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넘는 수단이 배와 비행기뿐인 나라에서 온 여행객에게 이곳의 기차는 지금껏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차원의 수단이 된다. 읽을 수 없는 글자들이 분 단위로 움직이는 전광판, 세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많은 정차역과 종착역, 일상처럼 이루어지는 국경의 이동. 이국의 기차역에서 나는 내가 떠나와 있는 이방인임을 절감한다.
브로츠와프행 기차에 탑승해 예약한 좌석을 찾아 앉으니 출발시간에 정확히 맞춰 출발했다. 얼마쯤 지나 직원이 지나가며 티켓 검사를 했다. 큐알 코드를 인식하고 몇 초. 확인이 되었다는 알람이 딸랑 울렸다. 이런 이동 시간에 읽으려고 산 『모우어』인데. 잘 찾았고, 잘 탔고, 이대로 잘 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니 긴장이 풀려 독서는커녕 이동하는 내내 잠만 잤다.

기차로 도시를 이동할 때 가장 편리한 점은 외곽에 위치한 공항까지 탑승 시간 여유를 두고 이동해야 하는 그 모든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게다가 기차역은 대부분 도시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이동도 편리하다. 프라하에서 출발한 지 약 4시간 정도 지나 브로츠와프 중앙역에 도착했다. 플랫폼이 몇 개 되지 않는 아담한 역사를 빠져 나오니 병아리 색의 중앙역을 마주한 소담한 도심 풍경이 펼쳐졌다. 가 본 적 없는 러시아와 가 본 적 있는 일부 동유럽 국가가 섞인 듯한 첫인상, 그러나 포근한 날씨 덕에 뭔지 모를 묘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중앙역에서 트램으로 다섯 정거장쯤 지나면 브로츠와프의 구시가지에 다다른다. 예약한 호텔은 구시가지의 초입에 있었는데, 중앙역에서 세 정거장쯤 지났을 때 벨을 눌러 하차했다. 그러니까 일부러 걷기 위해 굳이 조금 일찍 내렸다는 뜻이다. 한 손으로 지도를 확인하고, 다른 한 손으로 캐리어를 끌고. 단 몇 분이라도 빨리 느끼는 이 땅의 감각. 내가 하는, 내가 해야 하는 여행은 걷기와 동의어로 치환될 수 있다.

이제 이 횡단보도만 건너면 호텔이구나.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 서 있었더니 저만치에서부터 달려오던 대형 트럭이 속도를 줄여 멈춰 섰다. 운전석을 쳐다보니 먼저 지나가라는 손짓을 보내왔다. 고개를 살짝 끄덕여 웃으며 감사 인사를 대신했다. 브로츠와프를 좋아하라고 첫 시작부터 이러는 건가 싶었는데 이후 여행을 하며 깨우쳤다. 브로츠와프뿐 아니라 폴란드 어느 도시를 가도 보행자가 서 있으면 운전자들이 일단 차를 멈춰 세운다는 걸. 양보도, 배려도 아닌 그저 이곳의 당연한 상식이라는 걸.
기차에서 꽤 잤는데 아침 일찍 서둘러 욕심껏 프라하를 돌아봤던 탓일까. 아직 어두워지지도 않았고, 저녁도 먹지 않았는데 호텔 체크인을 마치고 짐을 정리하고 나니 피곤함이 밀려왔다. 여행을 떠나오면 늘 언제나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더없이 바빠지고 마는데 이제 막 브로츠와프에 도착했고, 내일도 이곳에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니 무리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책을 조금 읽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이날의 잠은 무척이나 달고 길고 깊었다.
다음날 아침. 개운하게 자고 일어나 조식을 먹고 구시가지 올드타운으로 향했다. 오늘 할 일은 올드타운을 꼼꼼하게 돌아보고, 폴란드 대표 음식 중 하나인 피에로기를 먹고, 열심히 걸으며 이 도시를 흡수하는 것. ㄱ자로 꺾인 길을 건너 조금 걷자 구시가지 올드타운 마켓 광장이었다. 그리고 나는 떡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폴란드에서 세 번째로 큰 광장이라더니 이 광장을 채우는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 너무나 아기자기하고 너무나 예뻤다. 각기 다른 지붕의 모양과 고심해서 골라 칠했을 각각의 파스텔 톤 색깔은 아기자기하고 예쁘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아니, 이렇게 좋다고?' 감탄이 터져 나왔다. 옛 시청을 둘러싼 이 광장은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다. 때마침 이어폰으로 흘러나온 옛날 노래, 내 10대를 휘저었던 곡 S.E.S.의 <Love>가 시작되자 지나치게 행복해서 울고 싶어졌다. 솔직히, 실제로 눈물이 찔끔 맺혔다. 이런 감정을 유려한 언어로 정의내릴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일상성의 계산을 삭제한 하루를, 예측을 뛰어넘는 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노래를 들으며 시작하는 것.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네.
글/사진 백지은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며 덕질하는 게 유일한 취미인 3n살 덕후. 종종 여행하고, 가끔 글을 씁니다. 『보라하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을 쓰고, 『규슈단편』을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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