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딸이 '다녀왔습니다'라면서 문 열고 들어올 것 같아요"
한 달 만에 다리 깁스를 풀고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러 나갔던 둘째 딸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딸의 '다녀왔습니다'라는 인사는 이제 꿈속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이 됐다. 2년 전 이태원 참사로 세상을 떠난 고(故) 유연주 씨의 아버지 유형우 씨 이야기다.
그는 지금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딸이 더는 억울해하지 않게, 딸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참사 후 2년이 지나도록 또렷한 사고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들리는 소식은 참사 최고 책임자급 인사들의 줄 이은 무죄 선고뿐이다. 유가족들은 참사 2주기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그보다 혹독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유 부위원장은 박희영 용산구청장에 이어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는 것을 보며 "분노가 치밀었다"고 했다. 그는 정녕 정의와 양심에 따른 판결을 한 것인지 재판부에 묻고 싶다고 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몰릴 줄 몰랐다'는 말을 그대로 믿는다고 해도, 안전 관리 업무를 방관했으니 '과실치사'를 적용하는 게 맞다. 아니라면, '살인죄'다."
참사 2주기를 열흘여 앞둔 지난 18일 유 씨를 서울 중구의 이태원 참사 기억·소통 공간 '별들의 집'에서 만났다. 2주기를 앞둔 심정, 관련자들의 재판 진행 상황, 이태원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풀어나가야 할 과제 등에 대해 들었다. 다음은 유 부위원장 인터뷰 전문이다.
"유가족 두 번 죽인 '무죄' 판결…분노했다"
프레시안 : 이태원 참사 부실대응 혐의로 기소된 경찰 최고위급 인사인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이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무죄 선고에 심정이 어땠는가.
유형우 : 예상은 했지만 막상 '무죄'라고 하니까 참담했다. 사법적 판결인데 국민이 이렇게 느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아무리 가진 자들, 있는 자들을 보호하는 게 법이라고 하지만 겪고 보니 그냥 막 분노가 치밀어서….(한숨) 다른 유가족들도 '어떻게 무죄가 나올 수 있느냐', '아이들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유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기는 것이다'라며 오열했다.
안전 관리 책임자들이 10월 29일 밤 그 상황에서 대형 참사가 발생할 걸 알고도 그렇게 대응했다면, '살인죄'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몰릴 줄 몰랐다'고 했기 때문에 '과실치사'로 재판받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마저도 무죄 선고를 내린다? 정의와 양심에 따른 판결인지 묻고 싶다.
프레시안 : 재판부는 김광호 전 청장 판결문에서 "대규모 인파 사고가 발생될 여지가 있고 그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는 정보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던 걸로 보여진다"며 대응부실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유형우 : 일주일 전부터 뉴스 등에는 코로나19 이후 첫 핼러윈 데이라며 사람들이 많이 몰릴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경찰도 '10만 명 운집'을 예상하고 있었다. 또 '사탕 마약'이라든가 '마약 수사한다'라는 얘기가 많았다. 그래서 나도 딸 연주에게 '이태원에 가면 사탕 준다고 받지 말라'고 얘기했다.
'10만 인파' 예상이 나올 정도면 당연히 안전 관리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회 시스템에 대한 그 정도의 믿음은 있었다. 다만 '사탕 마약' 같은 생소한 단어가 나오니까 딸에게 '사탕 조심하라'는 말을 한 것이다. (이태원 관할 용산 경찰서는 참사 이틀 전인 10월 27일 보도자료를 내고, "이번 주말 매일 10만 명 가까운 인원이 제한적인 공간에 모일 것"이라며 "시민 불편이 가중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편집자)
물론 경찰도 인파로 인한 참사가 발생할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안전 관리에 책임을 지는 사람들 아닌가. 그런데 그날 모든 상황을 보고받은 경찰 수장이 아무 책임이 없다? 그날 밤 112 신고가 그렇게 빗발쳤는데? (서울 용산경찰서의 '10월 29일 오후 10시부터 11시까지 이태원 112 신고 현황' 자료를 보면, 10시 17분부터 11시까지 43분간 139건이 접수됐다. 이 중 120건이 이태원 참사 관련 신고로 추정되고 있다. 21초에 한 번씩 구조 요청 신호가 들어온 셈이다. 편집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몰릴 줄 몰랐다'는 말을 그대로 믿는다고 해도, 안전 관리 업무를 방관했으니 '과실치사'를 적용하는 게 맞다. 아니라면, '살인죄'다.
프레시안 : 부실대응 혐의는 같았는데 '용산구청장 무죄', '용산경찰서장 유죄'라는 엇갈린 판결도 나왔다.
