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자락에 숨은 치유의 정원
건축과 자연이 감각을 깨우는 공간
‘나’를 마주하는 조용한 사유의 시간

한 재벌 회장이 세상과 단절한 채 혼자 머물렀다는 그곳, 드라마 <눈물의 여왕> 속에 잠시 등장했던 장면은 오히려 현실보다 덜했다.
팔공산 깊은 능선 아래 자리한 사유원은 말 그대로, 세상과 나 사이의 벽을 걷어내고, 본래의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공간이다.
소리 없는 자연과 간결한 건축이 어우러지는 풍경,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내면 깊은 곳의 감정과 마주한다.
그곳은 단순한 정원도, 수목원도 아니며, 그저 예쁜 산책로로 치부되기엔 너무도 정제되고 고요한 진심이 깃든 ‘사유의 정원’이다.
사유원의 시작, 바위 하나에서 출발한 사색의 기록
사유원의 시작은 거창하지 않았다. TC태창 회장이 평생을 아끼던 바위 하나에서 시작된 이곳은, 애초에 외부에 공개할 계획조차 없던 철저한 사유지였다.

그러나 주변인들의 끊임없는 권유 끝에 2021년부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고, 지금은 사전 예약을 통해 일반인들에게도 한 발짝 문을 내어준다.
70만㎡에 이르는 넓은 대지에는 소사나무, 모과나무, 배롱나무, 소나무 등 회장의 오랜 취향이 담긴 식물들이 층을 이루며 자리하고 있고, 108그루의 모과나무가 중심에 모여 독특한 레이어를 형성한 ‘풍설기천년’은 사유원의 심장부이자 가장 많은 이들이 발길을 멈추는 공간이다.
계곡 물소리를 따라 이어진 길 위에는 고풍스러운 소나무와 바위 컬렉션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유원’이 펼쳐지며,
200년 넘은 배롱나무가 붉은 꽃을 피워 올리는 ‘별유동천’에서는 마치 시간의 층을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공간을 감싸는 건축, 감정을 흔드는 침묵의 언어
사유원이 특별한 이유는 자연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다.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세계적 건축가 알바로 시자를 비롯해, 승효상, 최욱, 박창렬 등 국내외 거장들이 의기투합한 건축물들이 이곳을 감싸고 있다.

그들이 빚어낸 ‘소요헌’, ‘명정’, ‘첨단’, ‘가가빈빈’ 같은 공간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고스란히 품어내는 하나의 언어이자 작품이다.
거친 콘크리트와 붉은 철판, 직선과 곡선의 교차가 만들어내는 묵직한 분위기는 눈으로 보기보다 몸으로 느껴야만 그 진가를 안다.
계절과 빛, 바람이 들어서는 틈까지 고려해 설계된 공간들은 누군가의 침묵, 혹은 잊고 있던 감정들을 조용히 깨워준다.
건축은 이곳에서 단순한 형태가 아니라, 사유를 유도하는 틀이며, 그 자체로 자연과의 대화가 된다.
절기와 호흡하는 길, 사계가 머무는 풍경
사유원은 언제 가도 다르다. 봄이면 모과나무 꽃이 산뜻한 향기를 전하고, 여름이면 백일홍이 붉게 터지며, 고송길은 계절에 상관없이 늘 푸른 빛으로 사람들을 맞이한다.

백일홍길, 목련길, 모과길, 고송길로 이어진 테마 산책로는 절기마다 풍경이 바뀌며, 그에 따라 걷는 이의 감정선도 달라진다.
바람이 지나가며 나뭇잎을 흔들고, 멀리 산새가 울고, 작은 건축물의 그림자가 발끝에 닿을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걷기를 멈춘다.
사유원은 단지 ‘예쁜 곳’이 아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내 안의 소음을 비우고, 이따금 자신이 잊고 있던 본연의 감정과 마주하게 된다.
관람은 사전 예약을 통해 이뤄지며, 군위군 부계면 치산효령로 1176, 팔공산의 깊숙한 지점에 위치한 이 정원은 오늘도 조용히 다음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도심의 빠른 시간과 감정 없는 공간에 지쳐 있다면, 사유원은 분명 다른 감각으로 당신을 깨워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깊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그곳, 사유원은 오늘도 누군가의 내면을 부드럽게 두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