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이 창업주 신격호 회장의 보수적 무차입 경영에서 신동빈 회장 체제의 공격적 확장 전략으로 전환한 결과, 한때 재계 5위까지 올랐던 그룹이 차입금 30조원에 육박하는 심각한 재무위기에 직면했다.

▶▶ 신격호의 무차입 원칙, IMF도 '무상처' 통과
신격호 명예회장은 평생 "무차입 경영"을 경영 철학의 중심에 뒀다. 그는 "몸에서 열이 나면 병이 나고 심하면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기업에 있어서 차입금은 우리 몸의 열과 같다. 과다한 차입금은 만병의 근원"이라고 강조하며 빚을 내지 않는 자생적 성장 방식을 고수했다.
이러한 무차입 경영 원칙은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그 진가를 입증했다. 당시 30대 그룹 중 19개(63%)가 순위권에서 이탈하거나 사라지는 등 경제 위기의 여파가 컸지만, 롯데는 낮은 부채비율 덕분에 구조조정이나 인원 해고 없이 위기를 넘겼다. 오히려 이 시기를 기회로 전환하며 재계 순위 11위에서 5위까지 급상승했다.
신격호 회장이 구축한 현금 부자 기업의 토대는 롯데가 외환위기를 무상처로 통과하는 핵심 자산이었다. 그는 "왜 회사를 남한테 주려고 하느냐"며 상장을 거부할 정도로 실리 추구와 재무 건전성을 중시했다. 이런 경영 철학은 롯데를 2000년대 초반까지 재계에서 가장 탄탄한 재무구조를 가진 그룹으로 만들었다.
▶▶ 신동빈의 '빚내서 키우기', M&A 10조 돌파
2011년 그룹 회장직에 오른 신동빈 회장은 아버지와는 정반대 노선을 택했다. 글로벌 시장 진출과 신규 사업 확장을 위해 대규모 자본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차입 경영"**을 핵심 기조로 삼았다. 2004년부터 그룹 정책본부장으로 활동하며 이미 공격적인 M&A를 주도한 경험이 있었다.
신동빈 회장 체제에서 단행된 주요 M&A는 다음과 같다. 2010년 GS백화점·마트를 1조 3,400억원에 인수했고, 같은 해 바이더웨이를 2,740억원에 인수했다. 2012년에는 하이마트를 1조 2,480억원에 사들였다. 2021년에는 일진머티리얼즈를 2조 7,000억원에 인수하며 2차전지 소재 사업에 진출했고, 같은 해 한국미니스톱을 3,134억원에, 한샘에 약 3,000억원을 투자했으며, 중고나라에도 300억원을 투자했다.
2010년 이후 2016년까지만 해도 롯데는 28건, 9조 7,583억원 규모의 M&A를 단행하며 30대 그룹 중 가장 적극적인 인수합병 전략을 펼쳤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롯데는 과거 신격호 회장이 금기시했던 회사채 발행과 차입금 확대를 적극 활용했다.
▶▶ 롯데케미칼 '효자'에서 '골칫거리'로, 3년간 2조 적자
롯데케미칼은 한때 그룹의 효자 회사였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연간 1조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그룹의 현금창출 원천이었다. 2015년 매출 11조 7,133억원에 영업이익 1조 6,111억원을 기록했고, 2016년 영업이익 2조 5,443억원, 2017년 영업이익 2조 9,297억원으로 정점을 찍었다. 2018년에는 매출 16조 5,450억원, 영업이익 1조 9,686억원으로 사상 최대 매출을 달성했다.
하지만 2020년 이후 상황이 급변했다. 중국의 공격적인 석유화학 설비 확대로 글로벌 공급 과잉 상태가 발생했고, 중국의 에틸렌 자급률이 높아지면서 롯데케미칼의 주요 수출 시장이 붕괴했다. 2020년 영업이익은 3,569억원으로 급감했고, 2021년 1조 5,356억원으로 일시적 회복을 보였으나, 2022년 영업손실 7,626억원을 기록하며 첫 적자로 전환했다.
이후 적자는 가속화됐다. 2023년 영업손실 3,477억원, 2024년 영업손실 8,948억원으로 3년 연속 적자를 이어갔다. 2025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아 1분기 영업손실 1,266억원, 2분기 영업손실 2,449억원으로 7개 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3분기에도 영업손실 약 1,307억원이 예상되며 적자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롯데케미칼의 국내 에틸렌 생산능력은 연간 233만 톤으로 LG화학 다음으로 높지만, **범용 제품(PE, PP, BTX) 비중이 46.4%**에 달해 고부가 스페셜티 제품으로의 전환이 늦었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중국이 석유화학 공장을 대규모로 증설하면서 에틸렌 스프레드(수익성 지표)가 손익분기점인 톤당 300달러를 한참 밑도는 구조가 고착화됐다.