유형우 : 판사가 재판 과정 중에 검찰 측에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계속 했다. 검찰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르겠지만, '안전 관리에 책임이 있다'는 확실한 자료만 보충이 됐어도 박희영 구청장에게 무죄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검찰도 징역형 7년이라는 적지 않은 형량을 구형했다. 그런데 재판부가 아예 '무죄'를 선고했다는 것은 검찰 수사가 정말 부실했거나 아니면 재판관이 의도적으로 보호해 줬거나.
검찰 수사는 경찰 특별수사본부의 수사 결과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료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특수본은 76일간 수사를 하면서 경찰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희생자들이 마약을 했나 안 했나 그런 수사만 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발표할 게 없으니까 '군중 유체화'가 참사 원인이라고 한 것 아니겠나. (특수본은 지난 1월 수사 결과 발표에서 "군중의 밀집도가 높아져 자의에 의한 거동이 어려운 군중유체화 현상" 때문에 참사가 발생했다고 했다. 군중 유체화는 '특정 공간에 사람들이 밀집하면서 군중 전체가 의지와는 무관하게 물에 휩쓸린 것 같이 움직이는 현상'을 일컫는다. 편집자)
프레시안 : '서울경찰청장 김광한 무죄', '용산경찰서장 이임재 유죄'라는 판결을 볼 때 용산경찰서 선에서 마무리하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유형우 : 그렇다. 그런데 그날 상황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참사 책임은 서울경찰청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참사 당일 서울 광화문에서는 '정권 퇴진 집회'가 열렸고 70개 기동대(약 4000명 이상)가 배치됐다. 그리고 대통령실(용산)과 대통령 자택(서초)에 각각 4개 기동대가 배치됐다. 병력 배치를 어디서 했겠는가. 서울경찰청에서 하지 않는 한 병력이 이렇게 분산되지 않는다.
만약 집회시위 대응을 위해 나갔던 경찰 버스 한 두 대만이라도 이태원에 보냈다면, 이런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밤 10시 이전에 집회가 끝나자, 병력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이태원 112 신고가 빗발치게 들어왔는데 몰랐다? 너무 너무 답답하다, 그런 게.
"희생자 중 '마약사범' 있을까 봐 '사과'하지 않은 건가"
프레시안 : 유가족들은 법원의 잇단 무죄 판결을 두고 '검찰의 부실 수사'와 '법원의 소극적 법 해석' 결과라고 지적했다.
유형우 : 사실 법원의 재판 과정은 참사 이후 꾸려진 '10.29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특별조사위원회' 보다도 못하다. 안전 관리에 책임이 있는지 없는지, 책임 소재를 따지는 재판만 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아주 소극적인 재판이고, 기본도 안 된 재판이다.
박희영을 비롯한 용산구청 간부들이 참사 후 휴대폰을 분실했다고 주장하며 증거인멸을 시도한 정황이 포착돼 특수본의 구속 사유가 됐는데도 재판에서는 이를 따져 묻지 않았다. 또 정보보고서 삭제 의혹으로 수사를 받던 용산경찰서 정보계장이 숨지면서 윗선 책임론이 떠올랐지만 수사와 재판은 그 이상 이뤄지지 않았다. 헌법재판소도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탄핵 심판을 소극적으로 했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참사 발생 직후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사흘 만인 11월 1일)이나 한덕수 국무총리(아흐레 후인 11월 7일)가 사과를 했다. 하지만 국회에서 등 떠밀려 한 사과라는 평이 있었다.
유형우 : 유가족들을 만나서 참사 당일 상황에 대해 '이렇게 이렇게 됐습니다'라고 설명하면서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라고 말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한덕수 총리가 녹사평 합동분향소를 찾아온 적이 있는데, '진정으로 사과하러 왔느냐'라고 물었더니 '총리로 온 게 아니라 개인적으로 왔습니다' 해서 쫓겨난 적이 있다.
밤새 긴급 비상대책회의를 했다던 윤석열 대통령이 참사 다음 날 현장에 와서 '뇌진탕'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나. 윤 대통령이 '사과'를 했다고 하는데, 불교계 추모 위령법회(11월 4일)에서 했지 유가족들 앞에서는 안 했다. 희생자 애도도 정부가 일방적으로 선포한 애도기간(10월 30일~11월 5일)에 시청 앞에 마련된 '사망자' 합동분향소를 찾은 것뿐이었다. 영정도 없었고 근조리본도 달지 못하게 했다. '사고'라고 했고, '사망자'라고 표현했다.
