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서 최고 자리에 오른 과학자가 한국으로 돌아온 까닭
"일본 이화학연구소(리켄)와 한국의 IBS가 인력, 장비, 경험, 네트워크 심지어 자금 등 모든 자원을 공유해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는 새로운 연구 방식을 만들어내겠습니다."
지난달 30일 광주시 광주과학기술원(GIST)에서 만난 김유수 기초과학연구원(IBS) 양자변환연구단장(GIST 화학과 교수)은 리켄에서 연구 장비를 한국으로 들여오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김 단장은 지난달 리켄 수석과학자와 도쿄대 응용화학과 교수 직책을 내려놓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공계 인재 해외 유출은 한국 과학계에 상존했던 큰 고민거리인 상황에서 김 단장의 한국 복귀 소식이 고무적이었다. 리켄은 일본에 노벨상 다수를 안겨준 세계적인 연구기관으로, 종신직인 수석과학자는 연구자로는 리켄에서 가장 높은 직책이다. 자신이 일본에서 이룬 것을 일정 부분 내려놓고 한국으로 복귀한 셈이다.
김 단장은 표면 및 계면화학 분야를 대표하는 세계적 연구자다. 표면 및 계면화학 분야는 물질의 표면이나 서로 다른 물질이 만날 때 그 경계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연구하는 분야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대 응용화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1999년 리켄에서 박사후 과정을 시작하면서 이 분야에 발을 들였다.
김 단장은 "표면은 내부 물질과 전혀 다른 성질을 띠는 등 '예측불가능성'이란 매력을 갖고 있다"면서 "촉매, 배터리,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등 인류에게 편의를 가져다준 기술의 기저에는 모두 고체 표면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연구한 결과가 있다"고 말했다.
김 단장은 주사터널링현미경(STM)을 이용해 물질의 표면‧계면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을 원자나 분자 수준에서 관찰하고 연구해 왔다. 1981년 개발된 STM은 뾰족한 금속 탐침으로 표면을 읽어 원자를 관찰하는 도구다. 전 세계 나노 기술 연구를 본격화시킨 혁신적인 장비다.
김 단장은 리켄에서 STM을 스스로 조립하고 개조하는 방식으로 중요한 연구 결과들을 손에 척척 넣었다. 그는 "새로운 기술과 장비를 개발하는 일이 기존 방식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리고 실패 위험이 크지만 그만큼 혁신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OLED 효율 높이는 발광 메커니즘, 정밀한 나노 분광법 등을 개발했다.
GIST에 설치되는 양자변환연구단에서도 연구를 이어간다. 특히 표면, 계면의 화학 반응을 양자 수준에서 더욱 자세히 들여다볼 예정이다. 그는 "표면에 있는 분자는 주변 에너지를 빠르게 흡수할 정도로 '반응에 굶주려' 있다"며 "표면의 양자 상태까지 정확히 파악하고 제어해야 물질을 더욱 잘 다룰 수 있다"고 설명했다.
리켄을 떠난 김 단장은 오히려 리켄과 협력의 고삐를 더욱 단단히 잡을 예정이다. IBS와 리켄은 김 단장의 제안으로 '양자 기술과 정밀 측정' 분야에서 협력 관계를 맺었다. 두 기관 모두 연구 분야에서 맺는 최초의 협력이다. 구체적으로 김 단장은 협력 방식이 공동연구 그 이상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연구자들이 동맹 수준의 유대감을 가져야 진정한 의미의 공동연구를 할 수 있다"면서 "인력, 장비, 경험, 네트워크 심지어 자금까지도 공유하며 연구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설사 자신이 자리에서 내려오더라도 연구가 이어지도록 시스템을 만들겠다고도 했다.
이처럼 세상에 없던 연구 방식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그를 한국으로 이끌었다. 한국에서라면 젊고 유망한 연구자들과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GIST는 학사과정을 2010년부터 운영했고 IBS는 2011년 설립된 조직이다. 김 단장은 "살아왔던 대로 살면 얻어지는 것은 대충 예측된다"면서 "새로운 선택을 과감하게 했을 때 얻어지는 기쁨과 흥분은 예상할 수 없다"고 한국 생활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김 단장은 리켄의 바람직한 연구 문화도 연구단에 자리잡게 할 계획이다. 리켄은 '연구자의 낙원'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연구자가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장기적인 연구를 지향하며 연구자를 논문수 등 정량적인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또 연구자의 자율성을 존중한다. 그는 리켄의 이같은 문화 덕분에 연구를 이어갈 수 있었다고 밝혔다.
"2010년, 제가 이끄는 연구실이 5년 뒤 특정 목표를 달성하기로 공언했습니다. 하지만 장비 재제작 등의 문제로 몇 년이 지나도 성과가 나지 않았어요.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승진할 수 없는 분위기었습니다. 2014년 겨울이 되어서야 데이터를 처음 발표했습니다.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까 두려웠지만, 주변에서 오히려 '현재 데이터를 기반으로 앞으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거야'라고 응원해주었습니다. 실제 연구 평가에서도 잠재력을 높이 평가 받아 2015년 승진해 연구를 이어갔습니다. 논문 수로 평가 받았다면 저는 진작에 연구에서 크게 좌절했을 겁니다."
김 단장은 각 연구자에게 지나치게 목표를 강요하지 않겠다고도 밝혔다. "지나치게 명확한 목표가 정해지면 연구자가 그 목표를 벗어나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고 혁신적인 연구 또한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단, 김 단장은 지속적으로 연구자가 동료 연구자들에게 깐깐하게 조언을 건넬 수 있는 시스템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무턱대고 연구자를 믿기보다는 연구를 잘 하고 있는지, 연구 방향이 맞는지 등을 주변에서 꼼꼼하게 보고 어느 정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김 단장이 삶을 대하는 태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김 단장은 "팬데믹으로 아무런 연구를 하지 않았을 때 '내가 하는 일의 가치는 무엇일까?', '나는 누구일까?' 등 살면서 처음으로 나를 돌아보는 질문을 했다"면서 "그동안 나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서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삶과 일의 균형을 맞추며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후배 연구자들이 나, 그리고 내가 하는 연구를 사랑하면서 행복한 연구를 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채린 기자 rini11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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