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격변으로 국내 전력기기 업계가 ‘슈퍼 을’로 등극했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신·증설에 따른 전력 수요 폭증과 노후 기기 교체 시기가 맞물리면서 초고압 변압기 등 주요 기기가 없어서 못파는 귀한 몸이 됐기 때문이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전례 없는 호황에 K-전력기기의 영향력은 날로 커지고 있다.
LS일렉트릭과 효성중공업, HD현대일렉트릭 등은 단순했던 제조업의 틀을 넘어 AI 인프라에 혈액을 공급하는 하이테크 산업으로 진화한 모습이다. 전력기기 3사의 수주잔고는 27조원을 넘어섰다. 추가 일감을 확보하지 않아도 3~4년간 생산라인을 가동할 수 있는 규모다.
전력기기 업계는 현재 일감확보에 만족하지 않고 추가 수주를 위해 국내 최대 전기산업 전문 국제 전시회인 ‘일렉스코리아 2026’에 참가했다. 이 행사는 4일부터 사흘간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다. 참가 기업은 차세대 전력망 기술과 디지털 전환 기반 솔루션, 발전·송배전·저장·관리로 이어지는 산업 전반의 밸류체인 미래를 공개했다.
올해로 30회째를 맞이한 일렉스코리아에는 217개사가 참여해 544개의 부스를 차렸다. 이 중 관람객이 가장 많았던 부스는 단연 LS일렉트릭과 효성중공업이다. HD현대일렉트릭은 해외 전시회 위주로 참가하고 있어 일렉스코리아에는 부스를 꾸리지 않았다.
‘송전 기술의 꽃’ HVDC, 장거리-대용량에 특화
LS일렉트릭과 효성중공업이 올해 전시회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전면에 내세운 제품은 HVDC(초고압직류송전)다. 부스 중앙에 HVDC를 전시해 부스를 찾는 이들에게 그동안 쌓아온 기술력과 신뢰성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HVDC는 ‘송전 기술의 꽃’으로 불린다. 발전소에서 생산한 교류(AC) 전압을 직류(DC)로 변환해 송전한다. 교류 송전 대비 전력 손실이 적고 장거리와 대용량 송전에 유리한 것이 특징이다. 정부가 추진 중인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를 시작으로 한반도 삼면을 잇는 U자형 국가 전력망 구성의 핵심 기술인 동시에 세계적으로도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300km가 넘는 가공 송전이나 40km가 넘는 해저 및 지중 송전 시, 같은 크기의 전선에서는 직류가 교류보다 2배 이상 규모로 송전이 가능하다. 교류 송전에 비해 직류 송전이 경제적으로 유리하다는 얘기다.
또 교류 송전선과 비교해 직류는 철탑 면적과 수량이 적어 자연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 기존 교류 철탑을 활용해 직류 송전을 하면 더 많은 전력을 환경파괴 없이 보낼 수 있다.
미국과 유럽에는 30년 넘게 운영된 노후 철탑 및 송전선이 많다. 특히 미국의 경우 노후화 전력망이 70% 이상이어서 교체 수요가 다른 국가보다 크다. 이 시장을 노리고 LS일렉트릭과 효성중공업이 HVDC를 일렉스코리아에서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한국스마트그리드협회장인 구자균 LS일렉트릭 회장은 일렉스코리아에서 기자와 만나 “북미는 물론 유럽 국가와도 초고압 변압기에 더해 HVDC 계약을 체결하고자하는 고객사의 문의가 많다”며 “기존 수주잔고에 더해 신규 일감이 더해지면서 올해는 그동안의 노력이 숫자로 증명되는 한 해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LS일렉트릭은 지난 2011년 부산에 HVDC 전용 공장을 준공하고 지난해에는 같은 지역에 제2생산동을 준공했다. 수요급증에 앞서 선제적으로 생산능력을 확충한 것이다. 이재명 정부의 대표 에너지 정책인 11조원 규모의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 사업에 대비한 것이기도 하다.
LS일렉트릭 관계자는 “국내 유일의 HVDC 사업 수행 이력을 가진 사업자로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 사업의 대표 수혜 기업으로 주목을 받는다”며 “북당진-고덕 HVDC 변환 설비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료한 경험치를 바탕으로 많은 일감을 확보해 지속성장의 기반을 마련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초고압 변압기에 강점을 가진 효성중공업 중공업 부문도 포트폴리오 다변화를 위해 HVDC에 집중한다. 회사 관계자는 “AI 시대의 도래로 초고압 변압기로 많은 일감을 확보한 상황에서 HVDC에 대한 수요가 커지면서 해당 제품에 대한 높은 기술력을 알리기 위해 부스 중앙에 관련 제품을 전시했다”며 “HVDC는 이론적으로 전력 공급 거리에 제한이 없어 우리나라는 물론 해외에서도 계약 러브콜이 끊이지 않는 중”이라고 전했다.

LG엔솔·LS전선·대한전선, AI 전력기기 시대 동반자
LS일렉트릭과 효성중공업 등 전력기기 업체 외에도 LG에너지솔루션과 LS전선, 대한전선도 일렉스코리아에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 이들 기업은 AI 데이터센터로 촉발된 전력기기 르네상스 시대 동반자다.
LG에너지솔루션은 에너지저장장치(ESS)를 홍보하는데 주력했다. AI 데이터센터에서 ESS의 역할은 폭발적인 전력 수요를 충족하고 24시간 중단 없이 안정적인 운영을 보장하는 핵심 인프라다. 글로벌 ESS 시장은 AI 데이터센터 증가에 힘입어 2030년까지 연평균 14% 고성장이 예상되는 시장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올해 ESS 생산 역량을 2배 확대한다. 전기차 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여러 가지 정책 변화로 수요가 계속 줄어들자 북미를 중심으로 ESS 판매량을 늘려 실적 반전을 이루기 위해서다.
LG에너지솔루션은 “올해 일렉스코리아는 AI 시대에 맞춰 전력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생산·공급하고 저장할 수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졌다”며 “국내 1위 배터리 기업으로 ESS의 우수성을 알리고 다른 전력기기 업체와 협업하기 위해 배터리 3사 중 유일하게 전시회에 참가했다”고 귀띔했다.
LS전선은 올해 전시회의 흐름에 맞춰 HVDC 송전 라인에 쓰일 케이블을 공개했다. HVDC로 더 많은 전력을 더욱 멀고 빠르게 전달하기 위한 전용 케이블로 글로벌 시장 점유율 확보에 나선 것이다.
LS전선은 지난해 7월 강원 동해시에 해저케이블 공장을 추가 증설해 HVDC 해저케이블 생산능력을 기존보다 4배 이상 끌어올렸다. 아시아 최대 규모의 HVDC 케이블 생산 설비로 국내는 물론 해외 일감도 다수 확보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대한전선은 부스 중앙에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에 투입이 가능한 525kV(킬로볼트)급 HVDC 해저케이블 시제품을 배치했다. 지난해 인수한 해저케이블 전문 시공법인 ‘대한오션웍스’와 현재 검토 중인 HVDC 해저케이블 전용 포설선에 대한 소개 자료도 전시했다.
송종민 대한전선 부회장은 “HVDC 기술력과 경쟁력을 기반으로 국가 전력망의 핵심인 서해안 에너지 고속로로 프로젝트 성공에 기여하겠다”며 “그동안 쌓아온 역량을 바탕으로 해외 HVDC 시장 진출을 가속화하고 글로벌 에너지 전환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도약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호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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