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니 9출루의 밤, 프리먼 한 방으로 마침표…다저스 18이닝 혈투를 이겼다

야구는 가끔 한 사람의 스윙이 밤의 공기를 바꾼다. 다저스타디움의 시계가 자정을 향해 미끄러지던 순간, 프레디 프리먼의 방망이는 그 공기를 갈랐다. 그러나 이 경기를 지배한 그림자, 더 정확히 말하면 토론토가 끝내 직시하지 못한 공포는 오타니 쇼헤이였다. 2홈런, 2루타 2개, 볼넷 5개, 총 9번의 출루. 종이 위 숫자만 보면 도무지 믿기지 않는데, 현장에서 느껴진 감각은 더 간단했다. 첫 타석 2루타가 터졌을 때부터, 상대 마운드는 한 명의 타자를 중심으로 작전판을 다시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새로 적은 판에서 오타니를 상대한 투수들은, 대부분 결국 그를 상대하지 않기로 했다. 야구는 선택의 스포츠다. 토론토는 계속해서 오타니를 피하는 선택을 했다. 그 선택이 왜 그토록 집요했는지, 18이닝 동안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사실 요약부터 놓고 보자. 다저스가 월드시리즈 3차전을 6시간 39분, 18이닝 혈투 끝에 6대 5로 가져갔다. 시리즈는 2승 1패가 되었고, 극적인 결말은 18회말 프리먼의 끝내기 홈런이었다. 선발 글래스노우가 4회에 흔들리며 4실점을 헌납했지만, 다저스 불펜은 10명이 돌아가며 버텼고, 마지막엔 무명의 오른손 윌 클라인이 4⅓이닝을 던져 무실점으로 경기의 숨을 붙들었다. 반대편 토론토도 9명의 투수를 쏟아부었다. 경기가 길어질수록 하나의 패턴이 선명해졌다. 오타니에게 장타를 맞느니 차라리 1루를 주자. 그래서 9회, 11회, 13회, 15회에 이어 17회까지 고의4구 혹은 사실상의 거르기. 통계적으로는 비겁해 보일 수 있으나 현장에서는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다. 문제는 이 해법의 전제다. 뒤를 치는 베츠와 프리먼이 계속 실패해줘야 한다는 조건 말이다. 야구가 길어질수록 해법은 해석으로 바뀌고, 해석은 불안으로 변한다. 토론토가 마지막까지 떨었던 이유다.

해석의 중심에는 오타니의 9출루가 서 있다. 단일 경기 9출루는 포스트시즌 최초고, 정규시즌을 포함해도 타이 기록이다. 그런데 이 숫자가 의미하는 바는 단지 ‘많이 나갔다’가 아니다. 장타 4개(홈런 2, 2루타 2개)로 토론토의 마운드를 뿌리째 흔들어놓은 뒤, 상대의 선택지를 사실상 하나로 수렴시켰다는 점이 핵심이다. 7회 동점 솔로포는 경기를 원점으로 돌렸고, 그 직후부터 토론토는 전술적으로 굳었다. 9회부터 시작된 일련의 고의4구는, ‘한 방이면 끝난다’는 공포의 인정이었다. 보통은 뒤의 타선이 이런 흐름을 깨뜨려야 한다. 베츠가 한 번만 안타를 이어 붙였거나, 프리먼이 그 중 하나라도 뜬공 대신 펜스를 때렸다면, 거르기 전략은 무너졌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토론토의 작전이 17회까지는 통했다. 결국 18회, 카운트를 길게 끌다가 프리먼의 스윙이 그 작전의 유효기간을 지웠다. 야구가 참 잔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르는 용기’도 ‘붙는 용기’도 마지막 한 구에서 평가받는다.

윌 클라인의 투구는 이 긴 밤의 숨은 균형추였다. 다저스 엔트리의 맨 끝, 사실상 비상 카드였던 그가 4이닝이 넘는 시간을 홀로 건디며 실점을 막았다. 마지막 이닝에서 다리가 풀리고 팔이 무거워지는 기색이 화면으로도 보였는데, 그때도 공은 차갑게 스트라이크 존을 가르켰다. 18회 2사 2, 3루, 풀카운트에서 끌어낸 헛스윙은 숫자로는 탈삼진 하나지만, 분위기로는 프리먼의 끝내기만큼 무겁게 박힌 순간이었다. 커쇼가 마운드를 지키며 끝을 도운 장면도 덧붙여야 한다. 은퇴를 앞둔 에이스의 이름값이 기록지에서는 이닝수 몇 칸에 눌려 보일지라도, 더그아웃과 불펜의 체온을 붙들어준 건 그 존재감이었다.

팬 시선에서 이 경기는 두 개의 감정선이 교차했다. 하나는 오타니의 압도에 대한 경외, 다른 하나는 “그래도 결국 팀은 팀으로 이긴다”는 체감이다. 오타니가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다저스타디움의 공기가 묵직해졌다. 초구 97마일을 밀어 동점포를 만들던 그 호흡, 거기서 뿜어져 나온 포효는 화면으로도 울림이 있었다. 그런데 13회, 15회, 17회에 걸쳐 거르기 작전이 이어지고, 베츠와 프리먼이 번번이 뜬공으로 물러날 때면, 팬으로서도 속이 좀 타들어갔다. ‘이렇게까지 피하는데 뒤에서 못 끊으면 어떡하냐’는 탄식이 더그아웃을 스칠 법했다. 그럼에도 로버츠는 타순을 흔들지 않았다. 18회 선두 프리먼이 다시 타석에 섰을 때, 그동안 눌려 있던 리듬이 되살아나는 기분이 있었다. 싱커가 한가운데로 들어왔고, 프리먼의 스윙은 교과서적이면서도 잔혹했다. 돌이켜보면, 17회까지의 참을성이 18회 한 구를 불러낸 셈이다.

