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책읽기가 당신과 흐른다면 [책&생각]

임인택 기자 2024. 10. 18.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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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한강과 ‘귀한 인연’ 네 작품 엄선
작가 한강이 운영해온 동네책방 내부. 두달마다 한 작가를 꼽아 책들을 선별 전시하고 메아리 낭독회도 연다. 지난 7월엔 동갑 작가 김연수가 초청됐다. 마음산책 제공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는 2007년 출간 이후 10년 동안 2만부 팔렸다. 2016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당시는 맨부커상) 수상으로 판매고는 폭발했고, 지난주 노벨 문학상은 판매 추이조차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부커상 직후 작가는 “2만부면 많이 팔렸다”고, 1년에 2천명꼴의 독자가 “귀중한 분”이라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글을 써왔다”며, 문학 작품이 독자에게 어떤 답을 제시한다고 보면 어려울 수 있지만 “질문으로 생각하면 더 재밌게 (어떤 책이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게 조금만 마음을 열어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채식주의자’를 난해해하는 독자가 노벨상 뒤에도 없진 않겠다.

작가 한강이 지난해부터 서울 종로 쪽에서 운영해온 ‘책방 오늘’ 앞에 지난 11일 아침, 책을 사려는 시민들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다. ‘책방 오늘’은 12일부터 임시휴업에 들어갔다. 연합뉴스

예의 곡진함으로 다독가 한강이, 인상 받은 그때그때 소개한 작품은 적지 않다. 다만 전반에 걸쳐 영감을 준 작품·작가를 물으면 곤란해했다. “한국문학과 함께 자랐다”는 노벨 문학상 수상 인터뷰에 비추자면, 거대한 책의 숲에서 한두 그루나 꼽자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 시기 귀한 인연으로 작가에게 각인된 작품을 엄선하여 다시 읽어본다. ‘한강’이 흘러 ‘한국문학’이라는 바다로 더 많은 독자가 닿을 수 있을까.

작가 임철우(70)의 첫 소설집이다. 중3때 소설집을 보았다는 작가 한강은 그중 단편 ‘사평역’(1983)을 꼽아 “(내) 나름의 방식을 가진 소설을 언젠가 쓰고 싶다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문학과지성사(1984)

아버지의 땅

작가 임철우(70)의 첫 소설집(1984)이다. 그중 단편 ‘사평역’(1983)은 겨울밤 전라도 시골 간이역에서 연착 중인 완행열차를 기다리는 장삼이사 아홉의 이야기다. 학생운동으로 갓 제적된 대학생, 돈 벌고자 중졸에 상경해 술집에서 일하는 그래서 대학생을 애증하는 옥자, 막 출옥해 무기수 감방 동기의 어머니에게 대신 인사 간 중년 사내(가보니 이미 죽었다), 제 돈을 훔쳐 달아난 사평댁 찾아 나선 서울 음식점 여사장, 늙고 병든 농부 등. 비좁은 대합실, 하나하나의 사연이 각기 펼쳐진다. 미력한 난로에 던져지는 톱밥처럼 잠시 피어오르다 사윈다. 광주항쟁의 상흔, 희망을 잃은 촌락, 단 한 번 발화되지 못할 무지렁이들의 비애적 삶이 퍼붓는 눈 아래 모처럼 쏟아져 나오지만 이내 묻히고 말리라.

시인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가 모티브 된 이 작품을 두고 평론가 김현(1942~1990)은 초판 해설에서 “그가 쓰는 서정시는 슬픔·아픔·분노 등의 근원 정서와 관련을 맺고 있지만” “그의 인물들은 비극적인 좁은 정황 속에 갇힌 인물들이며, 그 비극적인 공간에서 벗어나는 길은 거의 없”다고 비관한다.

그 절대적 절망은 어디서 기인할까. “아우슈비츠의 학살이 있었고, 그 후 아무도 아름다움을 노래하지 않았다.” “침묵, 잠, 그리고 죽음.” “가슴의 뜨거움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오래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이 ×자식들아.” 소설 속 단말마처럼 대학 강의실 책상에 휘갈겨진 문구가 있을 뿐이다.

김현은 그러나 낙관하고자 비관한 것이니, 결미로 알게 된다. “세계의 무의미를 섬뜩하게 느낄 때, 누군들 세계를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싸움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한강은 ‘아버지의 땅’을 중3인 15살에 읽었다고 기억한다. ‘사평역’을 계기로 자기 “나름의 방식을 가진 소설을 언젠가 쓰고 싶다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다. 9살 때 “시를 쓸 거”라 했던 아이의 변심은 죄 없다. “특정한 주인공” 대신 “인간의 삶 자체가 주인공이 되어서 내적인 리듬을 가지고 끝까지 흘러가는 게 무척 놀”라웠으니 말이다. 그리고 5·18 광주의 ‘소년이 온다’ 후기로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스스로 흔들리곤 했다”며 “더이상 나아갈 수 없다고 느껴질 때마다 … 소년에게 매달렸다. 그가 나를 밝은 쪽으로 이끌고 가기를 바랐”다고 쓴다.