일련의 상황을 보면, 대통령에게는 밤새 마약 수사 관련 보고가 올라갔던 게 아닐까 싶다. 마약 수사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참사 이후 특수본 수사에서도 유가족들에게 '마약 부검'을 요구했던 것 아닐까. 또 핼러윈 참여자들을 잠정적인 용의자로 보는 상황에서 희생자 중 마약사범이 있다고 가정했다면, 그들 입장에서는 정부의 사과라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었을 것이다. (서울경찰청은 참사 전날인 10월 28일 '마약류 범죄 단속 예방' 지침을 하달하고 참사 당일 이태원에만 10개팀 52명의 폭력계 형사를 배치했다. 편집자)
프레시안 : 설령 용의자라고 해도 국가 책임으로, 사회적 잘못으로 참사가 발생했다면 사과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유형우 : 그렇다. 그래서 생각할수록 우리 아이들이 경찰 마약사범 검거의 희생양이었던 것 같다. 경찰은 그날 해밀턴호텔 옆 골목에 있던 사람 모두를 실적 쌓기로만 본 것 아닐까 싶다.
유가족 여럿이 경험한 일인데, 참사 당일 구급대원들이나 경찰들이 부상자만 구급차에 싣고 보호자는 태우지 않았다. '부모다' '형제다'라고 얘기하고 신원을 밝혀도 보호자를 태우지 않았다. 어느 병원으로 가는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딸 연주 소식을 듣고 강남성모병원으로 달려갔더니, 아이에게 손도 못 대게 했다. 병원에 갔을 때는 사망 진단이 나온 지 20~30분밖에 안 됐을 때였다. 침대에 누워있는 연주를 흔들어 깨우고 싶었다. 그런데 아이 손도 못 잡게 했다. 의사에게 '장기기증을 하고 싶다'고 했는데도, '사망 선고가 떨어졌기 때문에 장기기증은 안 된다'고 했다. 사망 후 장기기증은 안 되는 건지, 용의자로 여겨서 장기기증이 안 된다고 한 건지 궁금하다. 이렇게 지난 2년간 겪은 일 모두가 아직도 의혹 투성이다.
"만약 21대 국회에서 '생명안전기본법'이 제정됐다면…"
프레시안 : 그래서 의혹을 밝혀 달라고 '10.29 이태원참사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에 '1호 진상규명 조사신청서'(1호 진정)를 낸 것 아닌가.
유형우 : 유가족 모두는 10월 29일 밤 해밀턴호텔 골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경찰·소방·행정 인력 등 안전 책임자들은 왜 자신들의 책임 의무를 소홀히 했는지, 그날의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특히 형사처벌 중심의 수사·재판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은 참사의 원인을 알고 싶다.
이 내용을 1호 진정에 담았다. △대통령실 이전에 따라 경찰, 지자체 등 인력이 대통령실 관련 업무에 집중되면서 참사에 미친 영향, △경찰이 인파 관리가 아닌 마약 범죄 단속에 중점을 둔 이유, △참사 이후 가족에게 정보제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이유, △희생자 159명이 가족들에게 인계되기까지의 행적, △참사 현장에 배치된 각 기관별 인원 및 역할의 적절성을 밝혀 달라 등 9가지 요구가 담겨 있다.
송기춘 특조위 위원장이 '철저하게 진상규명에 임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지만, 동시에 '쉽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하고 있다. 조사 자체가 현 정부를 조사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어디까지 얼마나 밝힐 수 있을까 난색을 표하는 것 같다.
유가족들 입장에서는 특조위가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가게 되면 공무원들이 당시 상황에 대한 증거나 자료를 공익제보해 주길 바라고 있다. '내가 제보한다고 세상이 바뀔까'라며 정의를 내려놓는 순간 증거나 자료는 사라질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부탁드린다.
프레시안 : 가습기살균제 참사,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특별법'을 만들 게 아니라 사회적 재난 참사를 '일반법'으로 다뤄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유형우 : 그 내용이 21대 국회에서 폐기된 '생명안전기본법'에 들어있다. 사회적 재난 참사가 발생했을 때 책임 소재를 밝힐 제도적 장치를 명시한 법인데, △상설 독립 조사기구 설치, △ 안전영향평가제 도입, △안전 정보 공개, △피해자 보호 조항 등이 담겨 있다. 22대 국회에서 다시 발의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만약 21대 국회 초반인 2020년 '생명안전기본법'이 제정됐다면, 가습기살균제·세월호 참사를 조사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의 권고대로 2022년에 독립적 상설 재난 조사기구인 '(가칭)중대재난조사위원회'가 설립됐다면, 유가족들이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을 마련해 달라고 삭발하고 단식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10.29 이태원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법'은 참사 1년 6개월만인 지난 5월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월 더불어민주당이 단독 처리한 특별법에 대해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했다. 편집자)
"연주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살고 싶다"
프레시안 : 참사 당일 상황에 대해 듣고 싶다. 둘째 딸 연주 소식은 어떻게 들었나.
