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려 25일 만의 자유이용권
2-6으로 밀리던 4회 말이다. 2사 1, 2루가 되자 홈구장 팬들이 환호한다. 바람의 손자 타석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한국시간 22일, KC 로열스 - SF 자이언츠)
상대 투수는 우완 스티븐 크루즈다. 박력이 넘치는 97~99마일짜리 공을 뿌려 댄다. 그런데 거칠다. 그리고 산만하다. 영점이 없다. 탄착 지점이 여기저기 흩어진다. 볼-볼-헛스윙-볼. 어느덧 카운트는 3-1로 타자 편이다.
여기서 5구째. 배트가 잔뜩 도사린다. 하나 치겠다는 의욕이 활활 타오른다.
하지만 웬걸. 팽팽한 긴장감은 맥없이 풀린다. 또다시 형편없이 날리는 투구 탓이다.
94마일짜리 커터가 안쪽으로 꺾인다. 자칫 타자가 맞을 뻔했다. 깜짝 놀라, 쓰러질 듯 간신히 피한다. 포수도 잡을 수 없다. 백스톱까지 빠지는 볼이다.
결과는 4구다. 공격 쪽에 자유이용권이 제공된다. 바람의 손자는 보호대를 풀고 1루로 걸어 나간다. (이어진 2사 만루에서 4번 윌머 플로레스가 직선타구 아웃으로 4회 말이 끝났다.)
이 장면이다. 의외로 진귀한 순간이다. 바로 100타석 만에 기록된 4구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4월 27일이었다. 밀워키 브루어스와 경기 때 2개의 볼넷을 얻었다. 시즌 10, 11번째였다.
그 뒤로 무려 25일이 지났다. 99번의 타석을 거쳤다. 그동안 공짜는 ‘사절’했다. 아니, 딱 한 번 있었다. 5월 5일 콜로라도 로키스 전에서 몸에 맞는 볼이 나왔다. 그때도 통증을 견뎠으니, 거저는 아니었다.

루틴이 된 ‘4타수 1안타’
‘100타석 만의 볼넷.’ 많은 것을 시사하는 숫자다.
일단 부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내 공을 가려내지 못했다. 나쁜 공에도 쫓아다니느라 바빴다. 당연히 좋은 타구가 나올 리 없다.
타율이 그걸 말해준다. 한때는 3할 중반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이후 조금씩 까먹는다. 4타수 1안타가 루틴처럼 굳어졌다. 그러면서 점점 0.250에 수렴한다. 지금은 0.275까지 떨어졌다.
그나마 어제(22일) 경기에서 2개의 볼넷을 얻었다. 덕분에 시즌 숫자는 13개로 늘었다.
남들에 비하면, 특히 리그 톱클래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이 부문 1위는 마르셀 오수나다. 40개나 얻었다. 그다음이 라파엘 데버스와 후안 소토다. 이들은 각각 39개씩 기록 중이다.
출루율이 강조되는 시대다. 연관된 OPS가 중요하다. 볼넷의 감소는 당연히 마이너스 요인이다. 0.322-0.464-0.786(출루율-장타율-OPS)가 충분히 만족할 수준은 아니다.
그렇다고 나쁘게만 볼 수 없다. 어느 정도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본래 스타일이 그렇다는 점이다.
그를 대변하는 가장 상징적인 표현이 있다. ‘배드볼(bad-ball) 히터’다.
웬만한 공은 모두 쳐내는 능력을 가졌다. 완전히 빠진 볼, 거의 땅에 튀기는 공에도 반응한다. 그걸 안타를 만들어내는 능력도 보여준다. 무너진 타격 폼으로도 타이밍을 잡아낸다. 타고난 센스를 지녔다.

배드볼 히터는 재능
그건 큰 재능이다. 그리고 매력이다.
처음 미국 팬들을 사로잡은 것이 그런 면모다. MLB.com의 프런트 페이지를 장식한 모습도 그랬다. 키움 히어로즈 시절의 배팅 장면이다. 쓰러질 것 같은 자세로 스윙하는 사진이 실렸다.
당시는 진출 전이다. 기사 중에 이런 내용이 담겼다.
‘KBO리그 슈퍼스타가 내년 겨울 프리에이전트(FA) 시장을 뒤흔들 수 있다. (중략) 어느 곳에 던지든 안타를 때려내는 블라디미르 게레로를 좋아했다면, 이정후도 사랑하게 될 것이다.’
블라디미르 게레로가 누군가. 대표적인 배드볼 히터다. 무릎을 꿇고 스윙해서 담장을 넘기는 괴력을 지녔다. 비교 자체가 극찬이다.
이 말은 틀리지 않았다. 지난 4월이 그랬다. 타격감이 한창 좋을 때였다. 그야말로 거칠 게 없었다. 아무리 어려운 코스에 와도 상관없다. 제대로 구사된 결정구도 소용없다. 속수무책이다. 현란한 배트 컨트롤에 투수들은 좌절하고 말았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는 법이다. 조금씩 내리막이 생긴다. 잘 되던 것도 어긋난다. 분명히 칠 수 있는 공인데, 쳐냈던 코스인데…. 그게 달라진다.
특히 마음에 걸리는 지점이 있다. 삼진이다. 자꾸 눈에 띈다.
올 시즌 26개를 당했다. 49게임에 뛰었으니, 많지는 않다. 타석(208) 당 따져도 8번에 1개 꼴이다. 그래도 그의 정확성과 컨택트 능력, 무엇보다 배드볼 히팅의 재능을 감안하면 의외인 것은 틀림없다. (KBO 시절은 13타석당 삼진 1개 비율.)

타자도 볼삼비가 중요하다
무엇보다 볼넷과 삼진 비율은 아쉬움이 크다. 13개-26개, 정확히 1:2 비율이다.
이건 이정후라는 이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삼진이 볼넷보다 많은 것도 어색하다. 하물며 그 차이가 2배라는 건 더 받아들이기 어렵다. (KBO 통산 볼넷 383개, 삼진은 304개)
그나마 다행이다. 최근에는 다시 좋아지는 느낌이다.
어제 경기가 그 신호였으면 하는 기대다. 모처럼의 2루타 1개(14호)도 좋았다. 1루수와 우익수 사이를 가르는 강력한 타구였다.
중견수 자리에서도 빛이 났다. 득점하는 주자를 잡아내는 깔끔한 솜씨였다. 깔리는 땅볼 안타를 잘 낚아채, 자로 잰 듯한 완벽한 배송을 보여줬다. 결과는 넉넉한 아웃이다.
가장 반가운 것은 볼넷 2개다.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자기 존을 지켰다. 덕분에 타석에서 안정감을 찾아가는 모습이다.
여전히 현지 평가는 좋다. 팀 내 입지도 탄탄하다. 스탯캐스트에 나타난 각종 숫자도 그를 A급 선수라고 나타낸다.
남은 것은 회복이다. 다시 돌아오는 능력이다.
물론 지금도 나쁘지는 않다. 다만, 흐름을 바꿀 필요는 있다. 시즌 초반의 폭발적인 상승세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조금 더 존재감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투수만 볼삼비(볼넷과 삼진 비율)가 중요한 게 아니다. 타자도 마찬가지다. 두 숫자의 적절한 비율을 찾아야 한다. 그게 분위기 전환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