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지나가기만 기다린다는 딥페이크 가해자들
다 부수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 착취가 보도되기 수년 전부터 소위 ‘지인 능욕’이라는 범죄가 판을 쳤다. 딥페이크 성 착취는 범죄 피해를 당해도 당사자가 모를 수 있다. 알고 난 후에 수사기관을 찾아가도 수사에 진전이 있는 경우가 적어서 다른 디지털 성범죄에 비해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고, 피해의 심각성 또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게다가 딥페이크 범죄는 N번방, 박사방처럼 직접 여성을 ‘성 착취’하는 범죄가 아니라는 이유로 더 쉽게, 가볍게 저질러졌다. 일반인은 물론 연예인까지 범죄의 타깃이 됐다. 최근 언론 보도를 보면 10대 피의자와 피해자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가 딥페이크 성 착취를 10대의 장난 내지 호기심으로 시작한 가벼운 범죄로 취급해온 과거가 부른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 범죄를 텔레그램에서 처음 목격한 건 2019년 여름이다. 그 뒤 5년 동안 텔레그램은 이용자에게 친화적인 메신저로 발전했고, 특히 성범죄자에게는 든든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텔레그램을 이용하는 성범죄자는 세 가지 계층으로 나눌 수 있다. 문형욱이나 조주빈처럼 성 착취물을 제작하는 ‘제작자’, 성 착취물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거나 유포하는 ‘유포자’, 조용히 지켜만 보는 ‘시청자’. 나는 이를 ‘텔레그램 성 착취 생태계’로 이름 붙였다. 맨 꼭대기에 제작자, 중간에 유포자, 하단에 시청자가 있는 피라미드 구조다. 5년 전 N번방 사건을 세상에 알리면서 접한 텔레그램 속 생태계는 축소와 확대를 반복 중이다.
‘딥페이크 지옥문’ 앞에 당장 보이는 건 텔레그램·AI 등이다. 그러나 문턱부터 가장 깊숙한 안쪽까지 살펴보면 여성 착취 문화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텔레그램 성 착취 생태계가 축소와 확대를 반복한 지난 5년 동안 잡아내지 못한 ‘여성 착취 문화’, 여기에 경찰·정부·국회·법원·학교 등 모두가 함께 맞서야 한다.
현재 수사기관과 언론 등 각 주체는 텔레그램 딥페이크에 전쟁을 선포했다. 기시감이 든다. 텔레그램에서 벌어진 디지털 성범죄가 수면 위에 드러날 때마다 지금 같은 움직임이 있었다. 2020년 경찰청은 디지털 성범죄 특별 단속을 했다. 주로 N번방, 박사방 등 당시 크게 문제가 된 성 착취 사건의 가담자들이 주요 타깃이었다. 그해 3월부터 12월까지 약 9개월 동안 3500명 이상이 검거됐다. 이름, 나이 등 신상 정보가 공개된 가해자만 일곱 명이 넘었다. 디지털 성범죄자의 신상이 공개된 건 이례적이었다. ‘잡히면 인생이 끝난다’는 공포에 성 착취 생태계는 일시적으로 축소됐다.
2년 뒤인 2022년, 텔레그램 성 착취 생태계는 다시 확대됐다. 텔레그램에 각종 화장실, 성관계 불법 촬영물이 유포되고 딥페이크 성 착취도 심해졌다. ‘성 착취물’만 제작하지 않으면 된다는 모종의 합의가 만들어진 거다. 서로 그간 보고 싶었던 자료(피해물)를 공유하는 대화방도 우후죽순 생겼다. 그 틈에 가칭 ‘엘’이라는 아동·청소년 성 착취물 제작자가 탄생했다.
대화방 입장, 여성혐오 테스트 거쳐야
그 후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텔레그램 성 착취 생태계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딥페이크를 저지른 가해자들도 의아해한다. 그동안 ‘성 착취’가 아니면 반응하지 않던 국가가 움직이니 적잖이 당황한 걸로 보인다. “왜 한창 저지를 때 가만히 있다가 지금에서야?”라는 반응이다. 나아가 서로 안전할 거라는 믿음을 공유한다. “성 착취 저지른 거 아니니까 괜찮아 버티자, 텔레그램이라서 안전해.”
