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엘팬알백] ㉔1990년 LG 트윈스 첫 우승의 여운과 뒷얘기들

“뭘 도와줄까요?”
1990년 LG 트윈스 구본무 구단주(럭키금성 그룹 부회장)는 백인천 감독을 만날 때마다 요구와 지적 대신 도와줄 것을 찾았다.
“선수단 라커룸에 에어컨을 넣어주십시오.”
백 감독이 이같이 대답하자 창원공장에서 출고 대기 중이던 에어컨이 잠실구장 LG 라커룸에 곧바로 들어왔다. 당시는 한여름에도 선수들이 큰 아이스박스에 물수건을 넣어두고 더위와 땀을 식히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다른 구단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백인천 전 감독의 자서전 ‘노력자애(努力自愛)’에 나오는 이야기다. 구본무 구단주의 야구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구본무 구단주는 MBC 청룡을 인수한 뒤 여의도 쌍둥이빌딩 집무실로 백 감독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야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백 감독이 편하게 할 수 있도록 뭐든지 얘기하십시오. 지원해주겠습니다. 야구단에 이러쿵저러쿵 간섭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한테 얘기하세요.”

실제로 6월초까지 최하위로 떨어졌을 때 팬들이 청문회를 요구할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지만 구단주는 “10연패 해도 괜찮습니다. 감독님 소신껏 하세요”라며 백 감독에게 힘을 실어줬다.
구단주의 지시에 따라 LG 구단 프런트는 백 감독과 선수단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간섭이 많고 조건이 많았던 MBC 청룡 시절과는 너무나도 다른 환경이었다.
결국 LG 트윈스는 백 감독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쳤고, 프로야구에 뛰어든 첫해에 곧바로 페넌트레이스와 한국시리즈 통합우승을 차지하면서 서울팀 최초의 우승 신화를 썼다.
그러나 호사다마일까. 우승 직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터지게 된다. 바로 백인천 감독이 1년 전 MBC 청룡과 맺었던 이면계약의 불씨가 되살아난 것. 한바탕 소용돌이가 일었다.
[엘팬알백-LG 트윈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24번째 주제는 1990년 첫 우승 이후의 여운과 뒷얘기들이다.


◆“서울 가서 우승하면 안 될까요?”
“백 감독, 여기선 3승하고 잠실 가서 이기면 어떻겠습니까.”
LG 트윈스 김종정 사장은 1990년 한국시리즈 3차전마저 대구에서 3-2로 승리하자 백 감독에게 농담을 던졌다.
“7차전 가도 꼭 이긴다는 보장을 해준다면 그렇게 하죠.”
당시엔 페넨트레이스 1위 팀 홈에서 1~2차전을 펼치고, 플레이오프 승자의 홈에서 3~4차전을 치렀다. 5차전부터 7차전까지는 중립구장 개념으로 수도 서울의 잠실구장에서 이어가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LG가 홈구장 잠실에서 1~2차전을 잡더니 원정지인 대구에서 3차전까지 이겨버렸다. 한국시리즈가 LG의 일방적인 흐름으로 싱거워지는 분위기였다.
만약 4차전에서 한국시리즈를 끝낸다면 LG는 당시 역대 한 시즌 최다 홈관중 신기록(76만8329명)을 쓰게 만들어준 서울의 팬들 앞에서 우승 세리머니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김종정 사장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그런 농담반 진담반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LG는 파죽지세로 4차전에서도 삼성을 6-2로 물리치고 4승무패 ‘퍼펙트 우승’을 달성했다. 대구구장까지 찾아온 열성 LG 팬들은 서울팀 최초 우승이라는 역사적인 현장을 직관했지만, 대부분의 LG 팬들은 TV를 통해 우승 장면을 간접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잠실에서 LG 청백전을 해봅시다”…3만 관중 인산인해
1990년 LG 트윈스의 챔프 등극은 서울 구단 최초의 우승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한편으로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기에 우승 행사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노하우가 없었다.
하지만 LG 트윈스 프런트 직원들은 아이디어가 풍부했다.
럭키금성 그룹 각 계열사에서 인재들을 뽑아 구본무 구단주의 최종 면접 끝에 프로야구단 프런트로 인사발령이 난 게 2월 1일이었다. 그런데 3월 15일 창단식까지 한 달 반 만에 구단 이름을 정하고, CI와 마스코트와 로고 및 심벌을 만들고, 줄무늬 유니폼을 제작하고, 버스 디자인까지 완성해 냈던 초대 프런트였다.
LG로선 감격적인 우승이었다. 다소 아쉬운 게 있다면 앞서 설명했듯이 안방인 잠실구장에서 홈팬들과 우승 세리머니를 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원정지인 대구에서 우승하다보니 감독 헹가래와 덕아웃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게 전부였다. 당시만 해도 원정구장 분위기는 험악했기 때문에 서둘러 우승 행사를 마쳐야만 했다.
그래서 LG 프런트는 선수단과 서울의 홈팬들이 최대한 우승의 여운을 즐길 수 있도록 별도의 갖가지 행사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선 11월 2일 반도유스호스텔에서 프런트 직원과 백인천 감독을 비롯한 선수단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시리즈 우승을 기념하는 자축연을 열었다.
11월 7일에는 규모를 키워 인터컨티넨탈호텔 2층 대연회장에서 체육부장관을 비롯해 그룹 임직원과 프로야구 관계자 등 1300여 명을 초대해 성대한 우승 축하연을 개최하기도 했다.
팬들과 만남에 특히 신경을 많이 썼다. 1980년대에는 지방팀이 우승하면 카퍼레이드를 펼치곤 했지만, 교통체증이 극심한 서울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11월 3~4일, 7~12일 서울 시내 각 백화점에서 선수단 사인회를 개최해 팬들이 선수들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만들었다.
최고의 히트작은 ‘LG 청백전’이었다. 11월 18일 오후 1시부터 잠실야구장에서 시작한 이 행사에 기대 이상의 수많은 LG 팬들이 몰려들었다. 우승팀이 홈팬들을 대상으로 자체 청백전을 치르는 것 자체가 프로야구 사상 처음 있는 일. LG 팬들의 호응이 대단했다.
아침 일찍부터 무료 입장권을 받기 위해 팬들이 줄을 서는 등 마치 한국시리즈를 방불케하는 열기가 잠실 일대를 휘감았다.

