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창완의 학창 시절은 시작부터 남달랐다.
1954년생인 그는 여섯 살이 되던 어느 날, 동네 친구들이 모두 학교로 사라진 것을 보고 따라갔다가 그대로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당시엔 입학 연령이 지금처럼 엄격히 관리되지 않던 시절이라 가능했던 일.
덕분에 또래보다 두 학년을 일찍 시작했고, 17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서울대에 입학했다.

방송에서 김창완은 웃으며 서울대 입학 비법을 공개했다. 인기 학과가 있듯이 진입 문턱이 낮은 학과도 있다는 것.
그는 농과대학 소속 ‘잠사학과’를 선택했다. 누에를 키우고 고치에서 실크를 뽑아내는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당시엔 수요가 있었지만 점차 사양 산업으로 변하며 졸업 후 취업난이 심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래도 다 서울대다”라며 특유의 재치를 잃지 않았다.

맏형 김창완과 둘째 김창훈은 서울대 출신, 막내 김창익은 고려대 출신으로, 세 형제 모두 명문대를 졸업했다.
김창완의 아내 역시 서울대 의대 출신으로, ‘서울대 부부’ 타이틀까지 얻게 됐다.

김창완 형제를 이야기할 때 산울림을 빼놓을 수 없다.
김창완이 사 온 500원짜리 기타로 형제끼리 노래를 부르던 것이 산울림의 시초였다.
김창훈이 기타를 하나 더 사면서 사운드가 더해졌고, 막내 김창익은 전화번호부를 두드리며 드럼을 대신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결성된 산울림은 1977년 ‘아니 벌써’,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로 한국 록의 새 흐름을 만들었다.

군 복무를 마친 김창완은 취업과 음악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결국 음악을 택했다.
산울림은 1997년까지 13장의 정규 앨범을 내며 ‘한국 록의 전설’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당시 음악 시장은 수익 구조가 안정적이지 않았고, 동생들은 직장 생활이나 해외 생활로 방향을 바꾸었다.

2008년, 캐나다에서 막내 김창익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산울림은 더 이상 활동을 이어가지 못했지만, 김창완은 연기·방송·음악 등 여러 영역에서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세 형제가 함께했던 시절은 끝났지만, 그들이 남긴 음악은 여전히 세대를 넘어 사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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