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부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유산] (9) 예천 초간종택과 초간정사

문정화 기자 2025. 5. 29.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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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기·경북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초간정사는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에 있는 조선 전기 초간 권문해가 건립한 누정이다. 초간정은 절벽 위에서 금곡천의 경관을 확보하고 있다.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어느새 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시절의 이야기다. 그때 나는 신라사 연구에 뜻을 두고 뭔가 새롭고 획기적인 연구 주제를 찾아야 한다는 조바심에 쫓기고 있었다. 이미 선학들이 마르고 닳도록 검토해 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넘어서는 다른 새로운 사료가 필요했다. 그래서 중국・일본의 역사서는 물론 조선시대 저술 속에서 신라에 대한 기록을 뽑아보기도 하고, 신라의 금석문자료를 살피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대동운부군옥'이라는 백과사전 비슷한 유서(類書)를 접하게 됐다. 그 책의 첫머리에는 저술에 참조한 서적들의 목록을 '중국제서(中國諸書)'와 '동국제서(東國諸書)'로 나눠 무려 174종의 책 이름을 나열하고 있었다. 이 책을 나름 열심히 읽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속에서 별다른 소득을 얻었던 기억은 없다. 하지만 저자 권문해 선생의 '박람강기(博覽强記)'는 그후 연구생활 내내 선망(羨望)의 대상이자 사표(師表)가 됐다. 이런 옛 기억을 떠올리며 선생의 흔적이 남은 예천의 초간종택과 초간정사를 찾아 나섰다.

◆초간 권문해 선생
선생은 자가 호원(灝元)이며 호는 초간(草澗)이다. 출신가문인 예천권씨는 선생의 조부대에 이르러 성세를 누렸다. 조부 권오상의 5형제(오행・오기・오복・오윤・오상)가 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해 모두 대소과에 급제하고 중앙 정계에서 활약했기 때문이다. 이에 당시 이 가문은 '오복문(五福門)'이라 칭송됐다. 그러나 종조부 권오복이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에서 참형을 당하고 형제들도 유배형을 받아 세를 잃었다.
초간종택은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에 있는 조선 전기 때 지은 권씨 종가 별당이다. 1967년 6월 23일 보물로 지정됐다. 초간종택은 잡석을 쌓아올린 높은 축대 위에 세웠고 주위에 난간을 돌려 누집 모양으로 꾸민 집이다.

선생은 1534년(중종 29)에 예천 죽림리 사제에서 아버지 권지(權祉)와 어머니 동래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해 주위의 기대가 높았고 23세에 퇴계 이황의 계상서당 문하에 들어 류성룡・김성일 등과 함께 퇴계학파의 동문이 됐다. 1560년(명종 15)의 별시문과에 급제해 중앙의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거친 뒤, 안동부사・공주목사 등 외직을 역임했다. 51세(1584년·선조 17)에 대구부사로 부임해 1591년까지 이례적으로 7년간 구임(久任)했다. 그해에 다시 동부승지를 제수받고 중앙 관계에 복귀해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올랐지만 곧 서울 사제(京第)에서 작고했다. 향년 58세.

생전에 저술한 '대동운부군옥'(목판 보물 지정)과 1580년~1591년까지 개인사와 관료로서 체험한 바를 기록한 '초간일기'(보물)를 남겨 후대 연구자들에게 훌륭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대동운부군옥'은 훗날 목판으로 간행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고 한다. 선생이 대구부사로 재임 중이던 1589년(선조 22) 정월 20권 20책으로 편찬을 완료해 세 질을 정서해 두었는데 그 중 한 질은 학봉 김성일이 선조에게 어람(御覽)시킨 뒤 간행하려다가 임진왜란 발발로 망실됐다. 또 한 질은 한강 정구(鄭逑)가 빌려가 화재로 소실했다. 마지막 한 질이 아들 권별(權鼈)에게 전해져 정서해 정산서원에 보관했는데, 이를 1798년(정조 22) 7세손 권진락이 정범조의 서문을 받고 1812년(순조 12) 간행을 시작해 1836년(헌종 2) 완간했다. 마지막 한 질마져 없어졌다면… 생각만 해도 아득한 느낌이다. 한편 '초간일기'에는 7년간 대구부사로 재임하면서 쓴 일기가 들어 있어 관련사료가 부족한 16세기 후반의 대구향토사 연구에서 1급 사료가 되고 있다.