이들이 정말 딥페이크 성 착취만 저질렀을까? 그렇지 않다. 2022년 11월 검거된 아동 청소년 성 착취범 ‘엘’의 경우, 2020년부터 딥페이크 성 착취 대화방을 운영했다. 대화방에는 사진이 3000장 이상, 영상이 200편 이상 게시됐다. 대화방에는 케이팝 여성 아이돌의 사진과 여성의 나체가 합성된 딥페이크 피해물이 올라왔다. 피해자 중 10대도 많았다. 이 방에 참여한 가해자 중 일부는 일반인과 인플루언서를 대상으로 딥페이크 성 착취를 하는 다른 대화방에도 들어가 있었다. ‘엘’은 2021년부터 직접 성 착취물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딥페이크 성 착취를 저질러도 안 잡힌다는 사실은 안도감을 넘어 새로운 범죄를 저지를 용기까지 준 것이다.
텔레그램은 이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온라인 남성 중심 커뮤니티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온라인 남성 중심 커뮤니티에서 공유되는 여성혐오 게시물, 정서 등을 그대로 텔레그램 성 착취 생태계 안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예컨대 서로서로 알아볼 때 얼마나 여성혐오에 ‘진심’인지 테스트한다. 최근 보도된 한 딥페이크 대화방에 입장하려면 테스트를 거쳐야 했는데, 여러 항목 중 ‘페미(페미니스트)는 질병이다’를 선택해야 통과할 수 있었다.
대화방 참여자의 대화를 지켜보노라면, 그들은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에서 본인들의 범죄행위의 당위성을 찾기도 한다.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을 들을 바에야 진짜 범죄를 저지르겠다는 심보다. 이들의 이런 ‘연대‘가 우스워 보인다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제주에서 활동하는 한 폭력 예방 전문 강사는 어떤 중학교에 강의하러 갔을 때 한 남학생으로부터 받은 질문을 공유했다. “선생님,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 중에 여자는 없어요?”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연히 여성인 가해자도 있겠지만, 문제는 10대 남학생의 태도였다. 여성이 피해자의 다수인 디지털 성범죄의 특성을 무시한 채 딥페이크, 불법 촬영 등을 두려워하는 여성은 피해망상에 빠졌으며 되레 본인이 ‘잠재적 가해자’로 몰린 피해자라는 태도 말이다.
딥페이크 성 착취를 저지르는 대화방의 한 참가자(시청자)에게 대화를 걸었을 때도 비슷한 이야기가 돌아왔다. “딥페이크가 심각한 문제인 건 알지만, 남성들이 잠재적 가해자로 몰리는 상황이 더욱 심각한 범죄”라는 거다. 그 대화방에는 ‘예쁜 여성의 사진’을 주면 ‘합성’해주겠다는 이들이 판쳤고, 연결된 또 다른 대화방에서는 8월29일 열린 ‘#너희는 우리를 능욕할 수 없다’ 시위의 기사 사진을 올리며 “예쁘지도 않은데 무슨 걱정이냐?”라고 시위자를 조롱했다. 텔레그램 성 착취 생태계에 이런 인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라는 사실이 ‘여성혐오’가 이들의 ‘바이블’이란 점을 설명한다.
여성을 착취하면서 쌓은 연대감은 텔레그램 성 착취 생태계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이 생태계를 경찰과 언론의 힘만으로 부술 수 없다는 사실이 지난 5년간 증명됐다. 딥페이크 성 착취에 국민들이 분노한 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다. 이들은 지금 시기를 ‘보릿고개’라 부른다. 몇 주 뒤면 본인들에 대한 관심이 수그러들 거라는 걸 비유한 표현이다. 가해자들은 관심이 줄어들 날을 기다리며 개인 간 대화로 더 은밀하게 딥페이크 성 착취를 벌이고 있다. ‘보릿고개’를 넘기고 살아남은 이들은 더 끔찍한 성범죄자로 돌아올 것이다.
원은지 (추적단불꽃 단)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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