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 쿠퍼는 'Spray Nation: 1980s NYC Graffiti Photos'를 통해 도시의 언더그라운드 아트 신의 에너지와 날카로운 스타일, 생생한 색감을 그려냈다.

1979년 뉴욕 포스트(New York Post)에서 하루 중 가장 큰 규모의 촬영을 마친 후, 마사 쿠퍼(Martha Cooper)는 맨해튼의 로어 이스트 사이드를 지나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남은 필름을 자신의 눈을 사로잡는 모든 장면을 촬영하는 데 다 써버렸다. 그는 도시의 "창의적인 젊은이들"에 매료되어, ‘Street Play’를 펴냈다.
어느 날 ‘Street Play’ 작업을 하던 도중, 마사는 ‘HE3’라는 이름의 젊은 그라피티 아티스트를 알게 되었다. 마사는 공동 주택 옥상에서 자신의 비둘기를 돌보던 그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는 마사에게 자신의 공책을 비롯해 정교한 스케치를 거친 "HE3"를 보여주었다. 그는 벽에 스프레이를 칠하는 법을 연습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사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라피티에 적어도 어떤 메시지라도 담겨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DAZE’나 ‘DONDI’처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이 좀처럼 와닿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전까지는 그라피티 신에서 작가들이 별명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내가 보고 있는 단어가 그 이들의 별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라피티를 발견하는 일이 마치 보물 찾기처럼 흥미로워졌다.” 재미로 시작한 일은 곧 열정이 되었다. ‘HE3’와의 만남으로 마사는 전설적인 아티스트 돈디(DONDI)를 만나게 되었다. 돈디 화이트(Dondi White)는 마사에게 일반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 수면 아래의 방대한 그라피티 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사는 “그는 내가 본 적도 없는 작품들에 관해 계속해서 이야기해주었다.”라고 말했다.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이야기, 그라피티가 칠해진 지하철들 등, 당최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번도 열차의 외부 모습을 제대로 본 적도 없었다.” 이후 마사는 지상으로 열차가 지나가는 브롱크스의 180번가를 여행하며, 열차의 외부 모습을 확인해 보기로 결심했다. “처음 브롱크스로 갔을 때, 제일 먼저 ‘LEE’라는 글귀가 쓰여진 열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 어젯밤에 그들이 칠한 그라피티임에 틀림없었다. 그 광경을 처음으로 목도하던 날이었다.” 그다음 날에 마사는 ‘BLAZE’라는 글귀가 쓰인 열차를 마주할 수 있었고, 열차의 대부분의 창문에는 아직까지도 그라피티가 남아있었다. 이후 그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열차를 촬영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위해 철로를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는 몇 년 동안 이 일을 제대로 해보기로 결심하며, 1980년에 뉴욕 포스트를 그만두었다.
곧 출판될 사진집 ‘Spray Nation’에서는 1980년대 전반기의 뉴욕 그라피티와 관련한 수백 장에 이르는 마사의 사진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지하철과 역사의 풍경뿐만 아니라 정글과도 같은 도시 속의 다양한 건물들과 표지판, 구조물의 모습 또한 만나볼 수 있다. 그는 당시의 독특하고 상징적인 언더그라운드 그라피티 스타일을 사진으로 담아냈다. 형형색색의 복잡한 손글씨로 이루어진 그라피티는 전 세계에 걸쳐 스타일과 여러 움직임을 비롯한 다방면의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여러 요소 가운데서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그라피티에 깃든 근본적인 재미이다.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신에서 그가 발견한 여러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아티스트들의 장난기 넘치는 경쟁과 흥분을 엿볼 수 있었다. 마사는 그라피티를 두고 “많은 기술이 요구되는 예술의 장이다."라고 설명했다. "훌륭한 장소에서 그에 준하는 멋진 작품을 완성하려면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며, 이는 결과물에 흥분을 더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라피티는 동시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휘발성이 강한 예술이기도 하다. 공들여 완성한 크고 화려한 작품은 밤새 누군가에 의해 깨끗이 닦여버리거나, 다른 페인트로 덧대여질 수도 있다. 마사의 사진은 이러한 작품들을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되어주었다. 그는 “그라피티 작가들에게 사진은 늘 중요한 요소였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들의 작업물을 촬영한 인화본을 그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사진은 그들의 작품이 잠깐이라도 존재했었다는 확실한 증거와도 같았다.”
마사는 그라피티를 기록하는 데 굉장한 열정을 보였던 나머지, 낮에 일하던 기존의 근무 시간을 야간 근무로 변경했다. 그는 “근무 시간을 바꾼 덕분에 아침에 열차에 그려진 그라피티를 보려갈 수 있었다. 아침 출근 시간대와 오후 시간대야말로 기차의 모습을 포착하기에 제격이기 떄문이다."라고 말했다. “역광이 아닌, 강렬한 태양이 비추는 기차를 촬영하고 싶었다.”

