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자고 오래 버티는 기록, 기네스북에서 빠진 이유 [물리학자 김상욱의 ‘격물치지’]
기적의 신약이 개발되었다. 기억력과 창의력을 높여주고 암과 치매를 예방한다. 식탐이 줄고 피부가 매끈해지고 몸매도 날씬해진다. 면역력을 높여 감기와 독감을 막아주는 것은 물론이고 심장마비, 당뇨병도 줄여준다. 더구나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기분도 좋아진다. 이런 신약이 있다면 금방 품절될 것이다. 이 신약의 이름은 ‘잠’이다. 2023년 기준 한국인의 평균 수면 시간은 7시간41분으로 OECD 국가 중 꼴찌다. “아니, 우리가 평균 7시간 이상 잔다고?” 하며 놀랄 사람도 있을 거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잠이 부족하다. 잠이 부족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니, 애초에 잠은 왜 자는 걸까?
선사시대 인간은 추위와 어둠 속에서 태양이 뜨기만을 기다렸을지 모른다. 태양과 빛은 어느 문명에서나 중요한 존재다. 기독교의 성경은 신이 어둠 속에서 빛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빛이 없는 밤을 좋아한 문명은 없는 듯하다. 빛이 없으면 인간은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밤을 밝힐 전등이 없던 과거에는 밤에 잠을 자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로저 에커치의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는 서양의 밤 역사에 대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준다. 중세 서양인은 요정이나 사탄, 유령이 실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주로 밤에 활동했다. 밤에는 아무래도 잘 보이지 않아 유령을 봤다고 착각하기 쉬웠으리라. 당시 의학에서는 밤의 습한 공기가 독감·열병·폐결핵 같은 질환의 원인이라 여겨, 사람들은 창문과 문을 꼭꼭 닫았다. 안타깝게도 이 때문에 통풍이 제대로 되지 않아 바이러스와 세균이 가족 사이에 쉽게 전파되었다.
전근대 시대에는 마을이나 도시 주변을 제외한 지역 대부분이 아직 개발되지 않아 야생의 숲과 같았다. 이곳은 사나운 개울, 가파른 둔덕, 위험한 웅덩이, 무자비한 도적으로 가득한 장소였다. 여기를 밤에 지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사람이 많은 도시라고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다. 범죄와 폭력, 화재는 항상 존재하는 위협이었다. 실제 영국의 도시와 마을은 거의 매년 크고 작은 화재를 경험했는데, 이는 도시가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재앙이었다. 농촌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초가지붕에 불이 붙으면 끄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방화도 빈번했다.
범죄와 방화를 막기 위해 야간통행을 제한했는데,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그 정도가 좀 지나쳤다. 밤에 이유 없이 길을 가다가는 감옥에 가거나 벌금을 내야 했으며, 무기라도 소지했다가는 갤리선에 노예로 보내질 수도 있었다. 특히 여성은 대개 밤에 집 밖에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는데, 밤에 다니다가는 창녀로 오해받아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었다. 밤을 지키는 야경꾼이 있었는데, 사실 이들이야말로 잠을 방해한 말썽꾼인 경우도 많았다.
커피의 각성 효과, 공짜 아니다
근대과학의 탄생은 밤의 일상에 변화를 주었다. 우선 사람들은 점차 유령 같은 것을 믿지 않게 되었다. 유해하다고 생각했던 밤공기도 이제는 상쾌하고 신선하다고 여겨졌다. 무엇보다 가로등은 밤의 모습을 바꾸었다. 18세기 고래기름, 19세기 석탄가스, 20세기 전기를 이용한 가로등이 밤의 어둠을 몰아내자 이제 밤은 사교와 오락, 누군가에는 야간 노동의 시간이 되었다. 인간은 밤을 정복했지만 대가로 잠을 빼앗겼다. 아마 수면 부족은 근대의 예기치 못한 슬픈 발명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잠을 줄이는 유일한 동물이다.
모든 동물은 잠을 잔다. 상어·전갈·개구리는 물론이고, 파리나 지렁이도 잠을 잔다. 잠을 못 자면 치명적인 문제가 일어난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하는지 완전히 알지 못한다. 사실 진화의 역사에서 움직임을 제어하는 신경계가 먼저 생기고 의식은 뒤늦게 나타났을 것이다. 즉, 의식이 없는 잠과 같은 상태에서 의식이 있는 각성의 상태가 출현했을 거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잠을 자는지 물을 것이 아니라, 왜 깨어 있게 되었는지 물어야 하는 게 아닐까?
밤이 있으니 자는 게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밤이 없어도 잔다. 사람을 격리하여 시간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실내조명만으로 생활하도록 하면, 여전히 규칙적으로 잠을 자며 대략 24시간 주기의 일상을 산다. 우리 몸 안에 외부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시계가 있다는 뜻이다. 이를 생체시계라 부른다. 생체시계의 원리 발견에 2017년 노벨상이 주어지기도 했다. 즉, 잠은 우리의 본성이다.
잠은 생화학적으로 멜라토닌과 아데노신이라는 두 가지 물질이 작용하여 만들어낸다. 멜라토닌 농도가 높아지면 몸 전체에 잠을 자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멜라토닌 농도는 주기적으로 변하는데, 밤에 높고 낮에 낮다. 새벽에 빛이 눈에 닿으면 멜라토닌 분비가 차단된다. 외국 여행으로 시차가 생기면 멜라토닌 농도 주기가 서서히 바뀌는데, 잘해야 하루에 한 시간 정도다. 따라서 유럽에 가서 생긴 7시간 정도의 시차에 적응하는 데 일주일이 걸린다. 물론 그때쯤이면 귀국해야 하지만 말이다.