필자가 탐방 중에 만난 초간공파 문중 도유사 권경섭씨로부터 들은 가족사에 대한 일화다. 선생은 정치·사회적으로 승승장구했지만 가정적으로는 마음 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스무살에 곽씨부인과 혼인해 30년이 지났지만 그때까지 일점혈육이 없었기 때문이다. 49살 되던 해에는 곽씨부인이 먼저 세상을 떴고, 3년상을 치른 선생은 함양박씨 금당실 마을 입향조 박종린의 손녀와 혼인해 56살에야 아들을 얻었다. 귀한 아들의 이름은 자라를 뜻하는 별(鼈)이라 지었다. 왜 이런 범상치 않은 이름을 지었을까. 숨은 뒷 이야기가 있었다. 선생이 대구부에서 예천 집으로 오던 중 낙동강 포구에서 잠시 쉬던 중, 큰 자라 한 마리를 잡아 와서 파는 어부의 그 자라를 사서 강에 놓아주었다. 그날 밤 꿈에 자라가 나타나 "당신의 아들로 태어나겠다"라며 사라졌다. 그 이후 과연 박씨부인에게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 자라를 생각해 별(鼈)을 이름으로 삼았고 후손들은 약으로라도 절대 자라를 먹지 않게 됐다고 한다. 조선 봉건사회에서 적자의 가문 계승이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시사하는 설화가 아닐까 싶다.
초간정사는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에 있는 조선 전기 초간 권문해가 건립한 누정이다. 초간정은 절벽 위에서 금곡천의 경관을 확보하고 있다.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초간종택과 별당 사랑채
조선 십승지(十勝地)의 하나인 금당실 마을 건너편에는 낮은 뒷동산을 배경으로 다소 경사진 대지 위에 동남향의 양반집 한 채가 있다. 바로 초간선생이 태어난 죽림리 사제이자 그의 후손이 대를 이어 세거해 온 초간종택이다. 이 집은 흔히 조부 권오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하고 있지만, '초간집'에는 아버지 권지가 비로소 이곳에 복거(卜居)했다고 했다. 어느쪽이라도 4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고택임이 분명하다.

종택의 안채는 팔작지붕의 '口'자형 뜰집이다.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로 2단의 기단 위에 세워져 있어 크지는 않지만 건물 전체가 높고 웅장한 느낌을 준다. 안채의 오른쪽 뒤편에는 초간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그 출입문에는 아직도 고식(古式)인 중간 설주가 남아 있어 그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초간종택 안채는 역사적·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안채의 오른편 앞쪽에는 별당 형식의 사랑채가 있다. 전면에 높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난간을 두른 대청과 온돌방을 마련하고 사랑채 뒤로는 날개채를 달아 안채 행랑과 연결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일종의 대청 위주의 누각식 건물이다. 이 별당 사랑채는 바깥 주인이 기거하며 접객의 장소로 이용됐다. 이 건물은 조선 전기에 지어진 매우 드물게 남은 고택이지만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당대의 건축 구조와 양식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보물로 지정돼 보존·관리되고 있다.
초간종택은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에 있는 조선 전기 때 지은 권씨 종가 별당이다. 1967년 6월 23일 보물로 지정됐다. 초간종택은 잡석을 쌓아올린 높은 축대 위에 세웠고 주위에 난간을 돌려 누집 모양으로 꾸민 집이다.

널찍한 사랑채의 앞마당에서 보면 앞쪽으로 멀리까지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어, 이 가문의 포실했던 경제기반을 짐작할 수 있다. 들판 가운데는 특이하게 밥공기를 엎어놓은 듯한 둥그스럼한 동산 2기가 보이는데, 종택이 풍수지리적으로 봉황이 깃들어 알을 품는 명당에 자리잡고 있어 봉황의 알을 상징하는 3곳의 조산(造山) 흔적이라고 전해진다. 마당 입구의 350년 이상의 수령을 자랑하는 늙은 향나무도 눈여겨 볼만하다.

◆초간정사
초간종택 앞을 흐르는 계류를 따라 오르면 울창한 소나무 숲과 어우러진 아담한 정자가 나온다. 경북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초간정사(혹은 초간정)다. 바위를 휘돌아 흐르는 계곡가의 암반 위에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세워진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이다. 이 정자는 원래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머물던 초간이 1582년(선조 15)에 심신을 수양하고 독서하는 장소로 삼기 위해 초옥(草屋)으로 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창건 10년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소실됐고, 아들 권별이 1626년(인조 4)에 다시 중수했지만 또 불에 타 없어졌다. 그 후 초간의 현손인 권봉의가 1741년(영조 17)에 옛터에서 서쪽으로 자리를 조금 옮겨 새로 지었는데 현재의 건물이 바로 그것이다. 정자와 주변의 송림은 풍광이 빼어나서 '초간정 원림'이라는 이름으로 명승으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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