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기차 대중화가 자리잡으면서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내연기관차 시대에는 엔진 기술이 핵심 경쟁력이었다면, 전기차 시대에는 배터리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때문에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전기차 개발에서 핵심적으로 고려하는 요소도 배터리가 됐다. 배터리 기술력에 따라 차량의 주행 거리가 좌우되고, 비용 절감과 에너지 밀도를 고려한 배터리 선택은 완성차 업체들에게 중요한 결정 요소로 자리잡았다. 이에 따라 차량 설계 단계에서부터 배터리 팩의 형상과 크기, 냉각 시스템, 배터리 관리 시스템(BMS) 등을 공동으로 개발한다.
이처럼 완성차와 배터리 업체의 협력관계가 중요하지만, 구체적인 파트너십의 내용은 대체로 공개되지 않는다. 완성차 업체는 배터리 수급처가 알려질 경우 전기차 전체의 상품성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 적극적인 공개를 꺼리기 때문이다. 배터리 업체 입장에선 고객사가 원치 않는 정보를 공개할 수 없다. 이로 인해 일부 전기차의 경우 소비자가 명확한 배터리 정보를 알지 못한 채 구매하기도 한다.
최근 인천 청라지역에서 화재가 발생해 나라를 들썩이게 만든 메르세데스-벤츠 전기차 'EQE'도 마찬가지다. 당초엔 EQE는 중국의 닝더스다이(寧德時代·CATL) 배터리를 탑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는 초기에 소량만 판매됐던 EQE 300만 해당될 뿐, 사고차량인 EQE 350+의 경우 중국의 '푸넝커지'(孚能科技·패러시스) 배터리를 장착한 것으로 드러났다. 소비자들은 배터리 정보를 숨겨온 벤츠코리아에 분노했고, 관련 법적 대응도 진행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와 같은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내년 2월 시행 예정이었던 '전기차 배터리 인증제'를 올해 10월로 앞당겨 시작한다. 대국민 배터리 정보공개는 배터리 제조사뿐만 아니라 셀 구성 방식, 폼팩터 등 주요정보까지 의무적으로 공개한다. 지금은 국토교통부 자동차리콜센터 홈페이지의 '전기차 배터리 제조사 현황'에서 32개 업체, 100여종의 국내 모든 전기차의 배터리 제조사를 확인할 수 있다.

글로벌 완성차 기업의 배터리 협력 현황
국내 대표 기업인 현대차그룹은 LG에너지솔루션, SK온과 주로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 양사로부터 아이오닉5·6, EV6·9, 제네시스 GV60 등 E-GMP 플랫폼 기반 전기차 배터리를 공급 받는다. 보급형 모델로 분류되는 코나 일렉트릭, 니로EV의 경우 CATL 배터리를 탑재했다. 주로 NCM(니켈·코발트·망간) 파우치형 배터리셀을 사용한다. CATL로부터는 NCM 각형 배터리를 공급받는다. 향후에는 LFP(리튬인산철) 배터리 적용도 검토할 계획이다.
테슬라는 배터리 분야에서 독보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모델S와 모델X만 판매하던 시절에는 일본의 파나소닉의 원통형 배터리를 주로 공급받았다. 하지만 모델3, 모델Y 등 전기차 라인업이 늘어나면서 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도 받기 시작했다. 현재는 저가 라인업, 스탠다드 모델에는 중국 CATL의 LFP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원가절감을 위한 선택으로 풀이된다.
토요타는 배터리 자회사인 '프라임어스EV에너지'(PEVE)와 프라임플래닛에너지솔루션(PPES)로부터 배터리를 공급받는다. PEVE는 주로 하이브리드차(HEV)와 플러그인하이브리드차(PHEV)의 배터리 솔루션을 공급한다. PPES의 경우 토요타와 렉서스 전기차 배터리를 담당한다.
GM은 LG에너지솔루션과의 협업을 통해 '얼티엄' 배터리를 개발, 자사의 전기차 플랫폼을 기반으로 다양한 모델을 출시하고 있다. 최근에는 삼성SDI와도 협력하며 전기차 포트폴리오를 확장하고 있다. 포드는 주력 전기차인 '머스탱 마하-E'에 LG에너지솔루션, 전기 픽업트럭인 'F-150 라이트닝'에 SK온 배터리를 각각 탑재한다.
폭스바겐그룹은 다양한 브랜드만큼 여러 배터리 공급처를 통해 안정적인 공급망을 유지하고 있다. 주요 공급처로는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CATL 등이 있다. 특히 MEB, J1 플랫폼의 경우 모두 한국산 배터리를 탑재한다. 스텔란티스는 현재 푸조, 시트로엥, 지프 전기차에 CATL 배터리를 사용한다. 현재 개발 중인 차세대 전기차는 삼성SDI 배터리를 탑재할 계획이다.
