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니 쇼헤이와 애런 저지는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들이다. 두 선수는 올해도 강력한 리그 MVP 후보다. 양 리그 MVP는 결국 두 선수를 막을 수 있을지의 대결이다.
그렇다고 메이저리그에 오타니와 저지만 있는 건 아니다. 매년 새로운 스타들이 탄생하는 무대가 바로 메이저리그다. 올해도 두 선수의 아성을 넘보는 후보들이 있다. 마운드에서도 타릭 스쿠벌과 폴 스킨스에 도전하는 투수들이 나왔다.
이번 시즌 1/3이 지나가는 시점에서 주목해야 할 선수들을 알아봤다.
칼 랄리 (시애틀 매리너스)
2025 : 타율 .264 23홈런 / OPS 1.016
랄리는 2022년부터 시애틀의 주전 포수였다. 수비는 워낙 정평이 나 있었다. 2022-24년 포수 디펜시브런세이브(DRS)에서 전체 3위였다. 1위 알레한드로 커크, 2위 호세 트레비뇨보다 훨씬 많은 포수 수비 이닝을 소화하면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줬다.
2022-24년 포수 DRS (수비이닝)
39 - 알레한드로 커크 (2195이닝)
37 - 호세 트레비뇨 (1792이닝)
33 - 칼 랄리 (3077이닝)
33 - 패트릭 베일리 (1673.2이닝)
시애틀은 지난 시즌 중반 댄 윌슨 감독이 지휘봉을 물려받았다. 팀의 체질 개선이 랄리에게는 호재였다. 윌슨은 시애틀 영구결번 포수 출신으로, 랄리를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지도했다. 자신을 잘 아는 지도자가 감독이 되면서 랄리는 고민들을 더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게 됐다.
연장 계약도 받았다. 시애틀은 올 시즌 개막을 앞두고 6년 1억500만 달러 계약을 안겨줬다. 최근 메이저리그가 포수난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팀 친화적인 계약에 가까웠다.
랄리는 연장 계약 전에 스캇 보라스 에이전트와 결별하고 엑셀 스포츠 매니지먼트로 이적했다. 선수를 FA 시장으로 내보내 더 큰 계약을 추구하는 보라스의 가치관과 이견을 보인 것이다. 그만큼 랄리는 시애틀에 남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계약 직후 "시애틀은 늘 집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는 말로 시애틀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시애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랄리는 이번 시즌 대폭발하고 있다. 공격력을 한층 높여 공수겸장 포수로 거듭났다. 23홈런은 저지보다 많은 메이저리그 전체 1위 기록이다.
단일 시즌 포수 최다 홈런
48 - 살바도르 페레스 (2021)
45 - 자니 벤치 (1970)
43 - 하비 로페스 (2003)
41 - 로이 캄파넬라 (1953)
41 - 토드 헌들리 (1996)
포수의 단일 시즌 최다 홈런은 48개다. 2021년 살바도르 페레스가 때려냈다. 그 해 페레스는 아메리칸리그에서 처음으로 포수 홈런왕에 올랐다.
현재 랄리는 무려 64홈런 페이스다. 포지션 불문 64홈런 시즌은 5번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배리 본즈와 새미 소사, 마크 맥과이어였다. 금지약물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은 선수들이다. 만약 랄리가 정말 64홈런을 터뜨린다면 메이저리그 역사를 새롭게 쓰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가장 강력한 포수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피트 크로-암스트롱 (시카고 컵스)
2025 : 타율 .280 15홈런 19도루 / OPS 0.873
랄리가 저지의 경쟁자라면, 오타니의 대항마는 피트 크로-암스트롱이다. 이름이 길어서 약어인 'PCA'로 더 자주 불린다. PCA는 공격 수비 주루에서 모두 빼어난 모습이다.
사실 PCA는 공격에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유망주 시절부터 수비와 주루가 강점이었다. 팀 내 최고 유망주로 선정됐을 때도 타격과 파워에 매겨진 점수는 특출나지 않았다.
2024 PCA 20/80 스케일 (베이스볼아메리카)
타격 - 55점
파워 - 45점
주루 - 60점
수비 - 80점
송구 - 55점
실제로 지난해 PCA는 타격에서 아쉬웠다. 123경기 타율 .237, OPS 0.670에 머물렀다. 두 자릿수 홈런(10)과 도루(27)를 기록했지만, 타격은 돋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컵스는 PCA의 공격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즉각 타격 매카닉 수정에 돌입했다. 기술적인 변화는 선수 입장에서 도박에 가깝지만, 컵스는 PCA의 운동 신경이라면 충분히 체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레그킥을 비롯해 타격 동작을 대거 보완했다.