“그해 LG 홈 관중수가 70만 명을 돌파해 76만 명(76만8329명)을 찍었습니다. 같은 잠실야구장을 쓰는 OB의 관중수(36만6968명)와 비교하면 거의 2배였을 정도로 당시 LG 팬들의 응원 열기가 뜨거웠죠. 그렇더라도 LG 청백전 행사가 11월 쌀쌀한 날씨 속에 펼쳐졌기 때문에 팬들이 얼마나 올지 몰라 걱정했는데, 팬들이 잠실구장을 꽉 채워 우리 프런트 직원들도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1990년 LG 홍보팀 김인양 과장(전 LG 세이커스 농구단장)의 말이다. 김 과장은 원래 럭키금성 그룹 계열사인 LG 애드에 입사한 광고 전문가로 프로야구단 창단 때 LG 트윈스 프런트에 지원한 인물이었다.
식전 행사로 LG 선수들이 낮 12시부터 1·3루 출입구에 섰다. 그리고는 ‘1990년 우승’을 기념하는 1990개의 사인볼을 입장하는 팬들에게 직접 나눠줬다. 팬들은 선수들을 눈앞에서 보는 즐거움에 환호성을 질렀다.
오후 1시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가 울리자 팬들은 열화와 같은 박수와 함성으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중견성우 양지운 씨와 인기개그맨 강석, 김병조 씨 등이 사회를 보면서 선수단이 소개됐고, 1시 30분부터 홈런레이스가 펼쳐졌다. 특히 1982년 4할 타자 백인천 감독이 참가해 2개의 홈런을 날리며 녹슬지 않은 방망이 솜씨를 보이자 팬들의 탄성이 터지기도 했다.

이날 입장한 관중들에게 경품 잔치가 펼쳐졌다. 3만 명에게 럭키스타치약 1개씩을 나눠주고, 경기 후 추첨을 통해 금성VTR(5명), TV(5명), 도레미카메라(40명), 도레미오르간(50명), 금성아하카세트(100명)도 추첨을 통해 선물했다.
오후 2시부터 청백전이 시작됐는데 박현식 2군 감독이 이끄는 청팀에는 김용수, 이용철, 차동철, 유종겸, 문병권, 김기범, 심재원, 김상훈, 나웅, 김재박, 박흥식, 신언호, 최훈재 등이 포진했다. 백인천 감독이 지휘한 백팀에는 김태원 이국성 정삼흠 김덕근 김동수 차동철 김선진 김동재 이광은 민경삼 윤동규 이병훈 김영직 노찬엽 조필현 등이 포함돼 축제 한마당을 펼쳤다.
승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팬들은 겨울로 접어드는 시점에 자랑스러운 LG 트윈스 선수들을 그라운드에서 한 번 더 보는 게 즐거울 뿐이었다. MBC 청룡 시절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시즌 후 펼쳐진 LG의 이같은 행사는 다른 구단에도 영향을 미쳤다. 요즘엔 우승팀뿐만 아니라 모든 구단이 연말에 별도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 한 시즌 동안 성원해 준 팬들과 함께 호흡하는 감사 축제를 벌이고 있다. 그 원조가 바로 1990년 LG의 이 행사였다.

