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롱맨’ 택한 튀르키예…에르도안, 불안한 ‘종신집권’의 길

김서영 기자 2023. 5. 29.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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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결선투표 4%P차로 재선 성공
대지진·경제난, 민족주의로 돌파

“이날은 튀르키예의 승리다. 모든 분야에서 우리 나라가 승리했다.”

대지진과 경제난 등으로 정치인생 최대 위기를 맞았던 ‘스트롱맨’이 악재를 딛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번 재선으로 사실상 종신집권의 길이 열린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69·사진)은 말 그대로 ‘21세기 술탄’이 됐다. ‘힘 있고 안정된 국가’를 염원한 튀르키예 국민들은 강한 지도자를 찾아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들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28일(현지시간) 튀르키예 대선 결선투표 결과 에르도안 대통령은 야당인 공화인민당(CHP)의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52.14% 대 47.86%로 이겼다. 이로써 에르도안 대통령은 2003년 첫 집권 이후 2033년까지 최장 30년에 달하는 사실상의 종신집권에 도전할 수 있게 됐다.

선거 전만 해도 이번에야말로 에르도안 대통령의 20년 집권에 마침표를 찍는 것 아니냐는 예상이 나왔다.

화폐가치가 폭락하고 물가가 치솟는 등 경제는 연일 수렁에 빠졌다. 지난 2월 대지진으로 5만명 이상이 숨진 후 정권의 토건비리 의혹까지 터져나오면서 민심은 돌아섰다. 그러나 에르도안 대통령은 ‘적’을 끊임없이 소환하면서 민족주의 감정에 호소하는 전략으로 위기를 돌파했다.

우선 쿠르드계가 제물이 됐다. 그는 쿠르드족이 분리독립을 시도하고 테러를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를 내세웠다. 아울러 친쿠르드 정당이 클르츠다로을루 후보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야당이 승리하면 튀르키예가 테러로 시달릴 것”이라고 공격했다.

지진 피해지역·보수적 무슬림 표심 얻어…“자유 후퇴·정치 양극화 심화될 것”

시리아 난민 역시 도마에 올랐다. 튀르키예는 지난 10여년간 시리아 난민 300만명 이상을 수용했는데, 경제난과 대지진 등으로 이들에 대한 여론이 더 악화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승리 연설에서 “지금까지 60만명 가까이 시리아로 돌려보냈으며 향후 몇년간 100만명을 더 돌려보내겠다”고 밝혔다.

국제관계와 안보 측면에서도 ‘튀르키예의 국익’을 우선시하는 행보가 유권자들의 마음을 샀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중재하고 있으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소속된 미국의 동맹임에도 러시아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무사 아슬란타스(28)는 “우리 나라는 에르도안 덕분에 강력해졌다”고 뉴욕타임스(NYT)에 말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자신이 자초한 위기에 자신만이 ‘해결사’가 될 수 있다고 선전함으로써 민심을 돌렸다. 사상 최악의 대지진 피해 지역을 방문해 야당에는 문제 해결 능력이 없다고 연설했으며 피해 복구에 재원 투입을 약속했다. 결국 지난 14일 대선 1차 투표와 함께 치른 총선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이 속한 정의개발당(AKP) 연합은 지진 피해 11개 지역 중 10곳에서 승리하며 기세를 더했다.

여론조사 전문가 메멧 알리 쿨랏은 “지진 피해자들은 결국 누가 집과 직장을 재건할 것인지 답이 필요했다. 이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에르도안이라는 점이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보수적 무슬림 유권자를 포섭한 것 또한 먹혀들었다. 튀르키예는 한때 스카프를 쓴 여성에게 학업·취업에서 불이익을 줬을 정도로 세속주의 이슬람을 표방했지만, 에르도안 대통령 집권 시기에는 다시 보수적 이슬람 성향이 강해졌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성 소피아 성당을 박물관으로, 이어 다시 모스크로 개조했으며 종교 교육을 확대했다.

이처럼 튀르키예 유권자들은 산적한 난관을 뚫고 나갈 ‘위기의 구원자’로서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다시 기회를 줬다. 그러나 문제 상당수는 그 자신이 초래했다는 점에서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이스탄불 빌기대학의 엠레 에르도안 교수는 “이 시대는 정치적·시민적 자유의 후퇴와 양극화, 두 정치집단 사이의 문화적 싸움으로 특징될 것”이라고 로이터통신에 말했다.

무엇보다도 권위주의가 강화되고 민주주의가 위협을 받으리라는 우려가 나온다. 더 강력해진 ‘1인 통치’ 시대가 열릴 것으로 보인다. AKP 연합이 의회에서 600석 중 323석으로 과반을 차지하면서 에르도안 대통령은 의회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한 야권 측 정치컨설턴트는 “에르도안은 궁극의 자신감을 가지게 돼 이제부터 자기 자신을 무적으로 볼 것이다. 야당에 더 가혹해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NYT에 밝혔다.

선거 결과가 나오자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는 “국가의 모든 수단이 한 사람의 발 앞에 놓이게 됐다. 내 진정한 슬픔은 이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더 큰 문제들”이라고 밝혔다.

김서영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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