지원을 했다"며 "위기 가정의 아이들을 돕는 것이 등대장학회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억울한 옥살이 21년, 나 대신 딸 키워줬듯이"
등대장학회는 어두운 밤바다에서 길잡이가 되는 등대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생들을 돕기 위해 설립됐다. 현재 학생 20여명에게 매달 약 600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교육비뿐 아니라 생활비, 주거비, 의료비도 지원한다.
과거 수사기관으로부터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한 피해자들이 힘을 모았다. 이른바 '낙동강변 살인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옥살이를 했던 장동익씨와 최인철씨를 비롯해 '이춘재 8차 사건'의 윤성여씨, '삼례 나라슈퍼 사건'의 최성자씨,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최모군 등이 재심을 통해 국가로부터 받은 형사보상금과 손해배상금을 보탰다.
초대 이사장은 장동익씨가 맡고 있다. 장씨는 최씨와 함께 1991년 낙동강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21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사건 발생 30여년 만에 진행된 재심 청구에서 장씨는 "21년 5개월 20일을 복역하고 나오니 두 살이던 딸이 스물 네살이 됐고, 그 후 딸이 출산한 손녀를 보듬을 때 (수감 전 안아봤던) 딸을 보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고 진술했다.
장씨는 아버지이자 가장이었던 자신의 빈 자리를 대신해 우리 사회가 딸을 키웠다고 생각한다. 장씨는 "아버지가 없던 어린 딸이 스스로 힘으로만 공부를 하고 성인이 될 수 있겠느냐"라며 "분명 우리 딸도 사회 곳곳에서 보이지 않는 도움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에, 나 또한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장학회를 만드는 데 동의했다"고 말했다.
등대장학회는 장학금 지원 대상을 공개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가난한 사람으로 낙인 찍혀 상처받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다. 교사가 도움이 필요한 학생을 장학회에 알리면 되고, 학교 내 행정절차는 거치지 않아도 된다. 장학금을 받았다는 인증 사진도 당연히 반대한다.
장씨는 "우리가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면 바르게 성장할 수 있는 학생들이 많다"라며 "그런 학생들이 성인이 되면 우리 세상도 조금 더 나은 쪽으로 변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등대장학회 이사로 활동중인 박 변호사는 "소설 <몽실언니>의 저자 권정생 선생은 '슬픔을 모르는 아이는 좋은 어른으로 자라기 힘들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 아이는 좋은 어른이 될 수 없다'고 했다"며 "자신의 삶을 통해 슬픔을 경험한 아이들이 잘 성장해 준다면 우리 사회의 소외된 곳의 빛이 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더 힘든 학생들 도와달라"…'재심 밖 세상' 배운다
박 변호사는 최근 형사사법시스템 밖에 있는 세상을 배우고 있다. '재심 전문'으로 불릴 만큼 억울한 피해자를 도우면서 힘든 이들의 현실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도, 어려운 가정을 만날 때마다 현실의 고통과는 거리를 두고 살아왔다는 것을 느낀다.
학생의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된 한 교사로부터 장학금 신청이 접수됐던 한 가정은 오히려 "더 어려운 가정을 도와달라"며 사양했다. 반지하 방에서 아이들과 지내는 이 가정은 등대장학회에 "우리는 꿋꿋하게 살아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발달장애 아이를 키우는 한 이주여성 어머니는 발달장애가 있는 둘째 아이의 장애검사 비용을 지원하겠다는 등대장학회의 제안을 한사코 사양했다. 한부모 가정인데다 첫째 아이 역시 장학회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는 상황인데, 어머니는 일터에서 버는 돈으로 스스로 해결해보겠다고 했다.
박 변호사는 "어려운 사람들을 변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장학회 활동을 해보니 지금껏 형사사법시스템 안에서 벌어진 불이익 일부만을 대변했던 것 같다. 어려운 가정을 만날 때면 '어떻게 살아왔느냐'는 철없는 물음이 삐져나온다"라며 "장학회 활동을 하며 받은 충격과 아픔에는 흔히 통용되는 가난에 대한 인식이나 이미지와 다른 삶의 통찰과 지혜가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등대장학회는 더 많은 학생들을 돕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상근직원과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장학회 실무는 박 변호사와 장씨가 직접 챙긴다.
10평 남짓한 사무실 임대료 70만원 역시 장학회와 박 변호사가 절반씩 부담하고 있다. 형식적으로 만든 법인카드는 박 변호사가 실무를 맡은 지난 7월 이후로는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올해 4월에는 이춘재 8차 사건의 피해자 윤성여씨와 함께 4580만원을 장학회에 후원하기도 했다. 한 영화사가 윤씨 사건을 모티브로 영화를 제작하면서 지급한 비용을 모두 장학회에 후원한 것이다.
박 변호사는 억울한 사람들에게 재심이 마지막 희망이듯이, 기댈 곳 없는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에게 등대장학회가 희망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박 변호사는 "억울한 피해자를 직접 찾아가 재심을 지원한 경우도 있었다. 신청을 기다리지만 않겠다"며 "차상위 계층 등 제도권 지원이 부족한 복지 사각지대를 주목하고 있고, 우리의 진정성에 공감하는 후원자들이 많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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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정성욱 기자 wk@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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