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RA 단맛 끝나나? 대미 투자 기업 ‘숨 고르기’

김다은 기자 2024. 10. 4.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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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시행 후 미국에 가장 많은 투자 프로젝트를 진행한 나라다. 미국 대선 등 정치·경제적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기업들 역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3월6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2024 인터배터리’에 참석한 관계자들이 미국 부스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올해 미국 대선을 앞두고 기업들이 가장 주목하는 사안은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 추진했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와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칩스법)’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에너지 및 기후 정책인 IRA는 2022년 8월부터 발효돼 이제 2년을 맞았다. 전기차·배터리·에너지 등을 미국 현지에서 생산하는 업체를 대상으로 보조금을 지급한다. 칩스법은 배터리나 태양광에너지 등 첨단 제조 기술을 이용해 친환경 제품을 생산할 경우 보조금 및 세액공제 혜택을 준다. 바이든 정부는 이들 법을 근거로 지금까지 약 4000억 달러(약 533조원) 규모의 세액공제와 대출 및 보조금을 제공해왔고, 이런 기회를 발판 삼아 세계 각국의 글로벌 기업들은 잇따라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한국 기업들 역시 마찬가지다. SK온,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등 국내 배터리 3사는 적극적으로 현지 투자에 나서 점유율을 크게 늘렸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미국 배터리 시장 점유율은 42.2%로 1위를 기록했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 골드만삭스는 2025년 이 수치가 55%로 올라갈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8월14일 비즈니스 리더로 구성된 환경단체인 E2가 발표한 〈IRA 발효 2년간의 청정 경제 효과〉 보고서에서도 한국의 활약은 두드러진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IRA 시행 후 미국에 가장 많은 투자 프로젝트를 진행한 나라로, 한국 기업이 지난 2년간 발표한 투자 프로젝트는 37개이고 투자 규모는 198억4320만 달러(약 26조원)에 달한다.

하지만 최근 미국에 투자한 기업들은 공장 건설 혹은 가동 속도를 조절하며 숨 고르기를 하고 있다. 8월12일 〈파이낸셜타임스〉는 바이든표 투자 사업들이 정체되거나 지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정치적·경제적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투자 규모가 최소 1억 달러 이상인 프로젝트 중 40%가 미뤄지거나 중단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집행되지 않은 자금 규모가 총 840억 달러(약 111조원)에 이른다. 보도에 따르면 현재 공장 건설이 보류된 가장 큰 규모의 투자 프로젝트는 애리조나주에 있는 LG에너지솔루션의 23억 달러(약 3조675억원) 규모 배터리 공장, 그리고 다국적기업 에넬(Enel)이 오클라호마주에 10억 달러(약 1조3700억원)를 들여 지으려고 했던 태양광 패널 생산 공장 등이다.

2022년 발효된 ‘반도체와 과학법(칩스법)’을 발판으로 한국 기업들도 미국 투자에 속도를 올렸다. 사진은 2022년 7월25일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칩스법 통과 필요성을 논의하고 있는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 ⓒUPI

미·중 무역분쟁으로 고정비용이 치솟고 전기차 수요가 둔화되는 데다 미국 대선을 앞두고 IRA 수혜 산업이 당초 기대했던 혜택을 제공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 커지면서, 기업들은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최근 수소 충전 및 장비 공급업체인 넬 하이드로젠(Nel Hydrogen)은 미시간주에 설립하기로 했던 4억 달러(약 5328억원) 규모의 공장 프로젝트를 중단했다. 전기차에 대한 수요 위축과 더불어 세금 공제 규정의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판단 때문이다. 태양광 제조업체 VSK에너지는 콜로라도주 브라이턴에 2억5000만 달러(약 3340억원)를 투자해 일자리 900개를 창출하겠다던 지난해 발표한 계획을 폐기했다. 트럼프가 재집권할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 위협 때문이라는 것이 해당 업체의 설명이다. 삼성전자도 올 하반기 가동을 목표로 했던 텍사스주 테일러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 가동 시점을 2026년 이후로 늦춘 것으로 현지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이번 결정은 미국 정부의 칩스법 보조금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데 자세한 내막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지난 4월, 삼성전자는 미국 정부로부터 보조금 64억 달러(약 8조8000억원)를 승인받은 바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대규모 제조업 프로젝트는 초기 자본 리스크가 크다고 말한다. 공장 건설에 거액의 자금을 투입하는 만큼 충분한 수요와 지원이 확보되지 않으면 매몰비용이 빠른 속도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만큼 투자위험을 분산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업 입장에서는 시장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제도의 안정성이 중요해진다. 그런데 지금 이 모두가 흔들리는 상황이다.

