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업 촉진제에 퇴직연금 구세주까지… 점점 커지는 국민연금 역할론
1150조원을 굴리는 ‘큰손’ 국민연금의 역할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자본시장 곳곳에서 커지고 있다. 주식시장에서는 정부가 추진하는 기업 밸류업(가치 제고) 프로그램의 성공을 위해 국민연금이 꼭 등판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친다. 정치권은 퇴직연금의 저조한 수익률을 끌어올려 은퇴자의 노후를 보장하려면 민간 금융사뿐 아니라 국민연금도 수탁 운용 사업자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국민연금, 日 주식 늘린 GPIF 사례 기억해야”
1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최근 정부와 업계에서는 밸류업 정책이 성공하려면 대표적 장기투자자인 국민연금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9월 12일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한 열린 토론’에 참석해 “일본 공적연금(GPIF)의 지속적인 자국 시장 투자 확대가 저평가를 해소하고 일본 밸류업 정책에도 긍정적으로 기여했다는 평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자본시장의 투자 저변이 확대되려면 장기투자 주체로서 연기금의 책임 있는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도 했다. 자본시장 목소리를 대변하는 금융투자협회 역시 GPIF가 자국 주식을 확대한 사례를 언급하며 “국민연금이 한국 주식 투자 비중을 어느 정도만 유지해 줘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GPIF의 자국 주식 투자 확대는 2010년 이후 일본 정부의 아베노믹스와 기업 지배구조 개혁, 일본거래소(JPX)의 상장 유지 조건 강화 등과 맞물려 이뤄졌다. 일련의 정책 추진에 맞춰 GPIF는 전체 투자 자산군 중 일본 주식 비중을 2010년 말 11.5%에서 2013년 말 24.7%까지 늘렸다. GPIF는 현재도 자국 주식 비중을 약 25%로 유지하고 있다.
GPIF의 이 같은 행보는 일본 증시 수익률 극대화에 도움을 줬다. 자본시장연구원의 ‘일본 자본시장 개혁의 성과 동인 및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실제 배당 재투자를 고려한 총수익지수(TSR) 기준 최근 10년(2012년 말~2023년 말) 동안 일본 주가지수는 297% 상승했다. 주요국 증시 가운데 1위다. 같은 기간 한국 증시는 61% 올랐다. 배당 투자 수익을 고려한 실질 수익률은 일본이 한국보다 5배 높았다는 의미다.
밸류업 정책에 국민연금 등판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한국거래소가 9월 24일 ‘코리아 밸류업 지수’를 공개했는데도 증시가 반등 기미를 보이지 않자 더 커지는 분위기다. 올해 7월 말 기준 국민연금은 국내 증시에서 156조원을 굴리고 있다. 여전히 압도적인 큰손이지만, 국민연금은 투자 방점을 해외 시장에 둔 탓에 국내 투자 비중은 매년 줄여가고 있다. 2017년 20% 수준이던 국내 주식 비중은 현재(7월 말) 13.6%까지 작아졌다.
밸류업 정책에 적극 협조해 달라는 요구에 국민연금도 반응하고 있다. 김태현 국민연금 이사장은 “코리아 밸류업 지수가 국민연금의 기금 수익성 제고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활용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했다. 현재 국민연금은 기금운용본부 내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기업 구조개선 자문위원회를 통해 밸류업 지수 활용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 정치권에선 “국민연금 메기로 풀어 퇴직연금 수익률 올려야”
퇴직연금 영역에서도 국민연금의 역할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주로 정치권이 퇴직연금 개혁에 국민연금을 동원하려는 분위기다. 국내 퇴직연금 시장은 400조원 규모로 커졌지만, 적립금의 90%가 원금 보장형 상품에 집중돼 있다는 점이 문제다. 예·적금과 같은 원금 보장 상품은 수익률이 낮아 노후 보장이 전혀 안 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이에 정치권을 중심으로 퇴직연금 적립금을 전문가 집단으로 구성된 별도 조직이 관리·투자하는 ‘기금형’으로 만들고, 이렇게 기금화한 퇴직연금 수탁 운용 사업자에 민간 금융사뿐 아니라 국민연금도 포함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미 더불어민주당 한정애 의원이 100인 초과 사업장은 국민연금을 통해, 100인 이하 사업장은 근로복지공단을 통해 퇴직연금을 기금화하는 법안을 발의한 상태다.
국민연금의 퇴직연금 시장 진출은 야당뿐 아니라 여당에서도 찬성하는 기류가 흐른다. 박수영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과 안상훈 의원 등이 찬성하는 걸로 알려졌다. 국민연금이 퇴직연금 시장의 ‘메기’로 등장하면 시장 전체 사이즈가 커지는 효과를 누릴 수 있고, 민간 금융회사도 수익률 극대화 노력을 더 기울일 수밖에 없을 것이란 이유에서다.
다만 이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금융업계의 반발이 심하다. 이미 국내 자본시장에서 국민연금의 영향력은 절대적인데, 400조 퇴직연금까지 국민연금이 장악하면 민간 사업자는 성장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우려다. 금융권 한 고위 관계자는 “국민연금은 보건복지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외풍에 약하고 독립적인 의사결정에 늘 한계를 보여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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