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100년 전까지만 해도 ''2층 이상의 건물을 절대 짓지 않았다는'' 이유

조선엔 2층이 없는 이유, 건축 양식의 대전환

중국과 일본의 고도에는 300년, 500년 넘는 2층, 3층 고건물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특히 조선시대 건축물에는 대부분 지상 1층, 단층 구조만 남아 있는 일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문화적 특징이나 경제적 이유를 떠올리지만, 그보다 더 깊은 자연환경과 생활방식 변화가 이 독특한 주거 양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조선 중기 이후 평면식 단층 가옥이 주류가 된 역사는 건축기술의 한계가 아니라, 한반도만의 냉기와 함께 나타난 온돌 문화의 보편화에 있었다.

온돌, 바닥에서 시작된 난방 혁명

온돌은 한민족이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발전시킨 구들장 바닥 난방 방식이다. 온돌의 원리는 매우 간단하지만 효과적이다.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열기가 바닥 아래의 구들장을 따라 이동하면서 바닥 전체가 점차 데워진다. 하절기에는 구들이 식혀지고, 동절기엔 집 안 구석구석까지 훈훈함이 퍼진다. 이 온돌은 위에 매트 하나만 깔면 누구나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온돌은 일종의 설비이자 구조물이기에 그 자체로 무거울 뿐만 아니라, 연도(煙道·불길 통로)가 반드시 지상에 설계되어야만 했다. 바로 이 점이 한국에서는 2층 집이 드물 수밖에 없었던 이유의 핵심이다.

2층 집과 온돌의 모순, 설계의 한계와 현실

물리적으로 보자면, 온돌은 불길과 연기가 집 밑을 지나가도록 구들장이 깔린 구조여야 했다. 그런데 2층에는 이런 구들 구조를 장착할 방법이 거의 없었다. 2층 바닥 아래, 즉 공중에 아궁이와 연도, 구들장을 만들기는 기술적으로 매우 어렵고 비효율적이었다. 또, 위층에도 온돌을 설치한다면 연기가 위층 방으로 올라와 쾌적하게 머물기도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온돌 기술이 널리 확산될수록, 실질적으로 2층 이상을 활용할 이유와 수요 자체가 줄어든다. 반면 일본은 목조 누각구조, 중국은 석조와 벽돌 기반의 누대형 건축을 발달시킨 이유가 바로 이들과는 전혀 다른 온도, 난방방식, 생활습관, 건축재료와 맞닿아 있다.

고려 때는 2층이 많았다: 역추적의 단서

흥미로운 점은 고려시대까지는 우리 땅에도 꽤 높은 누각, 2~3층 절, 탑 등의 고층 구조물이 있었단 사실이다. 한국 사찰의 누각, 팔각정, 목탑, 궁정 건축 유적이 그 증거다. 당시에는 온돌이 존재하긴 했지만, 주로 평민들이나 산간 지역에서 쓰이던 난방 방식이었다. 높은 관료, 귀족, 양반층은 당대 중국, 몽골에서 유행하던 고가구형 노(爐)와 화로를 더 선호했다. 이 시기까지는 겨울을 특수하게 보내는 것이 보편적이거나 필수는 아니었던 셈이다.

소빙하기와 기후 변화, 온돌의 전국적 보편화

16세기 후반, 한반도에는 ‘소빙하기(Little Ice Age)’가 닥친다. 현저하게 추워진 겨울과 잦은 한파는 양반-평민 할 것 없이 전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난방에 대한 갈증을 키웠다. 이제까지의 화로나 노로는 한계를 느끼게 되었고, 그 결과 온돌이 상류층까지 급속하게 보급되기 시작했다. 차츰 온돌은 남쪽 지방까지 퍼지며, 집안 생활문화 전반을 바꾸는 동력이 되었고, 자연스레 2층 집의 자리도 사라진다. 평면 지붕구조와 대청마루, 마당을 중심에 둔 생활 구조가 정착된 것도 이때다.

한국식 주거, 자연에 순응하며 진화하다

온돌이 전국적으로 자리잡으면서 조선의 주거 양식은 한층 더 자연 친화적이고, 기능을 극대화한 평면 위주의 단층 집으로 진화한다. 여름철에는 대청마루로 바람을 통하게 하고, 겨울에는 아궁이 불기운이 집안을 아늑하게 감싸는 구조다. 이는 추운 기후에 특화된 실용성이자,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에 강한 안전성, 그리고 재료 활용의 합리성까지 한데 갖춘 독창적 진화였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단층 온돌집은 겨울 한파와 더운 여름, 두 가지 상반된 기후 환경을 모두 견딜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주거 해법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