◆우승 후 터진 홍역…백인천 감독의 각서 파동
“내가 그만두겠습니다.”
1990년 12월 10일 오후, 백인천 감독은 LG 주정규 운영부장을 만나 사표를 전달한 뒤 감독직에서 자진사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골든글러브 시상식 하루 전날이었다. LG 구단은 비상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백 감독은 하루 뒤 골든글러브 시상식장에서 기자들을 만나 자신이 LG 구단에 사표를 던진 사실을 알렸다. 당연히 신문에 대서특필될 수밖에 없었다.
백 감독이 이런 폭탄을 던진 건 LG 트윈스가 창단하기 전 MBC 청룡과 감독계약을 하면서 만들어진 ‘합의서’ 형식의 이면계약 때문이었다.
MBC는 1989년 11월 7일 배성서 감독 후임으로 백인천 감독을 영입하면서 이면계약을 했다. KBO에 제출하는 공인계약서에는 1년 단위로 계약한 것으로 제출했지만, 당시엔 이면계약이 성행하던 시절이었다. 실제로는 2년 계약을 하면서 양측은 합의서를 썼다.
합의서에는 아래의 내용을 담았다.

1. 계약기간 : 2년(1989.11.7.~1991.11.6.)
2. 연봉 : 연간 5,000만 원
3. 입단보너스 : 5,800만 원(입단보너스 5천, 자동차구입 보조비 8백)
4. 1년 후 구단의 사정에 의하여 해약 시 잔여기간의 연봉은 요구하지 않는다.
1989년 11월 7일
합의서의 핵심은 팀 성적이 저조해 구단에서 백 감독을 해고할 경우 잔여연봉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MBC 청룡은 그동안 계약기간이 남은 감독을 자주 경질해 왔다. 새 감독 선임 후 이중으로 연봉이 나가는 문제는 구단의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안전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이런 합의서를 백인천 감독에게 요구했던 것이었다.
백 감독으로선 일종의 굴욕적인 이면계약이었다. 그래서 이건영 사장에게 “만약 성적이 좋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물었고, 이 사장은 “그때 가서 다시 계약하자”는 구두약속을 했다.
그런데 MBC 구단이 럭키금성 그룹으로 넘어가고, LG 트윈스가 첫해에 우승까지 하면서 이면계약 문제가 시한폭탄이 됐던 것이다.
1989년 계약의 주체였던 MBC 이건영 사장은 1990년 LG 트윈스 구단 고문이 되고, 조광식 상무는 LG 트윈스 초대 단장을 맡았다. 선수단과 계약서를 인수인계하는 과정에서 이건영 사장은 “굳이 백 감독에게 불리한 각서까지 넘길 필요가 있느냐”며 조광식 단장이 보는 앞에서 각서를 찢어버렸다. 한마디로 백 감독을 위해 선의로 합의서를 파기했는데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고 말았다.