올해 PCA는 곧바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지난 시즌 홈런 수를 넘어섰다. 브레이킹 볼 상대 타율이 지난해 .193에서 올해 .279가 됐고, 브레이킹 볼 상대 장타율 역시 지난해 .394에서 올해 .523로 상승했다. 작년까지 대처가 되지 않았던 브레이킹 볼에서 해답을 발견한 덕분에 성적이 크게 향상됐다.
PCA는 예전보다 홈플레이트 기준 더 뒤로 물러나서 타격하고 있다. 앞에서 타격할 때는 브레이킹 볼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러나 브레이킹 볼을 좀 더 보고 반응하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브레이킹 볼뿐만 아니라 홈 플레이트 근처에서 움직이는 싱커와 커터, 체인지업도 다 성적이 좋아졌다.
구종별 장타율 변화
싱커 [2024] .388 [2025] 0.857
커터 [2024] .526 [2025] 1.000
체인 [2024] .432 [2025] 0.559
야구가 '인치의 게임'으로 불리는 건 사소한 변화가 큰 파장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공격에서 일취월장한 PCA는 공수주가 반영되는 승리기여도에서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다. <팬그래프> 기준 PCA가 3.5, 오타니가 3.2다. 승리기여도가 선수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지표는 아니지만, PCA가 리그 최정상급 선수로 도약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배우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PCA는 끼가 다분하다. 스프링캠프 때도 화려한 헤어스타일로 화제를 몰고 왔다. 여기에 실력까지 갖춘다면 스타가 되는 건 시간 문제다. 더 많은 스타를 갈구하는 메이저리그에 가장 필요한 선수가 등장했다.
제이콥 윌슨 (애슬레틱스)
2025 : 타율 .355 7홈런 / OPS 0.898
라스베이거스 이전을 앞둔 애슬레틱스는 임시 거처 새크라멘토에서 새 판을 짜는 중이다. 새 연고지로 가기 전에 팀이 내세울 수 있는 간판들이 많아져야 한다. 그래야 관중들을 많이 모을 수 있고, 그 티켓 수익을 통해 대대적인 투자를 가져갈 수 있다.
윌슨은 그 후보 중 한 명이다. 지난해 첫 선을 보였지만, 실질적인 데뷔 시즌은 올해다. 여전히 신인 자격도 가지고 있다. 아직 개인상을 논하는 건 시기상조지만, 현재 아메리칸리그 신인왕 경쟁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다.
AL 신인 fWAR 순위
2.8 - 제이콥 윌슨
1.9 - 카를로스 나바에스
1.2 - 체이스 마이드로스
1.1 - 윌 워렌 (투수)
1.1 - 셰인 스미스 (투수)
첫 한 달간 타율이 .325였던 윌슨은, 5월 타율을 .368로 더 끌어올렸다. 심지어 장타와 볼넷 수도 늘리면서 OPS 역시 수준급으로 바뀌었다(3,4월 0.792 & 5월 0.975). 나홀로 4할 근처에 있는 저지(.391) 때문에 리그 타율 2위지만, 저지가 '천상계'라면 '인간계' 1위는 윌슨이다. 한편, 타율 .350 이상 때려낸 신인은 2001년 이치로(.350) 이후 명맥이 끊겼다.
아웃존 콘택트 비율
93.0% - 루이스 아라에스
84.7% - 제이콥 윌슨
80.0% - 살 프레릭
79.1% - 스티븐 콴
정확성이 높으면 당연히 스트라이크 존 콘택트율이 높다. 존에 들어오는 공을 잘 맞힌다. 그런데 윌슨은 아웃존 공도 맞히는 재주가 있다. 괜히 '아메리칸리그의 아라에스'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아라에스는 지난 3년 연속 타격왕을 차지한 이 시대 최고의 교타자다.
윌슨은 볼넷이 적지만, 삼진도 잘 당하지 않는다. 타석 당 삼진율 6.1%는 리그에서 가장 낮다. 이마저도 아라에스와 비슷하다(아라에스 삼진율 2.2%). 다만 윌슨은 아라에스보다 파워가 더 뛰어나다(장타율 윌슨 .504 & 아라에스 .418).