볼보-지리자동차는 LG에너지솔루션, CATL, CALB 등의 배터리를 넣는다. 특히 볼보차는 EX30, EX90 등 차세대 전기차의 롱레인지 모델에 LG에너지솔루션, 일반 모델의 경우 CATL을 탑재한다. 같은 그룹사인 폴스타도 LG에너지솔루션과 CATL을 사용한다. 이 밖에도 혼다는 LG에너지솔루션과 CATL, 재규어랜드로버는 LG에너지솔루션을 각각 탑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배터리 내재화 도전하는 車업계
전기차 산업이 고도화 될수록 배터리의 중요성이 커지자, 완성차 기업들은 배터리 개발 역량 내재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테슬라다. 테슬라는 파나소닉과 합작사를 만들어 현재 원통형 배터리를 생산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기존 LG에너지솔루션과의 협업에서 얻은 노하우와 자체 R&D를 통해 배터리와 차체가 통합된 '셀투비히클'(CTV) 구조를 도입하기로 했다. 이는 부품을 줄이고 배터리 집적도를 개선함으로써 이전 '셀투팩'(CTP) 대비 배터리 시스템의 중량은 10% 감소하고 재료비는 절감되며, 냉각 기술 고도화를 통해 열전달 성능은 최대 45% 개선될 전망이다. 또 올해 12월 현대차 의왕연구소 내 완공 예정인 차세대 배터리 연구동에서 전고체 배터리를 비롯해 차세대 배터리 개발을 가속화할 계획이다.
현대차그룹은 현지 공장 건설에도 적극적이다. LG에너지솔루션, SK온과 미국에 연산 30만대 분량의 배터리 합작공장을 건설 중이다. 또 인도네시아에서도 LG솔루션과 합작한 베터리셀 공장 'HLI그린파워'를 준공하고 고성능 NCMA(니켈·코발트·망간·알루미늄) 리튬이온 배터리셀 생산에 나섰다. HLI그린파워는 현대차 '캐스퍼 일렉트릭', 기아 'EV3'에 NCMA 배터리를 공급하고 있다.
일본 토요타는 올 3월 배터리 합작사인 PEVE를 완전히 자회사화했다. 공동 출자사인 파나소닉의 PEVE 보유 지분(지분율 19.5%)을 모두 사들여 100% 자회사로 만든 것이다. 1996년 파나소닉과 공동으로 PEVE를 설립한지 약 28년 만이다. PEVE는 지금까지 토요타 하이브리드차량용 배터리만을 생산해왔는데 앞으로 EV와 PHEV용 배터리까지 생산할 예정이다. 또 2030년까지 미국과 일본 등 배터리 공장의 생산능력을 연간 280GWh로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토요타는 차세대 배터리 개발 부문에서도 선두주자로 꼽힌다. 업계에 따르면 '꿈의 배터리'로 꼽히는 전고체 배터리를 적용한 전기차는 이르면 2027년 출시할 것으로 예상된다. 10분 충전만으로도 1200㎞를 달릴 수 있고 현재 출시된 전기차보다 주행거리가 2.4배가량 길다. 이는 전기차에 자사의 고성능 차세대 배터리를 탑재해 상품 경쟁력을 높이고 전기차 분야 '후발 주자'의 꼬리표를 떼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배터리 내재화에 어려움을 겪는 곳도 있다. 폭스바겐, 볼보, BMW 등 유럽 자동차 업체들은 스웨덴 배터리 제조사 '노스볼트'(Northvolt)에 수십억유로를 투자, 배터리 기술과 공급망 내재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생산능력 확충의 지연과 예상보다 높은 비용 등이 걸림돌로 작용하며 대량양산 시기가 점차 늦어졌다. 최근에는 BMW가 20억유로(약 2조8000억원) 규모의 선주문을 취소했고, 노스볼트 측에선 대규모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또 볼보차와 합작으로 스웨덴, 독일, 캐나다에 기가팩토리를 추가로 건설하려던 계획도 연기하기로 했다.

완성차 업체들이 배터리 제조사를 공개하고 배터리 내재화에 힘쓰는 것은 전기차 시대에서 배터리가 차량 성능과 안전성의 핵심이라는 인식이 강해진 결과다. 배터리의 성능과 품질은 주행거리와 충전 속도에 큰 영향을 미치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직결된다. 이에 따라 업체들은 품질을 보장하고, 공급망을 안정화하기 위해 내재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기술적 난관과 비용 부담으로 여전히 기존 공급업체에 의존하는 상황이다. 앞으로는 안전성, 가격 경쟁력, 지속 가능성이 주요 화두가 될 것이며, 배터리의 고도화와 전기차 시장의 확대는 계속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