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풍에 흔들리는 원화…유로는 둘째치고 루피보다도 취약한 이유는?
인도 루피·브라질 헤알화에도 밀려
수출의존도 높아 대외 충격에 취약
대규모 무역적자는 원화 약세 요인
미국이 기준금리를 인상하기 시작한 지난해 3월 이후 원·달러 환율이 큰 폭으로 오르내리는 이른바 ‘널뛰기 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결정과 추가 긴축 예고에 따라 달러화가 번갈아 강세와 약세를 보이면서 원화 가치도 요동쳤다.
문제는 원화 가치가 지난달만 놓고 보면 일본 엔화나 유로화 등 주요국의 통화는 물론 브라질 헤알화 등 신흥국 통화보다 더 크게 하락했다는 점이다. 강(强)달러 현상은 모든 통화에 영향을 미치는데, 원화는 유독 맥을 못 추는 모습이다. 외환시장 전문가들은 연준의 긴축 행보는 물론, 수출 악화로 1년 넘게 지속된 무역수지 적자, 외국인 투자자의 움직임 등이 환율 변동성을 키우고 있다고 지적한다.
◇ 2월 원화 하락폭, 러시아 루블화 이어 주요국 중 2번째
17일 외환시장에 따르면 원화값은 올 들어서도 달러화가 움직일 때마다 출렁였다. 지난달 연준이 3월에 기준금리를 한 번에 0.5%포인트(p) 인상하는 ‘빅스텝’에 나설 것이란 전망에 힘이 실리면서 달러화가 강세를 보이자, 원·달러 환율이 1220원대에서 1320원대까지 한 달 사이 약 100원 뛰었다. 반대로 지난주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으로 연준의 3월 빅스텝 기대감이 후퇴하고, 이에 따라 달러화가 약세로 돌아서자 환율도 지난 13일 하루 사이 22원 이상 급락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연준의 긴축 우려가 되살아났던 지난달 1일부터 이달 8일까지 원화 가치는 6.8% 하락했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는 같은 기간 3.5% 올랐다. 달러화 가치 상승폭보다 원화 가치 하락폭이 더 컸다. 전규연 하나증권 연구원은 “(이 기간) 달러 절상폭을 적용할 경우 원·달러 환율의 적정 수준은 1275원 내외”라며 “원화가 달러화 움직임보다 과도하게 등락하고 있다”고 했다.
원화는 주요 선진국은 물론 신흥국 통화와 비교해도 하락세가 가팔랐다. 일본 엔화(-5.3%), 유로화(-3.0%), 영국 파운드화(-3.9%), 중국 위안화(-2.9%), 인도 루피(-0.1%), 인도네시아 루피아(-2.5%), 남아프리카공화국 란드화(-6.3%) 등에 비해 크게 떨어졌다.
지난달 원화보다 약세를 보인 통화는 러시아 루블화 뿐이었다. 루블화는 이 기간 7.7% 절하됐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 러시아가 서방의 경제 제재를 받고 있다는 특수성을 감안하면 루블화가 원화와 비교해 두드러지게 약세를 보였다고 해석하기 어렵다.
◇ 대규모 무역적자에 원화 약세 압력 강화
원화가 대외 충격에 취약한 이유는 복합적이다. 시장 전문가들은 누적된 무역수지 적자, 자본시장의 높은 개방도, 연준의 긴축 행보, 한국은행의 통화정책, 한·미 정책금리 격차 등의 요인이 맞물리면서 지난달 국내 외환시장 변동성이 더 커졌다고 분석했다.
특히 우리나라 무역수지가 12개월 연속 적자를 지속하면서 경제 전망이 어두워진 점이 원화 가치를 끌어내린 대표 요인으로 꼽힌다. 지난해 연간 무역적자는 477억8500만달러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수출이 부진한 영향이 컸다.
올 들어 지난 10일까지 누적 무역적자는 227억7500만달러로, 벌써 지난해 전체 적자액의 절반에 달했다. 무역적자 규모가 커지면서 한 국가의 살림살이를 보여주는 경상수지마저 올해 1월 45억2000만달러 적자로 돌아섰다. 그간 경상수지 흑자로 벌어들인 달러가 원화 가치를 지탱했는데, 경상수지 적자로 국내로 들어오는 달러보다 나가는 돈이 많아지면 원화는 약세 압력을 받게 된다.
백석현 신한은행 이코노미스트는 “한국은 반도체, 자동차 등 제조업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인데, 제조업 경기는 글로벌 경기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며 “그래서 지금처럼 경기 둔화 전망이 우세해지면 원화 가치도 크게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35%로 주요 선진국인 일본(12.7%), 영국(14.7%), 미국(7.6%)보다 높다.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대만의 수출의존도가 57%로 우리나라보다 높은데, 같은 기간 환율 변동성은 0.34%로 더 작았다. 강달러가 기승을 부렸던 지난해에도 원·달러 환율이 연평균 12.9% 상승하는 동안 대만 환율은 6.8% 오르는 데 그쳤다. 그 여파로 우리나라 1인당 국민총소득이 20년 만에 대만에 추월 당하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지난해 대규모 무역적자를 기록하는 동안 대만은 519억달러 무역수지 흑자를 낸 데다, 대만의 외환시장 개입 규모가 더 컸기 때문이다.
외환시장 한 관계자는 “대만은 고정 환율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인위적으로 환율 변동성을 관리하는 측면이 있고 자본 규제도 심한 편”이라고 했다.
◇ 외국인 주식·채권 투자 흐름, 원화 변동성 키워
우리나라의 주식·채권시장의 개방도가 높은 데 비해 상대적으로 외환시장 규모가 작다는 점도 환율에 영향을 미쳤다는 의견이 나온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원화 가치가 인도 루피화, 인도네시아 루피아화, 브라질 헤알화 등보다 크게 하락한 이유에 대해 “한국이 이들 신흥국보다 자본시장 개방도가 높기 때문에 환율이 자금흐름이나 시장 기대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변동성이 커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연준의 긴축 전망이 바뀔 때마다 외국인이 국내 주식이나 채권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원화 가치도 오르내리고 있다는 의미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한국은 소위 신흥국으로 분류되는 국가 중에서 대외 개방도가 높은 편이라 자금 유출입이 자유롭다”며 “준기축통화로 분류되는 엔화, 유로화 등의 경우 시장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어느 한 요인에 좌우되지 않는데, 한국은 외국인 자금이 증시나 채권시장에 이탈하면 그 과정에서 외국인 환전 물량이 원화 변동성에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이밖에 지난달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동결로 한·미 기준금리 격차가 더 벌어지고, 이에 따라 외국인의 자본시장 이탈이 가속화할 것이란 우려가 원화 약세를 부추겼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SVB 붕괴가 일어나기 전인) 지난달에는 한국은행이 더 이상 금리를 인상하지 않을 것이란 신호를 보냈다”며 “한·미 정책금리 격차가 외환시장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원화가 다른 통화에 비해 유독 더 약세를 보였다”고 했다.
백석현 이코노미스트도 “최근 SVB 파산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 약세가 두드러졌던 통화는 원화와 호주 달러화, 엔화였다”며 “모두 금리 인상을 하다가 최근에 동결로 전환했거나 일본처럼 아예 완화 기조를 유지했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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