메이저리그는 홈런 삼진 볼넷으로 획일화 된 야구를 경계한다. 맨프레드 커미셔너가 주자 견제를 제한하고, 수비 시프트를 제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보다 다양한 야구를 펼쳐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윌슨은 이 다양성을 키울 수 있는 야구를 선보이고 있다.
헌터 브라운 (휴스턴)
2025 : 8승3패 1.83 / 73.2이닝 84삼진
브라운은 작년부터 심상치 않았다. 싱커를 장착하면서 한 단계 올라섰다. 올해는 더 강력한 피칭으로 개인 커리어 하이를 경신할 기세다. 스쿠벌도 위협하는 모습이다.
투수는 탈삼진과 맞혀잡는 피칭이 균형을 이뤘을 때 가장 이상적이다. 탈삼진에 집착하면 투구 수 관리가 어려울 때도 있다. 이는 이닝 소화력을 떨어뜨린다.
이러한 측면에서 브라운은 흠 잡을 데가 없다. 9이닝 당 탈삼진 두 자릿수(10.26개)와 더불어 허용한 평균 타구속도 85마일은 선발 투수 중 가장 느리다. 정타 억제를 잘하기 때문에 맞혀잡는 데 탁월하다. 또 상황에 따라 원하면 삼진도 잡을 수 있다.
이번 시즌 브라운의 최고 주무기는 포심 패스트볼이다. 평균 구속 96.8마일의 포심은 피안타율 1할이 채 되지 않는다. 상대 성적 83타수 7안타로, 피안타율 .084에 불과하다. 7안타도 모두 단타였다.
<스탯캐스트>는 구종을 구사한 조건별로 점수를 부여해서 구종 득점 가치(Run Value)를 집계한다. 이 항목에서 브라운의 포심은 전체 구종 1위였다.
2025 구종 득점 가치 순위
14 - 포심 / 헌터 브라운
12 - 포심 / 맥스 프리드
11 - 포심 / 잭 윌러
11 - 포심 / 조 라이언
11 - 슬라이더 / 크리스 세일
디트로이트 출신의 브라운은 저스틴 벌랜더가 롤모델이다. 벌랜더는 2009년 다승왕과 탈삼진왕을 차지하면서 전성기의 시작을 알렸다. 당시 26세 시즌이었다.
그 시절 벌랜더를 보면서 꿈을 키운 브라운은 올해 26세 시즌이다. 벌랜더는 저물었지만, 벌랜더가 뿌린 씨앗이 꽃을 피우려고 한다.
크리스 부비치 (캔자스시티)
5승3패 1.43 / 75.1이닝 79삼진
27세 부비치는 산전수전 다 겪은 투수다. 커리어 초반 선발 수업을 받았지만 끝내 자리를 잡지 못했다. 설상가상 토미존 수술을 받게 되면서 긴 공백기와 마주했다. 지난해 불펜으로 복귀한 27경기 평균자책점은 2.67. 그대로 불펜에 안착할 것으로 보였지만, 올해 다시 선발 투수로 돌아와 놀라운 반전을 선사하고 있다.
부비치는 4월까지 평균자책점 2.25를 기록했다. 준수한 성적이었다. 그런데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부비치는 5월 이후 39.1이닝 동안 단 3실점했다. 평균자책점 0.69였다.
부비치는 시즌 12경기 중 6경기가 무자책 경기다. 넉 점 이상 내준 적은 4월28일 휴스턴전이 유일하다(그 경기 휴스턴 선발 투수 헌터 브라운이 6이닝 1실점, 부비치 5이닝 4실점). 시즌 평균자책점 1.43은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낮다. 짠물 피칭의 대명사가 됐다.
커리어 초반 부비치는 선발로서 성공하고 싶은 욕심이 컸다. 스스로가 경기의 주인공이 되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런 목표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그저 마운드에 올라와서 아웃카운트를 잡는 데 주력하고 있다. 선발로서 긴 이닝을 소화하는 것보다도, 불펜으로 나올 때처럼 한 이닝, 한 이닝에 최선을 다한다고 밝힌 바 있다.
힘든 길을 지나온 부비치는 더 성숙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위기에서는 더 단단한 피칭을 하고 있다(피안타율 주자 있을 때 .173 & 득점권 .191).
커리어 초반의 실패가 오늘날 성공의 자양분이 되었기를 기원한다.
이창섭
현 <SPOTV> MLB 해설위원
전 <네이버> MLB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