작가 최인호(1945~2013)의 소설이다. 문학적 조언을 해주곤 했던 선배 문인으로, 암투병 중 두 달만에 완성했다. 작가 한강은 이 책을 읽던 “읽던 밤의 전율을 기억한다”고 고인에 대한 추모글에 썼다. 여백(2011)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1970년대 청년 문화의 상징이던 작가 최인호(1945~2013)의 소설이다. 그는 작가 한강이 첫 직장으로 다닌 출판사의 단골 문사였다. 24살 수습사원 한강은 당시 교정·필자관리 외 커피·차도 냈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90년대 얘기다. 한 갈래로 머리 땋은 한강에게 웃음 주며 특유의 활기로 “우리 춘향이”라 부르던, 이듬해 소설 등단한 한강에게 ”소설을 맨 앞에 둬야 한다. 그러려면 착하게 살려고만 하면 안 된다”고 조언했던 이가 최인호, 그가 암 투병 중 쓴 장편이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2011)다. 전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청탁 없이 자발로 썼다.

“느닷없는 소음 때문에 K는 잠에서 깼다”로 시작하는 소설은 평생 알몸으로 잠든 적 없던 주인공에게 거울 앞 나신부터 낯선 화장품, 낯선 일정, 낯선 아내를 맞대하게 한다. 금융계 종사자로, 규칙과 믿음에 충실한 남자는 제 삶이 정연하여 타인조차 의심해 본 적 없다. 허나 작중 사흘은 온통 “의심”과 “의혹”으로, 종국 자아를 의심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것이 현실이다. ‘장편소설가’ 최인호가 작정하고 단편 쓰듯 한 속도감으로, 삶과 세계, 믿음의 허구성을 꼬집는다.

“암은 지금껏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지식과 내가 보는 모든 사물과 내가 듣는 모든 소리와 내가 느끼는 모든 감각과 내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하느님과 진리라고 생각해왔던 모든 학문이 실은 거짓이며, (…) 우상이며, (…) 존재하지도 않는 헛꽃幻花(환화)임을 깨우쳐주었다.”(‘작가의 말’)

진정인가. 소설이 자아의 구원을 윤리적, 종교적으로까지 모색하면서 반어적 진실은 드러난다. 사흘은 실상 ‘낯익은 것’들과 자아 분열적으로 이별하며 마지막 임박해가는 죽음으로의 도정이다.

이 소설은 작가 왈 “남에게 읽히기 위한 문학이 아닌 오직 나만을 위한” 작품이다. “나중에는 단 하나의 독자인 나마저도 사라져버리는 본래면목의 창세기를 향해서” “하느님께서는 나를 나의 십자가인 원고지 위에 못 박고 스러지게 할 것임을 나는 굳게 믿는다”며 두 달 만에 휘몰아 쓴 이 소설을 “읽던 밤의 전율을 기억한다”고 한강은 썼었다. 신을 믿지 않는 한강이 보기에 “처절한 정직성으로 움켜쥔 소설. 평생 동안 맨 앞에 두었던 소설이 그를 끌고 나아간 순간들의 기록”이다.

이 작품 발문을 쓴 작가 김연수는 동갑 작가 한강과 함께 투병 중의 최인호를 방문한 때를 “기억한다”고 16일 한겨레에 말했다. 하나는 기억할 수 없다. 한강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일행들이 화장실에 가서 둘만 남았을 때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 강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네가 그걸 알았으면 좋겠어. 인생은 아름다운 거다…”(추모글, ‘문학동네’ 2013 겨울호)

미국 여성시인 메리 올리버(1935~2019)의 산문집이다. “모든 것이 필요할 때 시는 필요한 모든 것”이라던 작가는 유한한 삶과 만물의 영혼을 감각하고 전한다. 부친인 한승원 작가에게 새해인사로 부친 책. 마음산책(2019)

긴 호흡

미국 여성시인 메리 올리버(1935~2019)의 산문집이다. “질문은 오직 하나뿐, 어떻게 이 세상을 사랑할 것인가”라는 제사로 시작되는 시집 ‘기러기’로도 유명한 올리버는 생의 대부분을 매사추세츠주 숲과 강, 모래언덕과 바다에 저를 안긴 프로빈스타운에 머물며 글을 썼다. 데이비드 소로마저 “지나치게 사교적인 사람인 듯한 때가 많다”고 말하는, 진솔하고, 단호한, 초월주의 작가다.