유형우 : 그날은 연주가 한 달 동안 하고 있던 다리 깁스를 푼 날이었다. 병원을 다녀와서 한숨 자고 일어나더니, 친구들하고 이태원에 가서 밥 먹기로 했다고 해서 '재밌게 놀다 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둘이 같이 오목을 뒀다.
아내랑 나는 오후 4시 반쯤 연주보다 먼저 집을 나왔다. 연주는 아마 오후 6시 조금 넘어 집을 나섰던 것 같다. 집은 청구역(5호선·6호선)인데, 다음 역인 약수역(3호선·6호선) 화장품 가게에서 계산을 했더라. 이태원에는 오후 7시에서 7시 30분쯤 도착한 것 같다. 아이폰 클라우드에 저장된 사진 시간을 보니, 친구들과 만나 저녁을 먹고 음식점에서 나온 시간은 오후 9시 반 정도였다.
아내랑 나는 광화문과 시청 등지에 있다 밤 11시 20분께 집에 들어왔다. 그런데 TV 화면에 빨간 글씨로 '이태원 사고 발생'이라는 자막이 떴다. 한 10분 지나니까 '전원 구조' 속보가 나오더니, 곧바로 '사상자 50명'이라는 자막이 떴다. 그래서 연주에게 전화를 했다. '학교 기숙사에 돌아갔을 시간인데'라고 생각하면서…. 그때가 오후 11시 30~40분쯤이었다. 하지만 연주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불안이 엄습해 왔다. 아내랑 집을 나서긴 했는데, 지하철이 끊긴 시간이라 택시가 잘 안 잡혔다. 경찰차가 있길래, 딸이 이태원에 갔다고 얘기하면서 한강진(6호선)까지만이라도 데려다 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그때 연주 엄마 휴대폰으로 학교 기숙사에서 전화가 왔고, 연이어 강남성모병원에서도 전화가 왔다.
차도로 뛰쳐나가 막무가내로 지나가는 차를 붙잡고 도와달라고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연주가 어디 다친 줄로만 알았다. 병원에 도착하니 경찰관이 응급실 바깥 쪽 복도로 이끌었다. 그러더니 '얼굴만 확인하라'고 했다. 이미 '사망했다'며 손도 못 대게 했다.
프레시안 : 딸의 부재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유형우 : 아내도 저도 너무 힘들었다. 연주의 장례를 치르고, 150일 정도는 성당에서 살다시피 했다. 기도를 하고 또 했다. 그렇게 '연주가 좋은 곳으로 갔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연주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겠다는 생각으로 협의회 일도 맡게 됐다.
연주는 어릴 때부터 당찬 아이였다. 경찰이 꿈이었다. 경찰대학은 못 갔지만, IT를 전공해 경찰 사이버수사대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지난 2월 연주를 대신해 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았는데, 딸이 마무리하지 못한 걸 대신이긴 하지만 한 것 같았다. 그저 감사했다.
지금도 '아빠, 뭐 먹고 싶어요' 하면서 조를 것 같고, '아빠, 다녀왔습니다'라면서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다. 꿈속에서는 연주와 맛있는 것도 먹고 오목도 두고 하고 싶은 걸 다 한다. 꿈을 꾸면서도 '이게 현실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눈을 뜨면 현실은 답답하고 막막하고….
159명 모두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그런 아이들이다. 유가족들이 활동하고 투쟁하는 것은 먼저 간 아이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아이들을 위해, 또 미래의 아이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프레시안 : 평범했던 삶이 그날 이후 바뀌었다. 스스로도 변화가 느껴지나.
유형우 : 이 사회의 피해자로, 역사적 현실을 마주해 보니 '그동안 외면만 하고 살았구나' 싶어 부끄러웠다. 사회 구성원으로,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냈다면 이렇게 부끄럽지는 않았을 것 같다. 반성하게 된다.
지난 2년을 겪어 보니 내 자리에서 내 일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더라. 내 일만 해서는 어떤 변화도 만들 수가 없더라. 나를 위해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으로 참여해야 변화도 일어난다. 연주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살고 싶다. 용기 내서 외면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세상은 바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명선 기자(overvie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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