토론토의 선택도 이해한다. 7회까지 장타 4개를 허용한 타자를, 그것도 원정에서, 그것도 한 방이면 시즌의 흐름이 바뀌는 순간에, 누가 정면으로 상대하겠는가. 오타니 뒤에는 베츠와 프리먼이 버티고 있었지만, 그 둘이 만들어놓은 이름값조차 7회까지의 오타니를 덮지는 못했다. 이건 작전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다만 생존의 끝에는 언제나 모순이 기다린다. 그렇게 피한 끝에, 결국 프리먼에게 맞았다. 토론토가 얻은 건 ‘한 방만 막자’는 안도였고, 잃은 건 ‘결국 누군가는 친다’는 진실이었다.

오타니 개인의 서사는 한층 더 두터워졌다. 지난해 월드시리즈에서의 부진이 잠깐의 그림자였다면, 올해는 그 그림자를 빛으로 덮어버렸다. 3경기 타율 5할, 출루율 0.667, OPS 2.083이라는 숫자는 화려하지만, 진짜로 기억에 남을 장면은 따로 있다. 첫 타석 2루타로 포문을 열고, 게임 플랜을 바꾸는 첫 홈런을 때렸을 때의 눈빛, 그리고 동점 아치를 그린 뒤 베이스를 돌며 터뜨린 포효. 상대가 네 번을 거르는 사이에도 루틴을 잃지 않던 호흡. 야구는 반복의 예술인데, 오타니는 반복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경기를 바꿨다. 월드시리즈 MVP를 향한 진격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닌 이유다.

팀 서사로 확장하면 더 재밌다. 다저스는 슈퍼스타의 팀이면서 동시에, 이름이 덜 알려진 투수가 균열을 메우는 팀이다. 클라인이 그랬고, 곳곳의 계투가 그랬다. 시리즈는 길고, 월드시리즈는 더 길다. 18이닝이라는 숫자는 체력과 집중력, 그리고 벤치의 결정을 동시에 시험한다. 다저스는 그 시험에서 겨우, 그러나 분명히 한 걸음 앞섰다. 프리먼이 받아 적은 건 결말 한 줄이지만, 그 한 줄 뒤에는 오타니의 9출루가 깔려 있고, 클라인의 72구가 받치고 있다. 야구가 이렇게 쌓여서 이겨지는 밤이 있다.

김혜성이 벤치에 머문 부분은 살짝 아쉬움을 남겼다. 연장으로 길어지는 동안 대주자 한 번, 수비 치환 한 번을 기대한 팬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스터 운용은 경기 흐름과 맞물린다. 라인업의 큰 축을 흔들지 않으려는 선택, 그리고 한 번의 수를 위해 다음 이닝의 두 수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보수성은, 이런 초장거리 경기에서 흔히 나온다. 만약 19회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은 결국 가정일 뿐이다. 18회 프리먼이 해답을 썼고, 그 순간에 남은 아쉬움은 희미해졌다.

이 경기의 파장은 단순한 2승 1패 이상이다. 토론토는 이제 오타니를 어떻게 대할지 장기 전략을 다시 세워야 한다. 4차전에서 오타니가 선발로 나선다는 사실은 더 큰 압박이다. 타석에서 이미 공포를 심은 투수가, 마운드에서 첫 공을 던지는 순간의 심리적 우위는 숫자로 환산하기 어렵다. 다저스는 이 우위를 전면에 내세울 것이고, 토론토는 오타니가 투수로 나오는 날만큼은 타석에서 그를 피할 수 없다. 정면 승부가 불가피한 날, 그 무게를 누가 더 잘 감당하느냐가 시리즈의 다음 방향을 정한다.

결국 이 밤의 핵심은 간단했다. 한 타자가 경기의 법칙을 바꾸고, 한 스윙이 결말을 적었다. 그리고 그 사이를 무명의 투수가 메웠다. 야구가 사랑받는 이유는 이런 서사가 한 경기 안에 동시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오타니가 9번을 나갈 때 관중은 숨을 멈췄고, 프리먼이 마지막 한 구를 보낼 때 관중은 폭발했다. 경기장을 떠나며 남는 감정은 이렇다. 오늘은 오타니의 밤이었고, 결말은 프리먼이 찍었다. 그리고 그 중간을 클라인이 걸었다. 이 팀이 강한 이유는 화려함과 버팀목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4차전 마운드에 오르는 오타니가 그 무게를 다시 메이저리그 전체에 들이댈지, 이제 우리의 시계는 또 한 번 저녁 5시를 기다린다.

요약하자면, 다저스는 오타니의 압도와 프리먼의 일격, 그리고 클라인의 헌신으로 가장 길고 무거운 밤을 이겼다. 숫자와 장면이 동시에 기억되는 드문 경기였다. 다음 경기는 더 간단할지도 모른다. 투수 오타니가 공을 쥐는 순간, 토론토는 더 이상 피할 구석이 없다. 야구는 결국 맞대결의 스포츠다. 내일의 물음은 하나다. 정면으로 붙을 준비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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