사실 시한폭탄이 먼저 터진 것은 11월 초였다. 백 감독은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열린 행사에서 주변에 앉은 기자들에게 이면계약 사실을 털어놨고, 스포츠신문 1면에 이런 내용의 보도가 나오면서 세상 밖으로 알려졌다.
당시 일간스포츠 1면에 이 내용을 기사화한 홍윤표 기자(현 OSEN 선임기자)는 “그해에 내가 LG 트윈스 담당기자였는데 백인천 감독이 MBC 청룡과 맺었던 이면계약 이야기를 꺼내시더라”면서 “그냥 가볍게 하는 얘기가 아니라 기사를 쓰도록 의도를 갖고 흘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기사를 썼는데 파장이 크게 일었던 기억이 난다”고 당시 상황을 돌이켰다.
하지만 LG 구단 측은 당시 “우리는 MBC 측으로부터 이면계약 내용을 전해듣지 못했다”면서 “LG 구단 명의로 계약서를 다시 꾸밀 때 옵션이 있다는 사실은 전달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내년까지의 2년 계약이 유효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건을 요약해 재구성하자면 MBC 청룡 구단과 백인천 감독은 이면계약 내용을 공유하고 합의서를 한 장씩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MBC는 LG에 이면계약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자체적으로 합의서를 찢어버렸다. 백 감독을 위해 선의로 파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LG 구단은 MBC와 백인천 감독이 작성한 이면계약 합의서를 받지 못했고, LG 구단 명의의 새로운 계약서에 이면계약 내용을 삽입하지 않았다.
또한 MBC는 백 감독에게 이면계약 파기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백 감독은 자신의 이면계약이 LG로 넘어간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옵션을 없앴다면 나에게 통보를 해줬어야 마땅하다”며 자신은 1년짜리 계약(1+1년)을 했으니 합의서에 따라 LG 구단에서 자신과 재계약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자신이 데려온 조창수 수석코치를 비롯한 MBC 원년 멤버 출신의 코치들(정순명 김용달 김봉기 최정기 하기룡 최정우)에게도 우승도 했으니 응분의 보상을 해달라는 요구를 하기에 이르렀다. 공평하게 계약금 3000만 원과 연봉 3000만 원을 지급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당시로선 다른 구단 코치들과 견줘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구단이 받아들이기엔 부담이 컸다.

재계약 문제를 놓고 구단과 백인천 감독 양측의 실랑이가 벌어지는 와중에 LG 구단이 미국인 마틴 패튼을 2군 투수코치로 영입했다.
LG 구단은 창단 당시부터 메이저리그식 선진야구와 구단운영 시스템을 배우려했다. 그래서 줄무늬 유니폼도 메이저리그 최고 명문구단인 뉴욕 양키스를 본따 만들었고, 시즌 중임에도 5월에는 김종정 사장과 최종준 기획실장이 메이저리그 구단들을 돌면서 선진 구단운영 기법을 배워 오기도 했다. 패튼 코치 영입도 그런 구단 정책 방향성의 일환이었다.
재계약 문제로 가뜩이나 심기가 틀어져 있던 백 감독은 노발대발했다. “코치를 영입하면서 어떻게 나와 상의를 하지 않느냐”며 골든글러브 시상식을 하루 앞두고 구단에 사표를 던진 것이었다.

LG로서는 백인천 감독이 초대 감독인 데다 우승까지 이끈 사령탑이기에 진퇴양난이었다.
결국 김종정 사장과 백 감독이 만나는 수밖에 없었다. 12월 19일 낮 12시 마포 가든호텔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그동안의 오해를 풀었다.
구단은 우승을 이끈 코치들에게 타당한 대우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계약금 2500만 원을 일괄적으로 지급하되 연봉과 계약기간은 감독과 상의를 거쳐 차등을 두기로 했다. 그러자 백 감독은 스스로 제출한 사표를 철회하면서 자신의 재계약 문제도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 LG 구단은 백 감독에게 우승 보너스 2000만 원을 지급하면서 각서 파동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김종정 사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마틴 패튼 2군 코치 선임과 관련해서도 “감독의 의견을 듣지 않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면서 “앞으로 1,2군에 관계없이 코치진을 기용할 때 필드 사령관인 감독과 충분히 상의하겠다. 선수단에 대한 지원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백 감독은 “올해보다 훨씬 더 정열을 쏟아 V2를 반드시 이룩하겠다”고 화답했다.
LG 구단은 창단 첫해 수많은 일을 겪었다. 꼴찌로 추락한 뒤 우승에 이르는 과정도 드라마틱했지만, 우승 후 불어닥친 태풍 때문에 크나큰 홍역을 치렀다. 하지만 불과 몇 개월 사이 경험한 이 모든 과정들은 구단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발판이 됐고, 1990년대 프로야구를 선도하는 구단으로 빠르게 도약하는 데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백 감독은 20일 건국대야구장에서 마무리훈련 중이던 선수단에 합류해 1991시즌 준비에 돌입했다.
백 감독의 사퇴 파동이 이렇게 일단락되고, 아마추어 야수 최대어로 꼽힌 슈퍼루키 송구홍도 가세하면서 LG는 2연패에 대한 자신감을 고조시켰다.
[엘팬알백] ㉕편에서 계속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유튜브 '이재국의 와일드피치'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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