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페이크 판치자…범죄자도 '잊힐 권리' 앞세워 '과거 세탁'

이소은 기자 2024. 10. 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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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리포트]'타인의 과거=돈' 디지털 장의사의 세계③ '기억할 의무' 반대논리도
[편집자주] 온라인 세상에서 '잊힐 권리'는 디지털 장의사라는 직종을 만들어냈다. 디지털 장의사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이들이 남긴 온라인상 흔적을 지워주는 것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일한다. 딥페이크 불법 합성물 삭제에서부터 범죄 등 부끄러운 과거를 지우려는 사람들이 핵심 고객이 됐다.

잊혀질 권리는 2014년 EU 최고 법원 유럽 사법재판소가 개인의 '잊혀질 권리'를 인정하는 판결을 처음으로 내리면서 개념이 확립됐다. /AP=뉴시스
디지털 장의사를 논할 때 늘 따라붙는 개념이 있다. '잊힐 권리'다. 디지털 장의사는 디지털 피해자들을 위해 수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과거의 인터넷 기록물을 삭제해 '잊힐 권리'를 실현한다.
유럽사법재판소 "개인의 잊힐 권리 인정"
'잊힐 권리'는 정보 주체가 온라인에서 자신과 관련된 모든 정보 삭제와 확산 방지를 요구할 수 있다는 자기 결정권 및 통제권을 의미한다. 1995년 유럽연합(EU)이 개인정보 처리를 규정하는 '유럽 개인정보 보호 규정 및 지침'을 만들면서 처음 언급됐다. 이후 2012년 EU가 일반정보보호 규정을 제정하며 명문화됐다.

이후 '잊힐 권리' 범위를 두고 업계와 유럽 정부 간의 이견이 이어지다 2014년 EU 최고 법원 유럽 사법재판소가 개인의 '잊힐 권리'를 인정하는 판결을 처음 내리면서 개념이 확립됐다. 판결 이후 유럽에서는 개인이 인터넷상에서 자신의 정보를 삭제하도록 요청할 수 있게 됐다.

EU가 채택한 권리 기준은 △데이터를 수집하거나 처리될 당시 특정 목적을 위해 사용할 필요가 없어진 경우 △개인이 데이터 사용에 대한 동의를 철회하고 그에 반하는 정당한 근거가 없는 경우 △개인 데이터가 다이렉트 마케팅 목적으로 처리되고 개인이 이에 이의를 제기한 경우 등이다.

다만 데이터가 △표현의 자유와 정보의 자유를 행사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경우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고 있거나 조직의 공식적인 권한을 행사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경우 △공중위생 목적으로 필요하며 공공의 이익에 이바지하는 경우에는 개인 데이터 삭제 요청이 거부된다.
국내에선 부작용 우려…명예훼손 등 이미 보장돼 한계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에 접수된 삭제 요청 건수. /사진=김지영 디자인기자
유럽사법재판소 판결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기록 삭제' 요청이 빗발치면서 한동안 국내에서도 '잊힐 권리'가 화제가 됐다. 이에 맞서 '기억할 의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생겼다. 이들은 공인, 범죄자들 과거 세탁에 해당 권리가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공인, 범죄자의 인격권이 공익을 해치는 형식으로 행사되거나 국민의 알권리,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을 불합리하게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정수 전 청와대 디지털소통센터장은 한 토론회에서 "(잊힐 권리)는 법 권력을 소유한 집단에 유리하다. 이는 국가권력과 기업 권력, 정치인의 불편한 진실에 대한 접근성을 제한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EU와 달리 국내에서 '잊힐 권리'는 명확히 법제화되지 않은 상태다. 굳이 법제화하지 않더라도 명예훼손이나 저작권·초상권·사생활 침해에 해당한다고 판단되는 인터넷 게시물에 대해 차단할 수 있도록 법으로 보장돼 있어서다.

특히 명예훼손은 링크뿐 아니라 원본까지 삭제할 수 있고 원본 제작자까지 처분토록 하는 강력한 무기로써 작용한다.
부분적 수단 확대 중…"국가 차원 디지털성범죄 전담기구 마련돼야"
지우개 서비스 개요 /사진=김지영 디자인기자
다만 성 착취 영상이나 개인정보 유출 사건 등으로 인한 디지털 피해자들이 늘면서 부분적으로나마 이를 보장할 수 있는 수단을 확대해나가는 추세다.

2016년 6월부터 시행된 '인터넷 자기 게시물 접근 배제 요청권 가이드라인'이 대표적이다. 본인의 게시물임을 입증할 수 있다면 게시판 관리자에게 접근 배제 조치나 게시 중지 요청을 할 수 있게 된 것. 요청이 받아들여지면 해당 게시물은 숨김 처리되거나 캐시가 삭제돼 검색에 노출되지 않게 된다.

지난해 4월부터 온라인 활동 삭제 서비스인 '지우개 서비스'도 시범 운영됐다. 아동·청소년 시기에 게시했지만, 지금은 삭제를 희망하는 게시물에 정부가 대신 접근배제를 요청하는 시범사업 서비스다.

시범운영 결과 유튜브·틱톡 등에 올린 영상 게시물, 네이버 지식인·카페,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SNS 게시물 삭제 요청의 비중이 높았다. 올 1월부터는 해당 서비스의 신청 연령이 기존 '24세 이하'에서 '30세 미만'으로 확대됐고 삭제할 수 있는 게시물의 작성 시기도 기존 '18세 미만'에서 '19세 미만'으로 완화됐다.

불법 촬영물, 성 착취물 피해자라면 디지털 성범죄피해자 지원센터를 통한 삭제 또한 가능하다. 하지만 2020년부터 지난 6월까지 해당 센터를 통한 피해 영상물 삭제분은 요청 건수의 1/3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해외 서버 기반 사업자이거나, 부가통신사업자로 미등록된 성인사이트의 경우 국내법상 의무 이행에 따른 행정 제재가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 국내에서 딥페이크 범죄 등이 무분별하게 확산한 만큼 '잊힐 권리'를 넘어선 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국가 차원 컨트롤 타워 성격의 '디지털 성범죄 피해 전담 기구'가 마련돼야 의견도 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최근 발표한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자 지원 체계 개선방안' 보고서를 통해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산하 디지털 성범죄피해자 지원센터의 역할을 격상하고 성폭력 방지법에 '(가칭)디지털 성범죄방지 종합 지원센터' 근거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소은 기자 luckysso@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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