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주 베르나르 자녀들 모두 경영 참여, ‘능력 위주’ 원칙 외엔 후계구도 전부 안갯속

글로벌 명품 시장을 지배하는 아르노 가문의 승계 시계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현재 가문을 이끄는 베르나르 아르노(Bernard Arnault)가 고령에 접어들면서 그의 뒤를 잇기 위한 후계들 간에 경쟁이 본격화되는 양상이다. 아르노 가문의 승계 구도 변화는 글로벌 명품 시장을 넘어 패션·잡화 원재료인 섬유업계, 명품 판매 의존도가 높은 백화점업계 등 타 산업 분야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능력 위주” 한 마디 후 굳게 닫힌 황제의 입, 럭셔리 제국 둘러싼 ‘왕좌의 게임’ 관심
아르노 가문은 전체 재산 규모만 320조원에 달하는 명실상부한 유럽 최고 재벌가다. 특히 가문 수장 베르나르는 지난해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부자 순위에서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에 이어 2위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인 재력을 자랑한다. 아르노 가문 소유의 명품기업 LVMH는 약 600조원 규모로 알려진 글로벌 명품 시장에서 약 25%에 육박하는 점유율을 자랑하며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아르노 가문은 과거부터 줄곧 프랑스 상류층에 속해 있었지만 베르나르 직전까지도 명품산업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베르나르의 아버지인 장 아르노(Jean Arnault)는 프랑스의 명문 공학 학교인 ‘에콜 상트랄 파리(Ecole Centrale Paris)’를 졸업한 엘리트 엔지니어이자 건설업을 영위하는 사업가였다. 베르나르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부동산 개발 및 투자업계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한창 부동산 개발·투자 사업에 몰두하던 도중 우연한 기회에 명품산업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크리스챤 디올’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던 ‘부샥 그룹(Boussac Saint-Frères)’을 인수하며 명품산업에 첫 발을 디뎠다. 이후 공격적인 인수합병(M&A)을 통해 수많은 명품 브랜드 보유 기업을 인수했고 이후 제품 생산 방식 개선, 럭셔리 마케팅 등을 통해 명품의 대중화를 일궈냈다. 시장의 성장에 힘입어 LVMH그룹도 빠르게 성장했다. 이러한 과정은 그가 단순한 명품재벌이 아닌 유럽을 대표하는 사업가로 인정받는 결정적 이유로 꼽혀왔다.
베르나르는 슬하에 4남 1녀를 두고 있으며 자녀들은 모두 LVMH 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다만 베르나르 아직까지 후계자를 지명하진 않고 능력 위주의 승계 원칙만을 공개한 상태다. 현재 관련업계 안팎에선 LVMH의 후계구도를 둘러싼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승계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받는 인물은 장녀인 델핀 아르노(Delphine Arnault)와 장남 앙투안 아르노 (Antoine Arnault)다. 남매는 모두 베르나르와 그의 첫 번째 부인 앤 드와브랭(Anne Dewavrin) 사이에서 태어났다.
현재 장녀 델핀은 LVMH의 모태격인 크리스찬 디올 CEO를 역임하고 있다. 크리스찬 디올은 베르나르가 인수한 첫 번째 럭셔리 브랜드로 베르나르가 남다른 애정을 지닌 사업체로 알려져 있다. 델핀은 루이비통, 푸치, 모엣 헤네시, 셀린, 로에베 등 그룹 내 다른 브랜드의 이사직도 겸임 중이다. LVMH가 브랜드별이 아닌 사업부문별로 실적을 공개해 델핀의 경영 능력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지만 유럽 현지에선 크리스찬 디올을 이끈다는 상징성을 근거로 그를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꼽는 시선이 많다.

장남 앙투안은 현재 ‘LVMH의 얼굴’로 여겨지는 커뮤니케이션 이사직과 크리스챤 디올 SE(Christian Dior SE)의 부회장직을 겸직하고 있다. 그가 부회장직을 맡고 있는 크리스챤 디올 SE는 LVMH를 지배하는 지주사격 기업이다. 또 앙투안은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및 지속가능성 분야를 진두지휘하며 LVMH의 미래 지향적인 가치를 확립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나머지 자녀들은 베르나르와 두번째 아네인 엘렌 메르시 아르노(Hélène Mercier Arnault)와 사이에서 태어났다. 차남 알렉상드르 아르노(Alexandre Arnault)는 LVMH 주얼리 부문과 티파니앤코 부사장을 겸직하고 있다. 그는 과거 리모와(Rimowa) CEO로서 브랜드의 성공적인 리포지셔닝과 디지털 전환을 이끌어내 프랑스 패션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알렉상드르는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지난 2021년 인수한 티파티앤코 또한 LVMH 방식으로 완전히 전환시키는 중요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삼남 프레데릭 아르노(Frédéric Arnault)는 오랫동안 LVMH 시계 사업을 총괄하다가 최근 로로피아나 CEO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룹을 대표하는 시계 전문가로 알려진 그는 과거 럭셔리 시계 브랜드 태그호이어 CEO 시절 스마트워치 개발과 디지털 전략을 주도한 이력을 지녔다. 프레데릭이 당시 능력을 인정받아 그룹 시계 사업부 총괄 자리까지 올랐던 이력을 지닌 만큼 로로피아나 CEO로 이동한 것을 두고 유럽 현지 여론은 베르나르가 다양한 분야를 경험하도록 배려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게 하는 것 자체가 강력한 후계자 후보로 인정하고 있다는 방증이란 평가도 적지 않다.

