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집서 인질극…탈주범 지강헌 '유전무죄' 명언 남기고 최후

박태훈 선임기자 2024. 10. 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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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0만원 훔치고 17년형, 76억 횡령 전경환 7년형[사건속 오늘]
경찰과 대치 장면 전국 생중계…'홀리데이' 음악 들으며 마감
1988년 10월 8일 호송 버스를 탈취해 탈옥한 지강헌은 10월 16일 북가좌동 한 주택에서 권총으로 무장인질극을 펼치며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쳤다. (KBS 갈무리)

(서울=뉴스1) 박태훈 선임기자 = 36년 전 오늘은 우리나라 범죄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날이다.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라는 기치 아래 진행됐던 88서울올림픽(9월 17일~10월2일) 여운이 남아있던 10월 8일 토요일 영등포 교도소에서 지방 교도소, 치료감호소로 이감되던 지강헌 등 12명의 죄수가 호송 교도관을 흉기로 찌르고 권총 1자루와 실탄, 버스를 탈취해 도주한 날이다.

탈주범 중 가장 나이가 많았고 사실상 탈주를 주도한 지강헌(1954년 2월 8일생)의 이름을 따 '지강헌 사건'으로도 불린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명언…560만원 절도 17년 형, 은마아파트 190채 돈 횡령 전경환 7년

지강헌 사건이 우리 사회에 끼친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가장 큰 충격은 그가 외쳤던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였다. 권력과 돈이 있으면 법의 처벌을 면하거나 잡혀도 약한 벌만 받는다는 당시 사회 풍토를 이처럼 신랄하게 꼬집은 말은 없었다.

지강헌은 560만 원을 훔친 혐의로 징역 7년에 이어 보호감호 10년 등 17년 옥살이를 하는 반면 76억 원을 횡령한 전두환 전 대통령 동생 전경환 씨는 징역 7년 형에 그친 사실(전경환 3년 뒤인 1991년 가석방)에 격분, 내뱉은 말이었다.

1988년 은마아파트 시세가 4000만여 원인 점을 감안하면 전경환 씨가 횡령한 76억 원은 은마아파트 190채 값으로 지금으로 치면 4000억 원이 훌쩍 넘는 엄청난 거금이다.

전국에 생중계된 3대 대형 사건 중 하나…무장 인질극 생중계는 처음

지강헌 등은 10월 8일 중부 고속도로 안성 부근에서 버스를 탈취해 서울 서초동 공무원 교육원(현 더케이호텔 자리)까지 온 뒤 25명 중 12명(13명은 호송차 잔류)은 버스에서 내려 우면산, 말죽거리 등으로 흩어져 탈주했다.

12명 중 5명은 그날 밤 검거됐고 1명은 14일 자수 의사를 밝힌 뒤 체포됐다.

지강헌, 안광술(21세), 한의철(19세), 강영일(20세)은 도주에 도주를 거듭하다가 10월 15일 밤 9시 40분 서대문구 북가좌동의 한 가정집에 들어가 가족을 인질로 잡았다.

인질 중 한명이 10월 16일 새벽 4시, 몰래 빠져나와 경찰에 신고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갑호 비상력을 발령, 필수 근무요원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경찰력을 현장에 집결시켰다.

무장 인질극이 벌어졌다는 소식에 전 언론사도 특별취재팀을 꾸려 현장으로 갔고 방송사도 88올림픽 때 사용했던 중계차와 카메라를 투입했다.

아침부터 국민들은 무장 인질극 생중계에 경악했다.

지강헌 사건 생중계는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피격(광복절 기념식 생중계), 1971년 12월 25일 166명의 사망자를 낸 서울 명동 대연각 호텔 화재 사건과 함께 생중계된 3대 대형 사건으로 꼽힌다.

이후 무장 인질극 같은 끔찍한 장면은 되도록 공개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형성돼 피가 난무하는 생생한 범죄 현장을 중계하는 일은 사라졌다.

지강헌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2006년 이성재 주연의 영화 '홀리데이' (사진=롯데 엔터)ⓒ 뉴스1

'당신은 내게 휴식 같은 사람' 비지스 홀리데이 요구하며 최후 준비

지강헌 일당은 인질극을 펼친 지 14시간이 넘어가던 10월 16일 정오무렵 '어차피 잡히면 최소 무기징역이다'고 판단, 최후를 준비했다.

지강헌은 영등포 교도소 같은 감방에서 아꼈던 강영일 등을 떠밀어 자수 시킨 뒤 비지스의 1967년 히트곡 홀리데이(Holiday)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요구했다.

지강헌이 테이프를 받아 녹음기에 걸던 순간 안광술, 한의철은 지강헌이 갖고 있던 권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때 지강헌은 "Oh, you're a holiday. Such a holiday. Oooh, you're a holiday. Such a holiday"(당신은 내게 휴일같은 사람, 휴식같은 사람입니다)라는 비지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창문을 깨 유리조각을 자신의 목에 갖다 댔다.

총소리가 나자 무장한 정예 형사들은 더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며 총을 쏘면서 집안으로 뛰어들었다.

지강헌,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강영일, 2007년 출소

지강헌은 경찰이 쏜 총에 맞고(2발) 현장에서 검거됐다.

경찰은 서둘러 지강헌을 인근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겼으나 그는 2시간여 뒤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지강헌의 강권으로 자수한 강영일(탈주 당시 징역 10년, 보호감호 5년)은 이 일로 징역 9년 형을 추가로 선고(도합 19년 형)받았다.

강영일은 2007년 6월 만기출소, 조용히 삶을 이어가고 있다.

경찰이 쏜 총을 맞고 쓰러진 지강헌을 형사들이 급히 병원으로 옮기는 모습. (KBS 갈무리) ⓒ 뉴스1

지강헌, 몇몇 가정집 침입했지만 사람 해치지 않아…인질 안심시키기도

지강헌 일당은 북가좌동 가정집을 침입하기 전 말죽거리를 거쳐 강남 신사동, 한남동, 무악재 등을 돌아다니며 몸을 숨겼다.

그 과정에서 몇몇 가정집에 들어가 은신했지만 사람을 해치거나 돈을 뺏는 일은 하지 않았다.

북가좌동 인질극에서도 '이해해 달라' '조금만 참아달라'며 사정을 봐줄 것을 청하기도 했다. 새벽에 인질 가족 중 1명이 몰래 탈출했음에도 이를 이유로 남은 가족을 해꼬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찰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인질 목에 흉기를 들이댈 때도 '절대 해치지 않겠다, 걱정말라'고 귓속말까지 했다.

이에 풀려난 가족들은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실감났다'며 자수한 강영일의 선처를 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홀리데이'로 만들어져…교도관 근무여건 개선 ,홀리데이 노래 역주행

지강헌 사건은 2006년 이성재 주연의 영화 '홀리데이'로도 만들어졌다.

제목은 지강헌이 요구한 비지스 노래 '홀리데이'에서 착안해 붙였다.

또 비지스의 홀리데이는 20여년만에 한국 팝챠트 상위권에 오르는 등 역주행했고 지금까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애잔한 리듬의 홀리데이 노래는 이밖에 1997년 안성기-박중훈 주연의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도 주제곡으로 사용됐다.

한편 법무부는 지강헌 일당이 무장 교도관을 제압하게 된 배경이 사실상 25시간씩 근무해야 하는 '2부제'라는 가혹한 교도관 근무여건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지적받자 3부제로 근무환경을 개선했다.

아울러 이중처벌이라며 지강헌이 논란을 촉발시킨 보호감호제도도 손질에 손질 끝에 2005년 폐지됐다.

buckbak@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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