그에게 자연은 구원이었으니, 학내 문제가 생긴 고교 시절 학교로 가다 매일 숲으로 갔다. 휘트먼의 시가 가방 속에 있었다. “모든 것이 필요할 때 시는 필요한 모든 것”임을 배웠다. 올리버는 운문으로 자연의 숨소리를, 산문으로 말소리를 전한다. 깊은 숲속에서 때로 사족보행 한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쓸 때 한강이 구덩이의 느낌을 감각하려 책상 아래 저를 구겨 넣었던 것처럼.

책에서 올리버는 유한한 삶과 만물의 영혼을 감각한다. 전할 뿐이다. “흉내지빠귀에게 그의 노래에는 말이 결여되어 경박하다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가 알아, 뿌리는 다른 생명의 꽃인지도.” “숲속에는 매력적인 게 없다.” “그들은 사랑스럽지도, 매력적이지도, 귀엽지도 않다.” 그런 말들은 “잘못됐다.” “그런 식으로 지각되는 것들은 위엄과 권위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도 귀엽지 않다.” “나는 풀잎 한 줄기의 지배자도 되지 않을 것이며 그 자매가 될 것이다.”

나직한 잠언들이 소요하다 너울대고, 마침내 읽는 이를 삼킨다. 한강이 슬픔을 본다면, 올리버는 기쁨을 본다. 각기 작품에서 드러난바, 한강에겐 사랑의 증거가 고통이고, 올리버에겐 사랑의 결과가 환희다.

이 산문집(1995)을 낼 때의 올리버는 “젊었을 때 나는 슬픔에 매료되었다”며 “이제 나는 단 몇 가지 일에 대해서만, 그러나 거듭해서 슬퍼한다”고 말했다. 부친에게 새해 인사로 한강은 이 책 ‘긴 호흡’을 동봉하며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썼다.

작가 한강이 유쾌하게 소개한 책을 꼽자면, 안토니오 타부키(1943~2012)의 작품일 것이다. 2022년 문학잡지 ‘악스트’, 정용준 작가와의 인터뷰에서다. “올해 들어 제가 좋아하게 된 작가”라며 “도장 깨듯이 번역되어 나온 것들 다 찾아 읽었”다는 한강의 말에는 흥마저 감지된다.

이탈리아 작가 안토니오 타부키(1943~2012)의 소설. 페르난두 페소아를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한 작가다. 한강은 2022년 “올해 들어 제가 좋아하게 된 작가”라며 “도장 깨듯이 번역되어 나온 것들 다 찾아 읽었”다고 말했다. 문학동네(2015)

인도 야상곡’은 한강이 받았던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1987년 타부키에게 안겨준 소설이다. 사라진 친구 사비에르를 찾아 주인공이 헤매는 인도 12곳이 일람된다. 주인공 호스는 곳곳에서 질문하는 자, 만나는 자, 쓰는 자다. 해설대로 ‘존재의 탐사자’인 것이다. 이 책 제사에 등장하는 평론가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이 하나의 질문이 되는 순간, 문학은 시작된다”고 말했다. 한강의 ‘질문하는 문학’을 선행하고, ‘인도 야상곡’이 한 전범이다.

한강은 다른 작가 작품의 추천사를 쓴 적이 거의 없다. 그가 운영한 동네서점에서 그랬듯, 누구보다 책을 읽어내고, 꼽아 그 매력을 알리는 데 애썼다. 우리 문학을 읽지 않는다는 시인과 소설가도 적지 않지만, 한강은 그래 본 적 없다. 17일 국내 첫 수상소감이 잘 말해준다. 심지어 동료 작가의 장편 마지막을 읽을 때 “연민”을 느끼는 이가 한강(2007년 대담)이다. ‘그 작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뒤 작가는 썼다. “더이상 새벽에 일어나 초를 켜지 않아도 된다.” “검색창에 ‘학살’이란 단어를 넣지 않아도 된다. 구덩이 안쪽을 느끼려고 책상 아래 모로 누워 있지 않아도 된다.” “더이상 눈물로 세수하지 않아도 된다.”

숱한 “않아도 된다”를 거쳐, 한참 만에 추슬러 간다. “어쨌든 루틴이 돌아온다. 매일 시집과 소설을 한 권씩 읽는다. 문장들의 밀도로 다시 충전되려고.” 지난 10일 노벨 문학상 수상 당일도 그는 책 읽고 산책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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