아데노신은 깨어 있는 동안 계속 증가하는 물질이다. 잠을 자야 줄어든다. 즉, 아데노신이 쌓이면 점점 피로하고 졸음이 온다. 커피의 카페인은 아데노신 수용체에 결합하여 아데노신 신호를 방해한다. 그러면 아데노신이 쌓여 잠이 절실히 필요해도 피로와 졸음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커피가 주는 각성 효과는 공짜가 아니다. 카페인은 피로한 육체를 속이고 우리를 일로 내모는 물질이다. 밤을 꼬박 새우면, 몸에 아데노신이 가득 차서 극도의 졸음을 느껴야 한다. 하지만 아침이 되면 멜라토닌이 줄어들어 일시적으로 정신이 또렷해질 수 있다. 잠은 멜라토닌과 아데노신의 협업으로 얻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적정한 수면 시간은 8시간 정도라고 한다. 적어도 7시간은 자야 문제가 없다. 침팬지나 원숭이 같은 영장류의 경우 보통 10~15시간을 자니까 인간은 잠을 안 자는 동물이기도 하다. 8시간이라도 사람마다 자는 시간의 패턴이 다르다, 즉, 새벽에 일하는 아침형 인간과 밤에 일하는 저녁형 인간이 있는데, 이는 유전자에 의해 태어날 때 결정된다. 지금은 아침형이 권력을 잡고 있다. 아침형은 저녁형을 보며 늦잠 잔다고 놀리지만, 늦은 밤까지 깨어 있지도 못하는 약골이다. 모두가 동일한 시간 패턴이 아닌 것이 선사시대 인류에게는 생존에 유리했을 수 있다. 모두가 일시에 잠드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조류의 잠은 특별하다. 뇌는 좌뇌·우뇌 두 부위로 구성되는데, 새는 뇌의 절반만 잘 수 있다. 물론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좌뇌가 잘 때 좌뇌와 연결된 오른눈을 감고, 왼눈은 뜬 채 잔다. 나뭇가지에 10여 마리 새가 나란히 앉아 자는 경우 양쪽 끝의 두 마리만 깨어서 망을 본다. 오른쪽 끝의 망보는 새는 오른눈만 뜨고, 왼쪽 끝의 새는 왼눈만 뜬 채 잔다. 시간이 지나면 망을 보는 두 마리 새가 뒤로 돌아앉으며 감았던 눈을 바꾼다. 사실 철새는 대양을 날아가는 동안 거의 잘 수 없는 상황이 되는데, 뇌의 반씩 자는 능력이 도움된다고 한다. 대양을 날아가는 철새조차 날갯짓을 하면서도 자는 것을 보면 잠은 꼭 필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위험해서 〈기네스북〉에 제외된 기록
19시간 정도 깨어 있은 후 (오전 7시에 일어났다면 다음 날 새벽 2시쯤) 운전을 하면 음주 운전 단속 수준의 인지장애를 보인다. 또, 수면이 부족해지면 교감신경계가 과잉 반응하게 되어 혈압이 높아진다. 이는 심장마비나 뇌졸중 발생 확률을 높인다. 수면 부족은 면역력을 약화하고 비만이나 알츠하이머도 유발할 수 있다. 잠을 자는 동안 뇌와 신체의 여러 기능이 회복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 자고 오래 버티는 기록은 〈기네스북〉에서 제외되었다.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다. 수면 시간이 짧아지면 수명도 짧아진다.
잠은 크게 렘수면과 비렘수면으로 나뉜다. 대개 렘수면 중에 꿈을 꾸는데, 조류와 포유류만이 온전한 렘수면을 가진다. 개구리나 바퀴벌레는 꿈을 꾸지 않을 거란 이야기다. 비렘수면은 꿈을 꾸지 않는 깊은 잠을 포함한다. 우리 뇌는 깨어 있는 동안 수많은 정보를 받는데, 이 정보는 뇌의 ‘해마’라고 불리는 곳에 일시 저장된다. 잠을 자는 동안 해마를 비워서 다음 날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따라서 잠을 충분히 자지 않으면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진다. 깊은 잠을 자는 동안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바꾼다. 따라서 애써 공부한 내용을 이튿날 잊어버리기 싫다면 잠을 푹 자야 한다.
꿈에 대해서 아직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는 않지만, 기억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재조합하고 편집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특히, 꿈에 정신적 치유 효과가 있다는 증거가 있다. 트라우마가 될 만한 고통스러운 기억은 시각·청각·촉각 등으로 이루어진 사건 기억과 나쁜 감정으로 구성된다. 꿈은 나쁜 감정을 배제한 사건 기억만 되새기도록 하여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해주는 듯하다. 시간이 지나면 안 좋은 기억이 추억으로 바뀌는 이유가 꿈에 있을지 모른다는 뜻이다.
현대인에게 잠은 적이다. 우리는 날마다 커피를 입에 들이부으며 잠과의 전쟁을 치른다. 하지만 잠은 뇌의 기억공간을 확보하고,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바꾸고, 나쁜 경험을 좋게 만들어주며, 몸을 회복하고 면역을 좋게 만드는 최고의 보약이다. 행복을 위해 안 자고 일하느니 그냥 자는 게 행복한 삶을 누리는 데 더 도움이 된다는 결론이다.
※ 참고도서: 〈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할까〉 매슈 워커 지음, 열린책들 펴냄, 2019
김상욱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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