막내아들 장 아르노(Jean Arnault)는 형 프레데릭에 이어 LVMH 시계 사업 총괄직을 맡고 있다. 2021년 LVMH에 합류한 그는 형제들에 비해 비교적 뒤늦게 경영에 참여했지만 보석학 학위를 취득하고 매장에 직접 방문해 현장경영에 나서는 등 다른 형제들에 비해 유독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럽 현지에선 어린 나이부터 LVMH의 핵심 사업부를 맡았다는 것은 베르나르가 그에게 거는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의미라는 분석이 많다. 아르노 가문은 한 달에 한번 의무적으로 모든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 데 유럽 재계에선 식사 자리에선 자녀들의 경영 평가가 실시간으로 이뤄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명품만큼 복잡하고 세밀한 ‘3중 옥상옥’ 지배구조…승계 판도 따라 관련 산업도 변화 전망
베르나르가 구축한 LVMH는 명품 시계에 버금가는 복잡하고 세밀한 지배구조로 유명하다. LVMH 그룹 지배구조는 아가슈 SCA(Agache SCA)➞피낭시에르 아가슈(Financiere Agache)➞크리스챤 디올 S.E.➞LVMH➞75개 자회사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갖추고 있다. 지주회사격인 LVMH의 상위 계열사만 무려 3곳에 달하는 셈이다. 지배구조의 최정점에 위치한 ‘아가슈 SCA’는 아르노 가문이 지분의 100%를 소유하고 있으며 프랑스 법률상 ‘합자회사(Société en Commandite par Actions·SCA)’ 형태를 갖추고 있다.
합자회사의 소유구조는 ‘무한책임 경영 파트너(Gérant Commandité)’와 ‘유한책임 투자 파트너(Associé Commanditaire)’로 나뉘는데 전자는 회사 경영에 참여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현재 가문의 수장인 베르나르가 여기에 속해 있다. 또한 지난해 ‘아가슈 코맨디트 SAS(Agache Commandite SAS)’란 기업이 무한책임 경영 파트너로 새롭게 편입됐는데 해당 기업의 지분구조는 베르나르의 자녀들이 동등하게 20%씩 보유한 형태를 띠고 있다. 사실상 승계를 염두한 조치로 풀이된다.

유한 파트너들은 경영에 참여할 수 없지만 회사로부터 수익을 배분받을 수 있는 지위를 뜻한다. 영향력은 없지만 생계는 유지할 수 있는 셈이다. 현재 베르나르와 그의 직계가 아닌 다른 아르노 가문 일원들이 여기에 속해 있다. 베르나르의 조카인 스테파니 와틴(Stephanie Watin)과 루보틱 와틴 (Lubotic Watin) 등이 대표적이다. 향후 베르나르의 자녀들 중 후계자로 낙점되지 못한 나머지 자녀들도 유한 파트너 그룹에 속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아가슈 SCA’가 최대주주인 또 다른 상위 계열사 ‘피낭시에르 아가슈(Financière Agache)’는 크리스챤 디올 SE의 지분 97%를 소유한 동시에 아르노 가문의 자산을 관리하는 투자사 역할을 도맡고 있다. ‘크리스챤 디올 S.E.’는 LVMH 모엣 헤네시 루이 비통(LVMH SE)에 대한 지분 41%를 소유하고 있으며 LVMH는 루이비통, 디올, 셀린느, 펜디, 불가리, 티파니앤코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품 브랜드 기업의 최대주주에 올라 있다.
한 글로벌 투자기업 관계자는 “현재 글로벌 명품시장은 아르노 가문의 손에 좌우된다고 봐도 무방하다”며 “명품산업 자체가 섬유, 유통, 물류 등 다양한 산업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만큼 사실상 그 영향력은 ‘글로벌 톱’ 수준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재 베르나르 회장이 고령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아르노 가문의 경영승계도 점차 가속화되고 있는데 향후 결과에 따라 명품산업과 유관산업의 판도도 크게 달라질 것으로 전망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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