미국 의존도 높이던 한국 기업의 고민

문제는 이런 현상이 일시적인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지속·강화될 리스크일지 여부다. 현 바이든 행정부의 부통령인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선후보가 집권할 경우 정치적 리스크는 사라지게 될까? 트럼프 공화당 대선후보는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IRA와 칩스법을 폐기 혹은 축소하겠다는 입장을 공언했다. 해리스 후보는 트럼프 후보와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지만 바이든 정책을 완전하게 계승하지 않을 가능성도 점쳐진다.

9월10일 미국 대선후보 TV 토론에서 트럼프는 해리스를 향해 “바이든의 복사판이나 마찬가지”라고 비난했고, 해리스는 “나는 조 바이든이 아니다”라고 반박하며 바이든의 정책에 자신의 색을 더해 ‘뛰어넘겠다’고 강조했다. 실제 해리스는 바이든 행정부보다 더 급진적인 소득분배 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한편으론 러스트벨트 표심을 의식한 공약도 냈다. 최근 해리스 후보는 “전기차 의무를 지지하지 않는다”라며 2019년 상원의원 시절 ‘2040년까지 미국 내 신규 자동차 100% 온실가스 배출 없는 차량 의무화’ 법안을 공동 발의했을 때보다 정책적으로 후퇴하는 선택을 하기도 했다. 해리스 후보는 법인세를 28%로 인상하는 공약도 발표했는데, 미국에 진출한 모든 기업이 적용받는다는 점에서 한국 기업 역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기후위기 이슈를 적극 활용해 유럽연합이 시행 중인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미국식으로 인용해 시행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민주당 대선후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9월10일 열린 ABC 뉴스 대선 토론에 참여하고 있다. ⓒAFP PHOTO

바이든 정부의 정책을 승계하든 폐기하든 모두 한국 기업에 유리한 조건이 아닐 수 있다. 결국 차기 미국 대통령이 누가 되든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 정책 기조는 변함없을 테고, 이는 기술 안보와 미국 자원의 공급망 안정을 목표로 지난 미국 정부가 서막을 연 미·중 무역분쟁이 이제 새로운 무역 질서로 완전히 고착화할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으로 세계 시장이 양분되는 현상은 계속될 공산이 크다. 이 점은 미국 시장 의존도를 높이던 한국 기업들에 또 다른 고민거리를 안긴다.

국제통상 관련법 전문인 박효민 변호사(법무법인 세종)는 “지금은 WTO 규범하의 안정적인 시장질서가 무너졌다. 미국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글로벌 최대 시장인 중국을 포기해야 하는 새로운 지정학적 전략이 시장논리를 압도하는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갈등 속에서 동맹국으로서 한국 기업들은 미국의 시그널에 반응하면서도 동시에 미국이 유발하는 정치적·경제적 위험을 분산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라고 말했다. 즉, 미국 우선주의를 토대로 한 미국의 경제안보 기조는 글로벌 통상 환경에 따라 때로는 기회가, 때로는 위기가 되는 ‘살아 있는 변수’인 것이다. 단순히 미국 시장의 비중 확대를 뛰어넘는 민관의 협력적 대안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IRA 폐지 혹은 축소는 기업에 분명히 악재다. 산업연구원은 지난 5월 발표한 ‘미국 대선 결과에 따른 한국 배터리산업 리스크 분석’ 보고서에서 IRA를 미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버팀목’이라고 설명한다. 리튬·니켈 등 원자재 가격이 떨어지면서 이에 연동된 배터리 가격이 하락한 데다 전기차 수요가 꺾였다. 여기에 중국의 저가 배터리가 대규모로 시장에 공급돼 경쟁력에 빨간불이 켜졌다. 이런 상황에서 IRA 같은 지원책은 한국 배터리 기업이 기댈 수 있는 ‘동아줄’과 같았다.

IRA 규정에 따르면 기업이 미국 내에서 배터리 셀과 모듈(팩)을 생산해 판매할 경우 1㎾h(킬로와트시)당 최대 45달러의 세액공제를 받게 된다. 미국에서 공장을 운영하며 대규모 신설·증설 투자를 추진 중인 한국 배터리 기업도 지원 대상인데, 이미 2023년도 기업 실적부터 ‘첨단제조 생산 세액공제(AMPC)’ 수혜분이 반영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이 미국 애리조나주에 건설중이던 배터리 공장을 착공 두달만에 잠정 중단했다. 사진은 해당 공장의 조감도. ⓒLG에너지솔루션 제공

삼성·현대 등 미국 내 로비 비용 역대급

한국신용평가가 올해 7월 발표한 ‘2차전지 산업 2024년 정기평가 결과 및 하반기 전망’에 따르면 LG에너지솔루션, SK온 같은 배터리셀 업체들은 2023년부터 IRA 관련 AMPC 수혜를 영업이익에 반영해 합산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65% 증가했다. 하지만 AMPC 효과를 제외하면 전년 대비 수익성이 하락한다. 올해 1분기에는 매출 감소 폭이 커서 분기 합산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86% 급감하기도 했다. 2분기 성적에서도 비슷한 추세가 나타난다. LG에너지솔루션의 경우 올해 2분기 AMPC 규모가 4478억원으로 직전 분기 대비 137% 증가했다. 해당 보조금 이익을 제외하면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 분기에 2525억원 영업손실을 낸 셈이다.

