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저씨', 영국 '개저씨'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김은형
집에서 새는 ‘개저씨’, 밖에서도 샌다. 아직도 꺼지지 않는 “이 새끼들~ 쪽팔려서~” 논란을 보면서 속담이 떠올랐다.
‘야’ ‘너’는 기본값에, 때로는 친근함의 표시랍시고, 때로는 ‘이게 어딜 감히’의 뉘앙스로, 또는 ‘앞에서는 찍소리 못 하면서 뒤에서만 내뱉는’ 포효로 ‘새끼’라는 말을 즐겨 쓰는 건 ‘개저씨’(개+아저씨)의 흔한 언어 습관 중 하나다. 덧붙여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그것이 깨알 사이즈라도―인정하느니 혀를 깨문다는 ‘개저씨’의 비장미까지 골고루 갖춘 이번 사태를 통해, ‘케이(K)’ 접두사를 붙일 만한 한국 문화가 하나 더 추가된 것 같아 자부심을, 아니 여기서는 자괴감을 느낀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만의 현상은 아닌 듯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재임 시절 연설 중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신이 세상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살펴본다면, 보통은 나이 든 사람들, 나이 든 남자들이 길을 막고 서 있을 겁니다.”
전후 베이비붐 세대, 엑스(X)세대, 밀레니얼과 제트(Z)세대까지 구별 연도는 조금씩 다르지만 모든 나라가 비슷한 연배의 세대 명칭이 있고 세대 갈등도 있다. 영국의 경우 ‘요람에서’부터 야무지게 복지를 누리고, 젊은 시절에는 취업 준비는커녕 펑크와 히피 문화에 젖어 사회에 개기기만 하다가, 1980년대 고도성장의 바람을 타고 여피(도시의 젊은 전문직 종사자)로 변신해 한재산을 축적한 베이비붐 세대와 마거릿 대처 총리 이후 ‘긴축 정책의 아이들’로 태어난 밀레니얼 사이 반목이 심하다고 한다. 특히 2016년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투표 결과는, 탈퇴 찬성표에 몰렸던 베이비붐 세대에 대한 분노가 대폭발하는 계기가 됐다.
브래디 미카코의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는 영국의 노동계급 베이비붐 세대 아재들을 다룬 책이다. 빨간색 표지에는 허리춤에 연장들을 꽂고 불룩 나온 배 앞으로 술병을 든 남자가 그려져 있다. 육체노동을 해도 자기 집을 갖고 먹고살 수 있으니 퇴근하면 동네 술집에서 느긋하게 어울릴 수 있었던 세대. 하지만 이제는 그 실루엣조차 루저의 상징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의료비 증가를 걱정하는 다음 세대의 분노를 자극하는 이들.
책에 등장하는 저자의 오랜 이웃들은 모두 노동계급 출신이고 브렉시트 찬성표를 던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민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와 복지를 빼앗아간다는, 어디나 있는 선동과 분노. 그런데 당시 브렉시트 찬성표를 던진 이들조차 통과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기 때문에 문제가 더 커졌다. 한 사람은 동유럽에서 온 노동자들을 고용해 미용실을 운영하는 파트너와 ‘브렉시트 파국’을 맞았고, 다른 이들도 자식에게 맹비난을 들으며 가정의 평화가 대폭 줄었다.
그런데 책은 좀 다른 결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공장 노동자 출신의 스티브는 “이민자들이 학교와 병원을 다 차지하고 있다” “영국은 진짜 주권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해 유럽연합 탈퇴에 찬성표를 찍었지만, 동네 십대들이 중국인 집에 인종차별적 낙서를 하자 순찰대를 조직해 밤마다 아이들을 감시한다. 정치적 선택에서는 우파가 됐어도 가난한 이들끼리 서로 도와야 한다는 연대의식은 여전히 공고하다. 그는 동네 도서관이 영유아 놀이방 통합으로 사실상 없어지자 이에 항의하기 위해 코딱지만 한 놀이방 책상에 앉아 있다가 옆에서 기어 다니는 아기들을 돌보며 조폭 같은 얼굴로 동네 영유아와 엄마들에게 최고 인기인으로 등극한다.
사이먼은 트럼프 방문 때 반대 시위를 나갔다가 방송을 타면서 동네 유명인이 됐다. 그처럼 수많은 중·노년을 거리로 나오게 한 건 엔에이치에스(NHS·무상 국가의료제도)를 통상교섭 의제에 올리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의 발언이었다. 이들의 분노에는 의료 혜택이 줄어든다는 근심도 있지만 비정한 신자유주의, 글로벌 자본주의의 물결에 “지지 않겠다”는 고집과 오기가 옹골지게 들어 있다. 대처 시절부터 시작된 이런 싸움은 판판이 깨져왔지만 영국 복지제도의 마지막 보루에 대한 아재들의 집착과 사랑은 미련할 만큼 순정하다는 게 작가의 이야기다.
우리 아재들에게도 이런 순정이 있을까. 한국의 아재들도 영국 아재들처럼 1980년대 격렬한 싸움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런데 그 아재들이 지키고자 했던 어떤 마지막 보루가, 이웃에 대한 연대의식이 남아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리 각자도생이 시대정신이라지만,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이런 시대정신만은 젊은 세대보다 약삭빠르게 챙기고 실천하는 개저씨들을 보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다. 찌질하면, 촌스러운 아저씨면 어떤가. 사이먼처럼 순정이 남아 있는, 스티브처럼 동네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반전의 ‘개저씨’들을 만나보고 싶다.
문화부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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