신동빈 회장이 야심차게 추진한 2조 7,000억원 규모의 일진머티리얼즈 인수도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전지박 시장 침체로 실적이 악화되면서 인수금융 연장 사태까지 발생했다. 인도네시아 라인 프로젝트(3조 1,000억원) 등 대규모 투자도 수익을 내지 못하며 차입금만 불렸다.
▶▶ 차입금 30조 육박, 신용등급 강등에 '유동성 위기설'까지
신동빈 회장의 공격적 M&A는 차입금 급증으로 이어졌다. 롯데지주, 호텔롯데, 롯데케미칼 등 주요 계열사 3곳의 총 차입금은 2024년 상반기 기준 29조 9,509억원으로 30조원에 육박했다. 롯데그룹 전체 순차입금은 2020년 28조원에서 2024년 말 40조원으로 급증했고, EBITDA 대비 순차입금 비율도 4배에서 7.7배로 악화됐다.
특히 롯데케미칼의 차입금은 2021년 6조 8,000억원에서 2022년 8조 5,000억원, 2023년 9조 2,000억원, 2024년 상반기 9조 7,000억원으로 폭증했다. 부채비율도 2022년 55%에서 2023년 65%, 2024년 73%로 악화됐다. 롯데케미칼의 현금 창출력을 나타내는 EBITDA는 2023년 8,248억원에서 2024년 3,965억원으로 약 48% 급감했다.
2024년 6월, 국내 신용평가 3개사(한국신용평가, 한국기업평가, 나이스신용평가)는 일제히 롯데케미칼의 신용등급을 'AA(부정적)'에서 'AA-(안정적)'으로 한 단계 하향 조정했다. 이에 따라 그룹 지주사인 롯데지주의 신용등급도 'AA-(부정적)'에서 'A+(안정적)'으로 하향되었고, 롯데물산, 롯데캐피탈, 롯데렌탈의 등급도 동반 하락했다.
롯데지주의 별도기준 순차입금 의존도는 2024년 39.7%, 이중레버리지 비율은 171.7%로 위험 수준을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자보상배율(EBITDA/이자비용)도 2021년 3.2배에서 2023년 0.9배로 급락했다. 이자보상배율이 1 이하라는 것은 영업활동으로 창출한 이익으로 이자비용도 충당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의미다.
2024년 말 기준 공정거래위원회 집계 롯데그룹의 자산총액은 130조원, 부채총액은 77조원에 달했다. 매출 67조원에 당기순이익은 1조원에 그쳤다. 연말 기준 총차입금은 39조원으로 본업만으로는 상환하기 어려운 구조가 됐다.
2024년 11월부터는 '유동성 위기설'이 시장에 확산되며 롯데그룹이 모라토리엄(채무 불이행)을 선언할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나왔다. 롯데그룹은 "현재 부동산 가치와 가용 예금만 71조 4,000억원에 달하며 안정적인 유동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설명 자료를 배포하며 진화에 나섰지만, 한국신용평가는 "실질적인 변화가 없다"며 냉랭한 평가를 내놓았다.
위기감 속에 신동빈 회장은 직접 경영 전면에 나섰다. 최근 롯데쇼핑 사내이사로 복귀한 신 회장은 노준형 경영혁신실장 사장과 함께 자산 매각에 적극 개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그룹 임원들과 외부 자문사들은 "우리가 봐도 아까운 매물을 내놓아야 시장에서 산다"며 신 회장을 설득했고, 작년과 달리 이러한 의견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신격호 회장의 무차입 경영은 IMF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재계 5위까지 성장하는 원동력이었다. 반면 신동빈 회장의 차입 기반 공격적 확장 전략은 단기적으로 그룹 규모를 키웠으나, 주력 사업(화학·유통)의 동시 부진과 M&A 실패가 겹치며 30조원대 차입금 부담과 신용등급 하락이라는 위기를 초래했다.
특히 롯데케미칼은 중국의 에틸렌 자급률 상승과 공급 과잉이라는 구조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2022년부터 3년 연속 총 2조원 이상의 영업손실을 기록하며 그룹 재무건전성의 최대 위협 요인이 됐다. 롯데는 현재 비핵심 자산 매각과 구조조정을 통한 생존 전략을 모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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