마사가 근무 시간을 변경하면서, 그에게 새로운 촬영 장소를 모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다. 근무 시간을 변경하기 전까지는 주로 한밤중에 울타리가 쳐진 기차역으로 몰래 기어들어 가거나, 주차장 주변에 매달려서 촬영을 해야만 했다. 스프레이로 칠해진 지하철이 한 대라도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마사는 “밤에는 경찰이나 라이벌 작가가 대기하고 있을 수 있어서 위험한 편이다. 구타당하거나 체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사진 작가로서 보호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실제로 자신은 법망에 걸린 적이 없었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당국은 그라피티 신의 아티스트들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1985년까지 뉴욕시는 거리의 낙서를 청소하는데 연간 4,200만 달러를 쓰고 있었다. 만약 열차에 그라피티가 그려진 경우 즉시 운행을 중단하고, 스프레이가 깔끔히 지워진 후에만 운행을 재개했다. 여기에 한층 더 엄격해진 보안이 더해지면서, 한때 번성했던 그라피티 신에 제동이 걸리기도 했다.

그라피티 신의 침체기는 동료 사진작가 헨리 찰팬트(Henry Chalfant)와의 공동 프로젝트로 완성된 뉴욕의 그라피티에 관한 마사의 첫 번째 사진집 ‘Subway Art’가 출판될 즈음에 시작됐다. 이 책은 오늘날에야 “그라피티의 바이블”로 불리우며 고전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수많은 소매업체에서 입점을 거부하던 탓에 출판사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마사는 “그라피티 활동이 사그라들었을 때 비로소 어려움이 잠잠해졌다."라고 말했다.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잠잠했다. 책이 나왔을 때 뭔가 뜨거운 반응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시원찮았던 나머지 매우 실망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이후 수십 년 동안 세계 주요 도시 곳곳에서 그라피티를 만날 수 있게 되면서, 그라피티 부흥 운동은 세계적인 현상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많은 대도시 당국에서 합법적인 거리 예술을 수용하기 시작했으며, 유명 그라피티 작가의 작품은 수백만 달러에 판매되었다. 마사는 “80년대 초반의 그라피티 신은 주로 뉴욕을 기반으로 돌아갔고, 굉장한 언더그라운드 문화에 속했다.”라고 말했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도 없는 뉴욕에서만 목격할 수 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라피티 신은 결국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틀렸었다!” 그는 오늘날의 예술가들에게서도 여전히 80년대 언더그라운드 정신의 찬란함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베를린의 ‘1UP Crew’는 도시에서 펼쳐지는 모험의 전형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열차가 들어오고 있는 플랫폼에 페인트를 가득 채운 소화기로 화려하게 그림을 그려 넣었다.”
마사는 “불법 그라피티는 굉장히 흥미진진하다."라고 덧붙였다. 그 매력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마사 쿠퍼의 ‘Spray Nation: 1980s NYC Graffiti Photographs’, 로저 가스트만(Roger Gastman) 편집 © Prestel Verlag, Munich · London · New York, 2022.




사진 제공 Martha Cooper
에디터 Isaac Muk
번역 Park Jiwoo
20세기 패션 사진계의 '창의적인 괴짜', 윌리엄 클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