미국에 진출한 배터리 업체 내부 관계자는 〈시사IN〉과의 통화에서 “생산량에 따라 (연방정부의) 보조금을 지급받았고, 분기당 1000억~2000억원 수준”이라고 말했다. IRA는 분명 기업의 미국 투자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것에만 의존할 수 없다고도 덧붙였다. “IRA가 배터리 제조업체에 보조금을 주면서 육성해주는 사업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미국 완성차 기업의 시장을 확장시키겠다는 게 1차 목표다. 미국 완성차 업체에 공급해야 하는 배터리를 빨리, 많이 만들라고 유인책을 주는 거다. 미국 대선 결과가 어떻든 자국 사업을 키우겠다고 시작된 정책이라 손바닥 뒤집듯 폐기할 수 없다고 본다. 다만 누가 대통령이 되든 정책의 속도나 규모에 변화가 있을 것이다. 결국 이런 외부 환경에 휘둘리지 않는 신중한 전략을 짜는 게 우선이다.”

트럼프 후보가 재집권하더라도 IRA를 완전 폐지하기는 쉽지 않다. 의회 동의가 필요한 만큼 추후 의회 선거 결과를 지켜봐야 하며, 공화당이 다수당이 되더라도 이탈표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이 행정명령을 이용해 IRA 영향을 축소할 수 있는 만큼 시장은 이미 투자 보따리를 묶어두고 관망세로 돌아선 상황이다. SK하이닉스도 지난 4월, 미국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 AI 메모리용 AVP(어드밴스드 패키징) 생산기지 건설을 추진하며 미국 정부에 반도체 보조금을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향후 칩스가 폐기될 경우 현지 투자를 조정하겠다는 분위기다.

2022년 10월26일 미국 조지아주 ‘현대자동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 기공식에서 첫 삽을 뜨고 있다. ⓒ연합뉴스

수요와 정책이 모두 불안정한 상황에서 기업들은 대미 대관 비용을 ‘역대급’으로 지출하고 있다. 8월25일 비영리 로비활동 공개 단체 ‘오픈스크릿’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국내 4대 그룹이 모두 올해 상반기에 지난해보다 미국에서 로비 비용을 10% 넘게 늘렸다. 반도체와 배터리 산업 등으로 미국 투자를 늘리고 있는 삼성이 가장 많은 비용을 지불했는데 올 상반기에만 354만 달러(약 47억원)를 미국 의회 로비에 썼다. 조지아주 전기차 공장 용수 이슈 등이 불거진 현대차는 올 상반기에 123만 달러(약 16억원)를 지불했다.

미국 시장에 진출한 기업 리스크 관리를 위해 개별 기업 단위를 넘어 유관 부처와 정재계 합동 대응 체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예컨대 배터리 산업은 특성상 해외 생산 비중이 높다. 전기차 공장 가까이에 설비를 투자하는 것이 불가피하고 국내 시장은 협소해 세계시장 점유율 확대에 주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글로벌 통상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애초 IRA 법안이 그랬듯 긍정적인 기회도 찾아온다. 하지만 미국 대선 결과 같은 통제 불가한 변수가 등장하면 보조금에 기댄 투자전략이 기업 전체의 위기가 되기도 한다.

김혁중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북미유럽팀 부연구위원은 이러한 기업의 리스크를 줄이는 데 정부가 통상협력 자원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실제 IRA 시행규칙이 만들어질 당시 핵심 광물 요건을 폭넓게 적용하고, 배터리 구성품 요건에 전해질·분리막 등을 포함하며, 상용차에 렌터카와 단기 리스도 포함하는 등 한국 정부가 요구한 내용들이 상당 부분 반영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미국의 세부 정책 결정에 개별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대미 소통을 강화하면서 적극적으로 의견서를 보내고 국내 기업의 지역경제 기여도를 모니터링해 IRA 신규 시행 지침안을 논의할 때 협상 레버리지로 활용할 수 있다.”

대관 비용을 충분히 지불할 수 없는 대미 진출 중소기업의 성장을 위해서도 이 같은 정부의 지원은 필수적이다. 한편, 해외투자 리스크 때문에 국내 시장으로 돌아오려는 기업에 대한 리쇼어링(제조업 본국 복귀)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전 세계적으로 첨단 전략산업에 대한 보조금 전쟁이 한창인 반면 한국은 투자세액공제 외의 인센티브는 제공하고 있지 않다.

김다은 기자 midnightblu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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