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김은정의 치매, 이야기](11)
치매는 무엇을 못 잊는가를 드러내는 병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치매 서사가 가진 불안과 슬픔을 가장 강렬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설은 "나의 이름은 김병수, 올해 일흔이 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화자 김병수는 자신이 알츠하이머 환자이며 동시에 은퇴한 연쇄살인범이라고 소개한다. 독자는 처음부터 그의 기억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어느 순간 그의 말을 믿게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작품은 치매라는 질병의 본질을 드러낸다. 치매 환자의 기억은 흔들리지만, 그 안의 감정만큼은 너무나 생생하기 때문이다.
김병수는 자신의 삶을 세 시기로 나눈다. 아버지를 죽이기 전의 유년기, 살인자로 살았던 청년기와 장년기, 그리고 살인을 멈추고 살아온 노년의 시간이다. 그 마지막 삶의 중심에는 딸 은희가 있다. 그는 은희를 보며 자신이 더 이상 괴물이 아니라고 믿는다. 은희는 그에게 남은 인간성의 증거이자 속죄의 가능성이다.
하지만, 치매는 단순히 기억을 잃게 만드는 병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무너뜨린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기억하는 삶은 진짜인가. 김병수는 점점 현재를 잃어가며 또 다른 연쇄살인범 박주태가 딸 은희를 노린다고 믿는다. 그는 은희를 지키기 위해 마지막 살인을 준비한다. 독자 역시 그의 공포를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에서 드러나는 진실은 충격적이다. 은희는 그의 딸이 아니라 치매 노인을 돌보던 요양보호사였고, 박주태는 김병수를 추적하던 형사였다. 독자가 따라왔던 이야기 대부분은 치매 환자의 망상이었던 것이다.
이 반전이 더 슬픈 이유는 김병수의 망상이 단순한 혼란이 아니라 죄책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 죄책감은 없고 수치심만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작품을 읽다 보면 오히려 그 반대임을 알게 된다. 그의 삶에서 끝내 사라지지 않는 감정은 죄책감이다. 특히 어린 은희를 죽였던 기억은 치매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는 잊고 싶어 하지만 끝내 잊지 못한다. 자신이 죽였던 아이의 이름을 가진 요양보호사 '은희'가 나타나자, 그는 무의식 속에서 과거를 다시 불러낸다. 그리고 자신이 지키지 못했던 존재를 이제라도 지켜내고 싶어 한다. 그의 망상은 어쩌면 마지막 속죄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소설은 치매를 '망각의 병'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작품 속에는 "치매 환자가 가장 빨리 잊어버리는 것은 미래 기억"이라는 말이 나온다. 앞으로 해야 할 일과 다가올 시간을 잃어버리는 순간, 인간은 영원한 현재 속에 갇히게 된다. 과거와 미래를 잃은 자리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작품은 결국 가장 오래 남는 것은 감정이라고 말한다. 실제 치매 환자들도 이름과 얼굴은 잊어가지만 사랑과 두려움, 미안함 같은 감정은 오래 간직하는 경우가 많다. 반복되는 말 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슬픔과 그리움이 남아 있다. 기억은 사라져도 마음은 끝까지 인간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소설 마지막에서 김병수는 망각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치매는 그에게 완전한 망각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끝내 과거 속을 떠돌며 살아간다. 그리고 작품은 이렇게 말한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이 문장은 치매 서사의 본질을 보여준다. 치매는 단순히 기억을 잃는 병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마지막까지 무엇을 잊지 못하는가를 드러내는 시간의 병이다. 그리고 삶의 끝에 남는 것은 기억의 양이 아니라 끝내 사라지지 않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김은정(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